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현상(玄賞)은 13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옛날에 고인(高人)이나 운사(韻士)는 풍류(風流)를 서로 감상하거나 문예(文藝)로써 스스로 즐겼다. 그러므로 서화(書畫)나 거문고 타기, 바둑 등 여러 가지 고상한 놀이는 사람의 성미(性味)에 맞아 근심을 잊어버릴 수 있는 도구(道具)로서 없앨 수 없다. 따라서 제13 ‘현상(玄賞)’으로 한다.”
● 구양 솔경(歐陽率更 : 구양순(歐陽詢))이 길을 가다가 고비(古碑)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는 바로 색정(索靖)의 글씨였다. 구양순은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그 비를 관찰한 다음 떠나 수백 보(步)를 갔다가 되돌아와서는 말에서 내려서서 그 비를 보다가 피곤해지면 자리를 깔고 앉아서 사흘 동안이나 본 뒤에 떠났다. 《세설신어(世說新語)》
● 염입본(閻立本)은 그림을 잘 그렸다. 형주(荊州)에 가서 장승요(張僧繇 : 남조(南朝) 양(梁) 나라의 화가)의 구적(舊迹)을 보고 말하기를,
“헛되이 이름을 얻었을 뿐이다.”
하였다. 이튿날 다시 가서 보고는 말하기를,
“근대(近代)의 가수(佳手) 정도는 된다.”
하고, 이튿날 또 가서 보고 말하기를,
“명성(名聲)이 높은 사람 중에는 헛되이 명성을 얻은 사람이 없다.”
하고, 그 그림 밑에서 유숙(留宿)하여 앉아서 보고 누워서 보았다. 《세설신어》
● 미원장(米元章 : 미불(米芾)의 자)이 진주(眞州)에 있을 적에 채유(蔡攸)를 주중(舟中)에서 뵈니, 채유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첩(書帖)을 내보였다. 미원장은 경탄(驚嘆)하고 다른 그림과 바꾸기를 간청하였으나 유가 난색(難色)을 표하자, 미원장이 말하기를,
“공(公)이 만약 나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살지 않고 곧 이 강에 빠져 죽을 것입니다.”
하고, 고함을 치며 뱃전에 걸터앉아 강으로 뛰어들려 하니, 채유가 마침내 그 서첩을 주었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 미원장이 다른 사람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畫)를 빌려다가 모사(摸寫)한 다음 그 원본과 모사본을 함께 돌려주면 더러는 그 모사본을 진본(眞本)으로 여겼다. 그는 잘된 서화(書畫)에는 미가비완(米家祕玩)이란 도장을 찍고 그 밖의 서화에는 청완(淸玩)이란 도장을 찍었다. 미원장이 일찍이 회남(淮南)을 유람할 적에 작은 배에 서화를 싣고 갔는데, 밤에 그 배에서 무지개가 뻗쳐 달을 꿰뚫었다 한다. 《백천학해(百川學海)》
● 조자고(趙子固 : 자고는 송(宋) 조맹견(趙孟堅)의 자)는 몸을 수양함이 아고(雅古)하고 식견(識見)이 넓었으며, 법서(法書)를 매우 좋아하여 삼대(三代 : 하(夏)ㆍ은(殷)ㆍ주(周)) 이후의 금석문(金石文)과 명가(名家)의 법첩(法帖)을 많이 소장(所藏)하고 있으면서도 생각에 드는 서화를 만나면 주머니를 털어 구입(購入)하였다.
그는 매화와 대를 잘 그렸는데 더러는 도선(逃禪)과 석실(石室)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산수화(山水畫)에 더욱 뛰어나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그는 금도(襟度)가 맑고 깨끗하며 육조(六朝) 제현(諸賢)의 풍도(風度)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미남궁(米南宮 : 미불)에 비유하였다.
