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록(閑情錄)」은 허균이 중국 서적에 나오는 ‘은거(隱居)’에 대한 글들을 16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한 글이다. 청공(淸供)은 14번째 주제로 허균은 그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산에 은거하여 살 때도 역시 필요한 일용품(日用品)이 있는데, 침석(枕席)이나 음식이 세속(世俗)과는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제14 ‘청공(淸供)’으로 한다.”
● 상범(向範)은 손님을 대접할 때에 칠화반(漆花盤)ㆍ과두저(科斗筯)ㆍ어미시(魚尾匙)를 사용하였다. 《소창청기》
● 밥은 부드럽게 익혀 먹고 고기는 문드러지도록 푹 삶아 먹고 항상 술을 적게 마시고 매일 밤 혼자 자는 것이 옛사람들의 양생(養生)하는 묘법(妙法)이었다. 내가 일찍이 이 뜻을 풀어서 좌우(座右)에 다음과 같이 써 두었다.
“부드러운 밥으로 위(胃)를 보양(保養)하고, 푹 익은 고기로 온 몸을 보양하고, 술을 조금 마심으로써 피를 보양하고, 홀로 잠으로써 정신을 보양한다. 이는 일용(日用)의 묘법(妙法)이며 집에서 거처하는 자가 천성(天性)을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이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산 속에서의 생활은 비록 뛰어나게 맛있는 것은 없지만 청아(淸雅)한 맛은 자못 풍부하다. 나는 연(蓮) 종류에서는 도톰히 살찐 열매와 뿌리의 단맛을 취하고, 마름 종류에서는 감(芡)의 따스함과 마름의 줄기를 얻고, 나무 종류에서는 대나무의 운치와 고(菰)나무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물 종류에서는 순채의 향긋함과 아욱의 담박함과 토란의 미끄러움을 취한다. 또 계수나무로 기름을 내고 국화를 심고 매화로 장을 담근다. 농어회와 포를 준비해 곁들여 놓고, 농사일을 얘기하다가 거문고와 서화에까지 말이 미친다. 이같이 조석으로 편히 누워 성세(盛世)를 즐기니 큰 벼슬자리의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미공비급》
● 동파(東坡 : 송(宋) 소식의 호)가 이렇게 말하였다.
“동주(同州)에서 나는 양(羊)을 푹 쪄서 행락(杏酪)을 발라 먹는데 숟가락으로 먹고 젓가락으로 먹지 않는다. 남도(南都)의 발심면(撥心麪)으로 괴엽냉도(槐葉冷淘 : 냉면의 이름)를 만들고, 양읍(襄邑)에서 나는 작은 돼지로 국을 끓이고, 공성(共城)에서 나는 좋은 쌀로 밥을 짓고, 거위 알을 찌고 오흥(吳興)의 포인(庖人)이 송강(松江)에서 나는 농어로 회를 쳐서 가져오면 배불리 먹고, 여산(廬山) 강왕곡(康王谷)의 물로 증갱(曾坑 : 차 이름)의 상품을 달여 마신다. 조금 후 옷을 벗고 편히 누워서 사람을 시켜 나의 적벽부(赤壁賦) 전후편을 외게 하면 크게 즐거울 것이다.”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
● 청정반(靑精飯) : 버들잎이나 오동잎의 즙(汁)으로 만든다. 이를 먹으면 양기(陽氣)를 도와 주는데, 도가(道家)에서 중하게 여긴다.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滑憶雕胡飯 미끄럽기는 조호반 같고
香聞錦帶羹 향긋한 맛은 금대국 같네.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금대(錦帶)는 꽃을 가리킨 것이다. 《소창청기(小窓淸記)》
● 방수(方壽)는 6월에 연꽃을 찧어서 벽방주(碧芳酒)를 만들어 마셨다. 《소창청기》
● 당자서(唐子西 : 자서는 송(宋) 당경(唐庚)의 자)가 혜주(惠州)에 있을 때에 맛이 순한 술을 양생주(養生主)라고 불렀고 독한 술은 제물론(齊物論)이라고 불렀으며, 양성재(楊誠齋 : 성재는 송(宋) 양만리(楊萬里)의 호)는 순한 술을 금반로(金盤露)라 했고 독한 술은 초화우(椒花雨)라 불렀다. 《소창청기》
● 차의 채집은 정선(精選)해야 하고, 차의 저장은 건조하게 해야 하며, 차를 끓일 때는 정결(精潔)하게 해야 한다. 《소창청기》
● 산곡(山谷 :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호. 소식의 제자)이 이렇게 말하였다.
