우리 선조들

허균 36 - 한정록(閑情錄) 정업(靜業) 2

從心所欲 2021. 10. 24. 13:07
「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정업(靜業)은 12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글은 고요한 데서 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한거자(閑居者)가 글이 아니면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며 흥(興)을 붙이겠는가. 그러므로 제12 ‘정업(靜業)’으로 한다.”

 

● 송차도(宋次道 : 차도는 송(宋) 송민구(宋敏求)의 자) 집의 책은 모두 3~5번의 교감(校勘)을 거쳤으므로 세상에서 송차도 집의 책을 선본(善本 : 여러 이본(異本) 중 제일 좋은 본)으로 삼았다. 송차도가 춘명방(春明坊)의 소릉(昭陵)에 있을 적에 사대부(士大夫)로서 책을 좋아하는 자는 송차도의 집 곁에 많이 집을 세내어 살았는데, 이는 송차도에게 책을 쉽게 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춘명방의 집 전세값은 다른 곳에 비해 배나 비쌌다.

진숙역(陳叔易 숙역은 송(宋) 진염(陳恬)의 자)이 항상 이 일을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규거지(睽車志)》

 

● 진소경(陳少卿)이 책 수천 권, 명화(名畫) 수십 폭을 모았다. 만년에 퇴거하여 화정(華亭)에 있었는데, 학(鶴) 1쌍과 괴석(怪石)하나가 기이하여 사랑할 만하였고, 또 기이한 꽃 수천 본(本)을 정원에 심고는 시(詩)를 지어 자손(子孫)을 경계하기를,

 

滿室圖畫雜典墳 방안 가득한 것은 그림과 책들이요

華亭仙客岱雲根 화정의 선객은 태산(泰山) 중에 있네.

他年若不和花賣 내 죽거든 꽃과 책을 팔지 말지니

便是吾家好子孫 그래야 우리 집안의 착한 자손이니라.

 

하였다. 그러나 진소경이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책들이 모두 민간(民間)에 흩어지고 말았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왕도곤(汪道昆)의 책장의 책갈피에 쪽지를 꽃아 놓은 책이 1만 권도 더 되었다. 객(客)이 그 책들을 곁눈질해 보면 왕도곤은 말하였다.

“쪽지 꽂아 놓은 책이 많다고 흠선(欽羨)하지 말게. 다만 내가 뒤에 찾아보는 데 편리하도록 그렇게 했을 뿐이네. 인생에 있어 꼭 필요한 책을 몇 가지를 숙독해야 하네. 이는 비유하면,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뜻이 맞은 사람은 불과 소하(蕭何)ㆍ장량(張良)ㆍ한신(韓信) 세 사람에 지나지 못한 것과 같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흠선(欽羨) : 공경(恭敬)하고 부러워함.

 

● 원장(元章 송(宋) 미불(米芾)의 자)의 세수첩(洗手帖)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책 한 권을 손에 넣으면 언제나 암송하고 나서 상자에 넣을 때 ‘미씨비완서(米氏秘玩書)’라 도장을 찍거나, 또는 ‘열서(閱書 : 다 보았다는 뜻)’라 도장을 찍어 넣는다.

책상 두 개를 하나는 높게 하나는 낮게 나란히 놓고, 나는 손을 씻고 나서 책을 몸소 가져와 펴서 객(客)에게 보인다. 그러면 객은 인사하고 책상에 기대어 조용히 그 책을 자세히 본다. 그리고 나서 내가 그 앞을 지나가면 객이 ‘무슨 책을 주시오’ 또는 ‘무슨 책을 다 보았소.’라고 한다. 객이 책상에 기대어 책을 보는 일은 지나치게 존귀하고 내가 대출하는 일은 지나치게 미천한 듯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객의 손이나 옷으로 책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해악집(海嶽集)》

 

● 이영화(李永和 : 영화는 남북조시대 이밀(李謐)의 자)가 대문을 닫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는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고 휘장을 내리고, 재산을 털어 책을 편찬하는데, 자기가 직접 편찬하면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가 책 1만 권을 갖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이 많은 책을 다 읽겠는가.” 《해악집》

 

● 송 경문(宋景文 : 경문은 송(宋) 송기(宋祁)의 시호)이 말하였다.

“글을 읽고 문장을 짓는 것은 조용한 가운데서 하는 일이다.” 《해악집》

 

● 황산곡(黃山谷 : 산곡은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말하였다.

“날마다 옛사람의 법서(法書)나 명화(名畫)를 대하면 얼굴 위의 가득한 세속 먼지를 떨어버릴 수 있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황태사(黃太史)가 말하였다.