그는 동서(東西)를 널리 유람하였는데, 유람을 떠날 때면 반드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서화를 다 가져다가 배에 횡(橫)으로 진열(陳列)하여 싣고 겨우 자리 한 장을 깔아 기거(起居)하는 곳으로 삼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좌우에서 아무 서화나 꺼내어 어루만지고 완상(玩賞)하여 심지어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다. 조자고의 서화선(書畫船)이 닿는 곳이면 조자고를 잘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조자고의 서화선임을 알았다 한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조자고(趙子固)는 일찍이 다섯 글자가 손상(損傷)되지 않은 난정첩을 삽천(霅川)에서 구득(求得)하고는 매우 좋아하여 그 밤으로 가흥(嘉興)으로 돌아오다가 승산(昇山)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혔다. 자고는 얕은 물에 서서 난정첩을 손에 들고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난정첩이 여기 있으니 다른 것은 개의(介意)할 것 없다.”
하고, 권미(卷尾)에 다음과 같은 여덟 글자를 썼다.
“생명은 가벼이 여길 수 있으나 이 지극한 보물을 보호해야 한다.[生命可輕至寶是保]” 《설부(說郛)》
● 원미공(元美公 :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자)이 송(宋) 나라 때 판각(板刻)한 양한서(兩漢書)를 갖고 있는데, 모두 관판(官板)으로 길이가 5척 정도이고, 뒷면에는 문민공(文敏公 : 문민은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시호)의 초상화(肖像畫)가 있으니, 대개 조위공(趙魏公 : 조맹부가 죽은 뒤 위국공(魏國公)에 증직(贈職)되었다)의 물건인 듯하다. 원미가 5백 금(金)에 사서 역시 그 뒤에다가 자기의 초상을 그렸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고장강(顧長康 : 장강은 동진(東晉) 고개지(顧愷之)의 자)은, 사유여(謝幼輿 : 유여는 동진(東晉) 사곤(謝鯤)의 자)가 암석(巖石) 속에 있는 모습을 그렸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장강이 대답하였다.
“유여는 ‘구학(丘壑)은 자신이 유량(庾亮 : 동진(東晉)의 명장(名將)인 현상(賢相))보다 낫다.’ 하였으니, 이 사람은 마땅히 구학에 버려야 한다.” 《세설신어》
▶구학(丘壑) : 언덕과 골짜기라는 뜻으로 산수의 한적하고 청아한 정취, 자연에서 즐기는 삶이나 풍류를 의미하는 말. |
● 막운경(莫雲卿 명(明) 막시룡(莫是龍)의 자)이 말하였다.
“서늘한 저녁에 못가에 걸터앉아 몇 잔의 술을 마시고 간혹 붓과 벼루를 벌여 놓고 고첩(古帖) 한두 줄[行]을 쓰고 거문고를 타면 정신이 복희씨(伏羲氏)의 세상에 노는 듯하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이상은 서화에 대해 말하였다.
● 거문고는 타지 않는 것을 묘수(妙手)로 여기고, 바둑은 두지 않는 것을 고수(高手)로 여긴다. 순박(淳樸)함만을 보여주고 단점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옛날의 지인(至人)이다. 《소창청기(小窓淸記)》
▶지인(至人) : 노장학(老莊學)에서 도덕(道德)이 극치(極致)에 이른 사람 또는 사물의 이치에 밝고 양생법을 잘 지켜서 오래 사는 사람. |
● 동파(東坡 : 소식(蘇軾)의 호)의 금시(琴詩)에,
若言琴上有琴聲 만약 거문고에 거문고 소리가 있다면
放在匣中何不鳴 갑 속에 넣었다고 어찌 울지 않는가.
若言聲在指頭上 만약 소리가 손가락 끝에서 난다면
何不於君指上聽 어찌 그대 손가락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가.
하였으니, 동파는 거문고로 설법(說法)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조자앙(趙子昂)에게 송설(松雪)이란 이름의 거문고가 있었는데, 때때로 그 거문고를 상(牀) 위에 내어놓기만 하고 무롱(撫弄)하지는 않았다. 《미공비급》
▶무롱(撫弄) : 연주(演奏). |
이상은 거문고에 대해 말하였다.