“차를 감별하는 법과 대나무를 감별하는 법은 같으니 살이 찐 것은 좋지 않고 여윈 것이 좋다. 다만 서리를 흠뻑 맞은 것이라야 한다.” 《소창청기》
● 차를 끓일 때는 불을 너무 세게 하면 좋지 않으니 세게 하면 맛이 지나치게 쓰다. 그러므로 간수(磵水)나 송풍(松風)과 같은 소리가 나는 정도로 끓이는 게 좋다. 또 차를 거를 때는 갑자기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병에 옮기고 불을 끈 뒤에 잠깐 물이 끓는 것이 그치기를 기다려서 걸러야 절도에 맞는다. 《미공다동(眉公茶董)》
● 동파(東坡 : 소식(蘇軾)의 호)의 시에,
蟹眼已過魚眼生 해안이 지나가매 어안이 나오네.
하였다. 《미공다동》
▶해안이 ... 나오네 : 해안(蟹眼)은 차를 끓일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이 게의 눈과 비슷하므로 이른 말이고, 어안(魚眼) 또한 물이 끓어 이는 거품이 물고기 눈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차를 끓일 때 처음에는 게의 눈처럼 생긴 물방울이 몰리다가 한참 지나면 물고기 눈처럼 변하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
● 차가 처음 눈이 터서 여린 것을 일창(一槍)이라 하고 점점 자라서 잎이 핀 것을 기(旗)라 한다. 더 자란 것은 쓸모가 없다. 《미공다동》
● 원향 신명(遠香新茗)은 마땅히 큰 바가지에 시냇물을 길어오고, 물가에 흩어져 있는 삭정이를 주워다가 다리 없는 석정(石鼎)에 때서 옥진(玉塵 : 눈의 별명)에 끓여 마셔야 한다. 그러나 이같이 신선의 취미를 즐기면서 마음속의 뜻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우니 다만 채원(菜園)의 즐거움만을 터득했을 뿐이다. 《미공다동》
● 백낙천(白樂天)이 재계하고 있을 때 유우석(劉禹錫)이 술병이 났다. 이에 우석이 국화의 순으로 만든 나물과 절인 무를 가져다 주고, 낙천의 육반다(六斑茶) 두 주머니를 바꿔다 마시고 나서 술이 깨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 왕검(王儉)이 주옹(周顒 : 남제의 학자. 《노자》와 《주역》을 좋아했다)에게 묻기를,
“경(卿)은 산중(山中)에 살면서 무엇을 드시오?”
하니, 주옹이,
“적미(赤米 : 나쁜 쌀)ㆍ백염(白鹽)ㆍ녹규(綠葵)ㆍ자료(紫蓼)를 먹습니다.”
하였다. 또 문혜태자(文惠太子)가 묻기를,
“채식(菜食)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맛이 있나요?”
하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른 봄에는 일찍 나오는 부추가 맛이 있고, 늦여름에는 늦배추가 맛이 있습니다.” 《하씨어림》
● 죽순(竹筍)은 산중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맑고 아득한 운치를 주니, 진실로 소식(蔬食) 중의 기품(奇品)이다. 이것으로 국을 끓이거나 포(脯)를 뜨는 것은 모두 그 본맛을 잃게 되니 구워서 찢어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나는 술에 취하고 배가 불러 조갈증(燥渴症)으로 괴로울 때면 집사람을 시켜서 이를 구워먹으면 그 단맛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나서 송라(松蘿 : 차의 이름)와 무이(武夷 : 무이산에서 나는 차의 이름)를 달여서 마시면 고통이 확 풀린다. 《미공비급(眉公祕笈)》
● 채갑(菜甲 : 막 돋아난 채소의 잎)이 약간 자란 것은 우유보다도 맛이 좋다. 비오는 썰렁한 날 밤에 아이를 시켜서 따다가 무치고 술을 곁들여 놓고서 야담(夜談)을 나누며 그 맑고 향긋한 맛을 즐기면, 향긋함이 가슴속의 답답함을 싹 씻어주니 어찌 반드시 많은 세척제를 써서 씻어내야만 시원하겠는가. 강동(江東)의 천리호(千里湖)에서 나는 순갱(蓴羹)은 맛이 좋아 조미를 하지 않고 먹는데 이에 비하면 약간 나을 뿐이다. 《미공비급》
● 동파(東坡)가 말하였다.
“산우(山芋 : 고구마)로 옥삼갱(玉糝羹)을 끓이면 빛과 향기와 맛이 모두 좋다. 하늘의 수타(酥酡 : 인도에서 우유로 만드는 음식)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상(地上)에는 결코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없을 것이다.” 《미공비급》
● 산중(山中)에서 살 때에 고비나 고사리가 없더라도 매화로는 국을 끓여 먹을 만하고, 무나 옥란(玉蘭)으로는 국수를 만들고 모란으로는 우유를 달이고 장미와 수유로는 장을 담그고, 구기자와 파ㆍ자형화(紫荊花)ㆍ등(藤)나무 꽃으로는 반찬을 만들 수 있다. 그 밖에 콩꼬투리ㆍ오이지ㆍ나물순ㆍ송화 가루는 또 죽순을 대신할 만하니 이것들이 모두 산에서 사는 사람의 반찬이다. 《미공비급》
● 옛날 군자들은 음식을 대할 때 행할 가르침이 있어서 지금도 향당(鄕黨 : 《논어(論語)》의 편명)과 곡례(曲禮 《예기》의 편명)에 실려 있다. 그러나 사대부(士大夫)들이 음식을 대할 때 이를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이제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방법을 줄여서 군자들이 음식을 대할 때 지킬 오관(五觀)을 짓는다. 《이문광독(夷門廣牘)》
1. 음식에 든 공력(功力)의 다소와 음식의 유래를 생각할 것.