“사대부가 3일 동안 독서하지 않으면 의리(義理)가 가슴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몰골이 가증스럽고 언어가 무미함을 깨닫게 된다.” 《소창청기》

 

● 황산곡이 말하였다.

“자제(子弟)들의 여러 가지 병은 다 고칠 수 있으나 잘못된 풍속은 고칠 수 없다. 잘못된 풍속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책뿐이다." 《공여일록(公餘日錄)》

 

● 예 문절공(倪文節公 : 문절은 송(宋) 예사(倪思)의 시호)이 말하였다.

“소나무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산새 우는 소리, 들에 벌레 우는 소리, 학(鶴)이 우는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비가 층계에 떨어지는 소리, 눈이 창밖을 스치는 소리, 차를 끓이는 소리 들은 매우 맑은 소리이다. 그러나 그 중에 독서하는 소리가 가장 좋다. 그리고 남이 독서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그렇게 기쁘지 않지만 자기 자제(子弟)의 독서하는 소리는 그것을 들을 때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황산곡은 말하였다.

“천하의 일이란 이해(利害)가 각각 반반씩인데, 전적으로 이(利)만 있고 조그만 해(害)도 없는 것은 오직 책뿐이다.” 《암서유사(巖棲幽事)》

 

● 진계유(陳繼儒)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보면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또 진계유가 말하였다.

“은둔하는 곳에 쭉쭉 뻗는 대[竹]와 유명한 향(香)이 있으면 좋은 복(福)은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나, 복이 없는 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복이 있다 하더라도 독서를 하여 복을 보충해야 한다.” 《암서유사》

 

● 1만 권의 책을 모아 비단으로 싸고, 서화첩(書畫帖) 1천 축(軸)을 수집하여 귀한 비단으로 싼다. 그리고 거문고 1대(臺), 저[笛] 1대, 칼이나 창, 자기 술그릇, 좋은 향(香), 오래된 솥, 비단으로 장식한 탑상(榻床), 소병(素屛)ㆍ다구(茶具)ㆍ묵품(墨品) 등을 갖춰 두고 여가가 있는 날 그 속에서 시를 읊으며 속된 세속의 일로 인한 누(累)가 없다면, 이런 경지야말로 동방(東方)의 정토(淨土)요, 인간세상 중의 선경(仙境)이다. 《암서유사》

 

● 진미공(陳眉公 미공은 : 진계유(陳繼儒)의 호)이 말하였다.

“하도(河圖)ㆍ낙서(洛書)ㆍ팔괘(八卦)ㆍ홍범(洪範)이 모두 도(圖)이다. 글[書]은 그것으로써 연구할 수 있지만, 도(圖)는 반드시 토론(討論)이 있어야 한다. 고인(古人)이 왼쪽에는 도(圖), 오른쪽에는 글[書]을 쓴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글만 있고 도가 없으므로 배우는 공부는 있으나 묻고 토론하는 공부는 없다.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 전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도(圖)인 것이다.” 《미공십부집(眉公十部集)》

▶하도(河圖) :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길이 8척(尺)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서 《주역(周易)》팔괘(八卦)의 근원이 되었다.
▶낙서(洛書) :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의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점으로 된 무늬. 홍범구주(洪範九疇)와 팔괘(八卦)의 근원이 되었다.

 

● 고금(古今)에 문장(文章)으로서 수미(首尾)가 없는 것은 오직 《장자(莊子)》와 《이소경(離騷經)》 두 가지뿐이다. 대개 굴원(屈原)ㆍ장주(莊周)는 모두 슬픔과 즐거움[哀樂]이 남보다 지나친 자들이다. 슬픔은 음적(陰的)인 것을 방조하므로 《이소경》은 고독하고 침잠(沈潛)하여 깊숙이 내려가는 감정이고, 즐거움은 양적(陽的)인 것을 방조하므로 《장자》는 자유분방하고 가볍게 위로 상승하는 감정이다. 슬픔과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웃고 우는 것이 절제가 없고, 웃고 우는 것이 극에 달하면 언어가 절제가 없다. 《미공십부집》

▶수미(首尾) : 머리와 꼬리.