● 왕낭중(王郞中)은 바둑 두는 것을 좌은(坐隱)이라 하였고, 지공(支公 : 지둔(支遁))은 바둑 두는 것을 수담(手談)이라 하였다. 《미공비급》
▶좌은(坐隱) : 앉아서 은둔하다. |
● 노래꾼 원도(袁綯)가 일찍이 동파(東坡)를 따라 객(客)들과 금산(金山)을 유람하였는데, 마침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서 사방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게다가 강물은 계속 흐르고 달빛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일행(一行)이 금산 묘고대(妙高臺)에 올라 원도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그는 수조가(水調歌)를 불렀는데,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았다.
明月幾時有 명월이 얼마 동안 있게 될는지
把酒問靑天 술잔 잡고 청천에 물어보리라.
노래가 끝나자 동파는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동파가 말하였다.
“나는 본래 바둑 둘 줄을 모르는데, 일찍이 혼자서 여산(廬山) 백학관(白鶴觀)을 유람할 때 보니 관중(觀中) 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고 낮잠을 자고 있는데, 고송(古松)과 시내 사이에서 바둑 두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매우 기쁜 생각이 들어 이때부터 바둑을 배우려 하였으나 끝내 배우지 못하였다. 나의 아들 과(過)는 바둑을 둘 줄 알므로 담이 태수(儋耳太守) 장중(張中)이 날마다 와서 과와 바둑을 두었다. 나도 옆에 앉아 하루 종일 구경하여도 싫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를 짓기를,
五老峯前白鶴遺址 오로봉 앞 백학관 유지에는
長松蔭庭風日淸美 노송의 그늘 뜰 덮어 풍일이 맑네.
我時獨遊不逢一士 나는 때로 혼자 거닐지만 선비 하나 못 만났는데
誰與棋者戶外屨二 아들은 누구와 바둑 두는지 문 밖에 신이 두 켤레.
不聞人聲時聞落子 사람 소리 들리지 않고 때로 바둑알 소리만 들릴 뿐
紋秤坐對誰究此味 바둑판 놓고 마주앉은 이 맛 뉘라서 알랴.
空鉤意釣豈在魴鯉 낚시 없이 낚으려니 생각이 어찌 물고기에 있겠는가.
小兒近道剝啄信指 아들놈은 도에 가까워 바둑알 놓느라 손가락 펴네.
勝固欣然敗亦可喜 이기면 참으로 기쁘지만 져도 역시 기쁘니
優哉游哉聊復爾耳 평화롭고 한가로움이여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장공외기(長公外記)》
● 남악(南岳) 이암로(李巖老)는 졸기를 좋아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바둑을 둘 때면 암로는 번번이 베개를 베고 누웠다. 몇 판의 바둑이 끝난 뒤에야 그는 한 번 돌아누우며 말하기를,
“나는 비로소 한 판을 두었는데, 그대들은 몇 판을 두었는가?”
하였다. 동파(東坡)가 말하였다.
“암로는 항상 사각(四脚)의 바둑판을 사용하는데, 다만 바둑판 위에 검은 돌만을 놓을 뿐 흰 돌은 놓지 않는다. 과거에는 변소(邊韶)와 적수(敵手)였는데, 지금은 진박(陳搏)에게 백을 빼앗겼으나 이기는 때도 더러 있었다. 바둑을 둘 때에는 마음속에 전혀 딴 생각이 없다 하니,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시에,
夜涼吹笛千山月 천산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고
路暗迷人百種花 많은 꽃길을 덮어 사람을 혼미케 하네.
棋罷不知人換世 바둑이 끝나니 세속을 잊을 수 있고
酒闌無奈客思家 술 취하니 나그네 고향 생각 어쩔 수 없네.
한 것이 거의 이 사람에 가깝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나는 일찍이 바둑은 세상을 피할 수 있고 잠은 세상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둑은 짝을 지어 밭을 가는 장저(長沮)ㆍ걸닉(桀溺)과 같아서 한쪽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잠은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列子)와 같아서 홀로 가고 홀로 올 수 있으니 아, 훌륭하다 희이(希夷 : 송(宋) 진단(陳搏)의 호)여, 잠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구나. 《이씨분서(李氏焚書)》
이상은 바둑에 대해 말했다.