이 음식은 땅을 일구고 작물을 심고 거두어 빻고 물에 씻은 다음 끓여서 만든 것이니 노력이 매우 많이 든 것인데 하물며 살아 있는 것을 잡아서 자기의 입맛을 즐기겠는가. 한 사람이 먹는 것은 열 사람이 수고한 결과이다.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는 부조(父祖)가 심력(心力)을 다해 이룩한 것을 먹는 것이고, 비록 자기의 재산으로 생활하는 경우일지라도 또한 조상의 음덕(陰德)을 받은 것이다. 벼슬할 경우에는 백성의 고혈(膏血)을 먹는 것이니 더구나 말할 게 없다.
2. 자기의 덕행(德行)이 온전한가 아닌가의 여부를 헤아려서 공봉(供奉)에 응할 것.
처음에는 어버이를 섬기고 중도에 임금을 섬기고 마지막으로 입신(立身)하는 것이 목표이니 이 세 가지를 모두 완전히 잘 행한 경우에는 이러한 공봉(供奉)을 받고 이에 결점이 있을 때는 마땅히 부끄러운 줄을 알아서 감히 맛있는 음식을 모두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3. 마음을 단속해서 지나치게 욕심 내는 등의 허물을 저지르지 않는 것으로 요점을 삼을 것.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데는 먼저 세 가지 허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즉 좋은 음식을 탐(貪)내는 것, 나쁜 음식을 대하면 성내는 것, 하루 종일 음식을 먹으면서도 음식이 온 곳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군자가 음식을 대할 때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은 이 허물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4. 음식은 양약(良藥)이니 몸이 파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오곡(五穀 : 일반적으로 쌀ㆍ보리ㆍ조ㆍ콩ㆍ기장)과 오소(五蔬 : 아욱ㆍ콩잎ㆍ염교ㆍ파ㆍ부추)로 사람을 기르고, 어육(魚肉)으로 노인을 보양하는데, 몸이 파리해지는 것은 기갈(飢渴)이 주병(主病)이고, 기타 4백 4가지 병은 이에 따른 종속적인 병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음식을 의약으로 생각하고 먹어서 몸을 부지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만족할 줄을 아는 자는 음식 드는 것을 항상 약을 먹는 마음으로 먹는다.
▶4백 4가지 병 : 사람의 몸에 있는 일체의 병. 사람의 오장에 각각 81가지씩의 질병이 있어 도합 4백 5종이 되는데 죽음 한 가지를 빼면 4백 4가지가 된다. |
5. 도(道)를 이루기 위하여 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군자는 밥을 먹는 잠깐 동안의 시간도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먼저 정성스러운 행동을 한 뒤에야 음식을 먹는 것이다. ‘저 군자여, 소찬(素餐)하지 않는구나.[彼君子兮不素餐兮]’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소찬(素餐) : 공(功)도 없이 봉록(俸祿)만 받아먹는 것. |
● 산곡노인(山谷老人 :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호)이 말하였다.
“예(禮)에서 음식을 먹는 순서를 가르치는 것은 가르침의 지엽적인 것이고 음식을 들 때에 오관(五觀)을 지어놓고 따르는 것은 가르침의 근본인 것이다. 대개 지금 사대부들은 선왕(先王)의 법언(法言 : 귀감이 되는 말)을 욀 때의 자신과 기거(起居)하고 음식을 들 때의 자신과는 다르므로 가르침을 부득이 이같이 하는 것이다.
군자에게는 구사(九思)가 있으니 이는 종신토록 생각하라는 것으로, 음식을 들 때에 지킬 오관(五觀)을 짓는 것도 종신토록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이같이 행하고 매번 인지(仁智)만을 생각한다면 위의 별개의 두 사람인 것이 합해서 완전한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구사(九思) : 군자가 항상 수시로 반성하여 잘 행하야 할 아홉 가지 일. 즉 볼 때는 분명하게, 들을 때는 총명하게, 안색은 온화하게, 외모는 공손하게, 말은 충직하게, 일은 조심스럽게 하고, 의심나는 것은 묻기를, 분한 일을 당했을 때는 차후의 곤란이 닥칠 일을, 이익을 보았을 때는 의(義)에 맞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 |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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