 

● 선진(先秦 : 진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한 때를 기준으로 하여 구분한 것으로 진시황 이전의 시대)과 양한(兩漢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과 서한(西漢)) 시대에는 시문(詩文)이 구비되었고, 진(晉)나라 사람은 청담(淸談)과 서법(書法)이 특색이고, 육조인(六朝人 :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여섯 나라 사람)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당(唐) 나라 사람은 시(詩)와 소설(小說), 송(宋) 나라 사람은 사(詞), 원(元) 나라 사람은 그림과 남북극(南北劇 : 원대(元代)에 성행했던 희곡(戲曲)이 남북으로 각각 특색을 이루었으므로 남북극이라 한다.)이 각각 특색이었는데,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였다. 《미공십부집》

▶청담(淸談) : 위진(魏晉)시대에 노장학파(老莊學派)에 속하는 고절(高節)ㆍ달식(達識)의 선비들이 정치에 실망을 느껴 세사(世事)를 버리고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설을 담론하던 일.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 : 사자구(四字句)와 육자구(六字句)로 대구(對句)를 써서 지은 일종의 문체. 육조 시대에 많이 행한 문체로 사륙문(四六文)이라고도 한다.

 

● 이백(李白)은 천재(天才)로 으뜸이고, 백거이(白居易)는 인재(人才)로 으뜸이고, 이하(李賀)는 귀재(鬼才)로 으뜸이다. 《미공십부집》

 

● 독서에는 요점을 파악해 내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 예를 들면 《도덕경(道德經)》같으면 ‘유무(有無)’ 두 자가 요점이고, 《능엄경(楞嚴經)》은 ‘심안(心眼)’ 두 자가 요점이고, 《심경(心經)》은 ‘관조(觀照)’ 두 자가 요점이다. 《암서유사》

 

● 《산해경(山海經)》을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높고 험한 산을 대할 때 느끼는 기분을 갖게 하고, 《수신기(搜神記)》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괴이하고 허망(虛妄)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게으른 병을 고치는 데는 이보다 나은 책이 없다. 《암서유사》

▶산해경(山海經) : 주(周)나라와 진(晉)나라 시대 사이에 나온 작자 미상의 지리서(地理書), 산천(山川), 초목(草木), 조수(鳥獸) 등에 관한 기괴한 이야기를 실은 책으로 총 18권.
▶수신기(搜神記) : 진(晉) 나라의 간보(干寶)가 신괴(神怪)한 설화(說話)를 모은 책.

 

● 운서(韻書)ㆍ자학(字學)ㆍ소지(嘯旨)는 산거(山居)하는 여가에 익히지 않을 수 없다.  《암서유사》

 

● 패관소설(稗官小說)이나 산경지지(山經地誌)는 때때로 책상에 놓아두면, 들어 보지 못한 견문을 넓히기도 하고 노년(老年)에 벗이 될 수도 있다. 《암서유사》

 

● 어린아이들은 세사(世事)로써 독서 시간을 분산시켜서는 안 되고, 독서로써 세사(世事)에 통하여야 한다. 《암서유사》

 

● 경사자집(經史子集 : 중국 서적(書籍)의 분류법으로, 경서(經書)ㆍ사서(史書)ㆍ제자류(諸子類)ㆍ시문집(詩文集)의 네 가지)은 글로써 서로 전하지만, 비각(碑刻)은 고인(古人)의 필적(筆蹟)이 함께 보존되므로 옛것을 좋아하고 옛날의 어진 이와 벗하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서로 그것을 찾아 전하는 것이다.  《암서유사》

 

● 바둑을 두는 것보다 책을 베끼는 것이 낫고, 남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고인(古人)의 아름다운 말이나 행실을 적는 것이 낫다. 《암서유사》

 

● 고첩(古帖)을 두루 찾아 책상 위에 놓으면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긴 해를 소일하고 속된 마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이 그 하나요, 육서(六書)와 자획법(字劃法)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둘째요, 고인의 기자(奇字)를 많이 아는 것이 셋째요, 선현(先賢)의 풍류(風流)와 운치(韻致)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고, 그들의 유행(遺行)이나 일적(逸籍), 그리고 그들의 교유(交遊) 관계와 택묘(宅墓)를 알 수 있는 것이 넷째요, 책상에 매달려 앉아 날마다 머리를 모아 공부하지 않아도 고첩을 통하여 저절로 점진적으로 공부가 되는 것이 다섯째의 좋은 점이다. 《태평청화(太平淸話)》

▶육서(六書) : 한자의 성립을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분류법인 상형(象形)ㆍ지사(指事)ㆍ회의(會意)ㆍ형성(形聲)ㆍ전주(轉注)ㆍ가차(假借)를 가리킨다.
▶유행(遺行)이나 일적(逸籍) : 행실이나 노닌 발자취.

 

[<고사인물도 10폭병풍((故事人物圖十幅屛風)> 中 7폭, 민화병풍, 국립민속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