● 백낙천(白樂天)이 여산(廬山) 초당(草堂)에서 소단(燒丹)할 적에 비운리(飛雲履)를 만드는데, 검은 비단으로 바탕을 하고 사면에는 흰 솜으로 구름 떨기를 만들어 달고 사선향(四選香)으로 염색(染色)하였으니, 신을 흔들면 마치 연무(煙霧)가 이는 듯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내 발 밑에서 구름이 생기니 곧 하늘로 오르게 될 것이다.” 《소창청기》
● 충명일(种明逸)은 선천적(先天的)으로 술을 좋아하여 차조를 심어서 술을 담그고 말하기를,
“공산(空山)이 깨끗하고 고요하니 편안히 화기(和氣)를 기를 수 있다.”
하고, 인하여 운계취후(雲溪醉侯)라 호(號)하였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천수생(天隨生 : 당(唐) 육구몽(陸龜蒙)의 호)은 집이 황폐(荒廢)하여 장옥(場屋)이 희소(希小)하고 공지(空地)가 많았는데, 앞뒤의 공지에 구기자(枸杞子)와 국화를 심어 술을 담그는 자료로 삼았다. 한여름이 되어 구기(枸杞)의 가지와 잎이 쇠어 억세고 맛이 쓰고 떫은데도 오히려 아이들을 재촉하여 계속 채취(採取)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큰 읍(邑)에서 일을 좋아하여 날마다 짐승을 잡아 반찬을 만들어서 그대를 배불리 먹일 집이 없지 않은데, 그대는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고 빈창자 속에 옛 성현의 도덕(道德)과 언어(言語)만을 채우고 있으니, 무엇 때문에 스스로 이처럼 자신을 괴롭히는가?”
하니, 천수생은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몇 년 동안을 배고픔을 참고 경(經)을 읽었는데, 어찌 도고아(屠沽兒)에게 주식(酒食)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해서 이러고 있겠는가.” 《소창청기》
▶도고아(屠沽兒) : 본래는 백정과 술장수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천시(賤視)해서 하는 말. |
이상은 복식(服食)에 대해 말하였다.
● 정 소사(鄭少師 : 당(唐) 정훈(鄭薰))는 자기의 집에 작은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고서 칠송처사(七松處士)라 자호(自號)하고 말하였다.
“후세에 내가 오류선생(五柳先生)과 대우(對偶)가 될 것이다.” 《하씨어림》
▶오류선생(五柳先生) : 도연명(陶淵明). 버드나무를 사랑하여 집 주위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칭했다. |
● 선우백기(鮮于伯機 : 백기는 원(元)의 선우추(鮮于樞)의 자)는 일찍이 황폐(荒廢)한 포원(圃園)에서 괴송(怪松) 한 그루를 발견하여 자기가 거처하는 서재(書齋) 앞에 옮겨 심고, 그 괴송을 지리수(支離叟)라 호칭(呼稱)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루만지며 즐겼다. 《하씨어림》
● 막정한(莫廷韓 : 정한은 명(明) 막시룡(莫是龍)의 자)에게 미해(米海)의 악석(岳石)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색깔이 검고 가까이에서 보면 그 색깔이 맑고 푸르다. 그 돌의 높이는 대략 7~8촌(寸) 정도이고 길이는 한 자 정도인데, 봉만(峯巒)과 동학(洞壑 : 구렁)이 많으며 두드리면 청월(淸越)한 소리가 나고 아무리 건조(乾燥)한 날씨라도 푸른 윤기(潤氣)가 흘렀다. 그 돌 밑에 운경(雲卿)이란 두 글자를 새겼다. 《암서유사(巖棲幽事)》
● 지공(支公 : 진(晉) 지둔(支遁))은 학(鶴)을 좋아하였다. 그가 담동(郯東)의 앙산(岇山)에 머물고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학 한 쌍을 보내왔다. 세월이 조금 지나자 학은 날개가 자라 날려고 하였다. 지공은 학이 날아가 버릴 것이 걱정되어 곧 그 날개를 자르니, 학은 날개를 퍼덕일 뿐 다시 날지 못하고, 날개를 돌아보며 목을 늘어뜨려 마치 번민(煩悶)하는 뜻이 있는 듯하였다. 도림(道林 : 지둔의 자)은 말하기를,
“이미 하늘을 날 뜻을 가졌는데 어찌 사람들의 애완물(愛玩物)이 되려 하겠는가.”
하고, 다시 날개가 자란 뒤에 날려 보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 노도(盧度 : 남제(南齊)의 은사)가 여릉(廬陵)에 은거(隱居)하며 집 앞 연못에 양어(養魚)를 하였는데 그 고기들에게 모두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부르면 고기들은 차례로 와서 먹이를 먹고는 돌아갔다. 《하씨어림》
● 회계산(會稽山)에 채씨(蔡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산중에 은거하며 수십 마리의 쥐를 길렀는데, 오라고 부르면 오고 가라고 하면 바로 가서 사람의 말을 신속하게 알아들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채씨를 적선(謫仙)이라 하였다. 《하씨어림》
● 위제천(魏濟川)이 여섯 마리의 학을 길러 날마다 죽을 쑤어 먹이니 3년이 되자 그 학이 글자를 알았다. 제천이 검서(檢書)할 적에 학에게 책을 물어오게 하였으나 조금의 차착(差錯)도 없었다. 《하씨어림》
● 상산은사(商山隱士) 고태소(高太素)의 집을 청심정(淸心亭)이라 하는데, 일정한 시간이 되면 뜰 밑에서 원숭이가 울었다. 사람들은 그 원숭이를 보시원(報時猿)이라 하였다. 《하씨어림》
이상은 금충(禽蟲)에 대해 말하였다.
● 봄날 뜰가의 몇 그루 매화(梅花)나무에 꽃이 피면 석 잔 술을 마시고서 매화나무를 몇 바퀴 돌며 꽃을 감상하고 냄새를 맡으면 맑은 향내가 코를 찌른다. 인하여 고계적(高季迪 : 명(明) 고계(高啓)의 자)의
雪滿山中高士臥 눈 가득한 산중에는 고사가 누웠고
月明林下美人來 달 밝은 숲 밑엔 미인이 온다.
하는 시구를 외니, 참으로 매화와 더불어 조화를 이룬 듯하다. 《소창청기》
● 진계유(陳繼儒)가 말하였다.
“향(香)은 사람의 생각을 그윽하게 하고, 술은 사람의 뜻을 원대(遠大)하게 하고, 돌(石)은 사람의 뜻을 강하게 하고, 거문고는 사람의 뜻을 적막(寂寞)하게 하고, 차[茶]는 사람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 대[竹]는 사람의 뜻을 싸늘하게 하고, 달은 사람의 뜻을 외롭게 하고, 바둑은 사람의 뜻을 한가하게 하고, 지팡이[杖]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물은 사람의 뜻을 비게 하고, 눈은 사람의 뜻을 넓게 하고, 칼[劍]은 사람의 생각을 슬프게 하고, 포단(蒲團)은 사람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미(美)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워하게 하고, 중은 사람들을 담담(淡淡)하게 하고, 꽃은 사람들을 운치(韻致)가 있게 하고, 금석이정(金石彝鼎)은 사람을 고아(古雅)하게 한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병에 꽃을 꽂아 책상머리에 놓는 데는 각각 알맞은 곳이 있다. 매화는 한겨울에도 굴하지 않으니 그 매화꽃을 몇 바퀴 돌면 시상(詩想)이 떠오르고, 행화(杏花)는 봄에 아리땁게 피니 화장대(化粧臺)에 가장 알맞고, 배꽃에 비가 내리면 봄 처녀의 간장이 녹고, 연꽃이 바람을 만나면 붉은 꽃잎이 벌어지고, 해당화(海棠花)와 도화(桃花)ㆍ이화(李花)는 화려한 연석(筵席)에서 아리따움을 다투고, 목단과 작약(芍藥)은 가무(歌舞)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꽃다운 계수나무 한 가지는 웃음을 짓기에 충분하고, 그윽한 난초 한 묶음은 이별하는 사람에게 줄 만하다. 비슷한 것을 이끌어 실정(實情)에 전용(轉用)하여 맞는 취향(趣向)이 많다. 《미공비급》
이상은 꽃에 대해 말하였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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