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44 - 오륜행실도 2

從心所欲 2021. 11. 4. 11:13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오륜행실도 8폭 병풍(五倫行實圖八幅屛風)》은 열녀, 충신, 효자와 더불어 겨레붙이의 돌봄,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의리,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기 소재를 골라 만든 병풍이다. 사례에 대한 설명이 한글 없이 한문만으로 써진 것을 보면 소위 식자(識者) 집안에서 만든 병풍으로 추정된다.

 

[《오륜행실도 8폭 병풍(五倫行實圖八幅屛風)》, 병풍전체 크기 99 x 296cm, 국립민속박물관]

 

제1폭인 <여종지례(女宗知禮)>의 내용은 지금 시대의 여성들이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을 만큼 전통적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의 종합세트다.

 

송나라의 포소(鮑蘇)가 외지에 벼슬살이를 가서 다른 여자를 얻었다. 그럼에도 본처 여종(女宗)은 고향에서 시어미를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였다. 또한 남편이 벼슬살이 하는 고을에 가는 사람 있으면 반드시 남편에게 안부를 전하고, 첩에게도 선물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시누이가 자신의 오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는데 무엇 때문에 이 집에 남아있느냐며 집을 나가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종(女宗)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한 번 독좌상(獨坐床)을 받으면 바꾸지 않는 법이라, 남편이 죽어도 다른 이를 얻지 않으니, 길쌈하며 고치 뽑으며 베 짜 옷 만들고 술 빚으며 음식 만들어 시부모를 섬기며 한결같음으로 곧은 도리를 삼고 착하게 따름으로 순리를 삼는 법인데, 어찌 오로지 사랑하는 것만을 좋은 일로 삼으리오. 예[周禮]에서 천자는 (부인이) 열둘이고 제후는 아홉이며 공경대부는 셋이며 선비는 둘이라 했으니, 내 남편은 선비라 두 여자 두는 것이 옳지 않은가? 또 여자는 일곱 가지 내칠 일이 있고 남자는 하나도 내칠 일이 없거니와, 일곱 가지 내칠 일에 질투가 제일이고 음란하고 도둑질 하고 말 많고 버릇없고 자식 없고 모진 병 앓는 것이 다 그 뒤에 있으니, 내 시누이가 예절은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내쫓길 행동을 하게 하려 하니, 장차 무엇에 쓰리오?”
그리고는 시어미를 더욱 성심을 다해 섬겼다. 송공(宋公)이 이 말을 듣고 마을 어귀에 문을 세우고 ‘여자의 으뜸’이란 뜻으로 ‘여종(女宗)’이라 호(號)하였다.
▶독좌상(獨坐床) : 전통 혼례에서, 새신랑과 새색시가 서로 절할 때에 차려 놓는 음식상. 

 

[《오륜행실도 8폭 병풍(五倫行實圖八幅屛風)》 中 <여종지례(女宗知禮)>, 국립민속박물관]

 

4폭 <순인맥주(純仁麥舟>는 중국 북송(北宋)의 명재상으로 주자로부터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범중엄(范仲淹)과 그 아들 범순인(范純仁)에 관한 이야기로 붕우(朋友)에 대한 고사다.

 

범순인(范純仁)은 송나라 때의 중엄(仲淹)의 아들이다. 순인(純仁)이 나이가 젊었던 시절에 중엄이 순인으로 하여금 고소(姑蘇) 고을에 가서 밀 오백 섬을 배에 싣고 오라고 하였다. 순인은 밀을 싣고 돌아오는 길에 단양(丹陽)에 이르러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을 만났다. 그때 만경이 이르기를, “내가 여기 온 지 두 달이 되었소. 그동안 시신 셋을 빈소(殯所)만 차려 두고, 장사를 지내고 돌아가려 해도 함께 의논할 데가 없소.”라고 하자, 순인이 자기의 밀을 실은 배를 통째로 만경에게 다 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순인이 아버지 중엄을 뵙고 모신 자리에서 아버지 중엄이 순인에게 물었다.
“거기에 가서 옛 친구를 만나 보았느냐?”
이에 순인이 이르기를, “만경이 세 번의 초상을 당했으나 장사를 치르지 못하여 단양에 묵고 있으며 지금은 곽원진(郭元振) 같은 사람이 없어 의논할 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중엄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밀을 실은 배를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니, 이에 순인이 이르기를, “이미 주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오륜행실도 8폭 병풍(五倫行實圖八幅屛風)》 中 <순인맥주(純仁麥舟>,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오륜행실도 병풍》은 스승과 제자[師生], 형제, 겨레붙이[宗族], 붕우, 충신, 열녀 조에서 각각 한 사례를 골라 만든 6폭 병풍이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6폭 병풍, 지본채색, 각 폭 140 x 45.5cm, 국립민속박물관]

 

제1폭의 <환영분상(桓榮奔喪>은 ‘환영(桓榮)이라는 인물이 스승의 초상에 급히 달려가다’라는 고사다.

 

한(漢)나라 때의 환영(桓榮)이 젊었을 때 서울에 가서 글을 배웠는데 구강(九江)에 있는 주보(朱普)에게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쓸 돈이 없어서 늘 남의 일을 해 주고 생활하면서도 공부를 힘써 하고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던 중 스승 주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환영은 즉시 달려가 장례를 치르고 구강에 가서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곳에 머무르면서 글을 가르치니 배우는 제자가 백 명이나 되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6폭 병풍 中 <환영분상(桓榮奔喪>, 국립민속박물관]

 

제3폭인 <군량척처(君良斥妻)>는 겨레붙이 간의 우애(友愛)를 다룬 고사인데 친척 간의 교류와 친분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으로서는 황당하게 들릴 만한 내용이다. 또한 여자들이 기겁할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나라 때의 유군량(劉君良)이 사대(四代)를 한데 살아 육촌 형제도 친형제 같더니, 집 안에 한 말의 쌀, 한 자의 비단도 사사로이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내는 남편에게 따로 살기를 졸랐다. 그때 뜰에 있는 나무 위의 까마귀 새끼들의 자리를 바꿔 놓으니 서로 싸우고 울며 지저귀었다. 집안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자 군량의 아내가 이르기를, “세상이 어지러워 새도 한데 있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리오.”라고 하자, 군량도 아내의 말을 옳게 여겨 형제가 각각 따로 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 달 남짓 되어 군량은 이것이 아내의 계략이었음을 알고는 아내를 내쫓으면서 “네가 내 집의 일을 망쳐 놓았다.” 라고 하였다. 군량은 형제를 불러 울면서 아내 때문에 잘못한 것을 사과하고 다시 모여 같이 살았다. 나라에서는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정문(旌門) :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표창(表彰)하기 위하여 그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6폭 병풍 中 <군량척처(君良斥妻)>, 국립민속박물관]

 

제4폭 <서회불부(徐晦不負)>는 서회가 벗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당나라 때의 서회(徐晦)의 벗인 양빙(楊憑)이 죄를 짓고 강등되어 임하(臨賀)의 원(員)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자 친척과 벗들이 혹시라도 자신들도 죄에 연루될까 봐 겁이 나서 양빙을 찾아가 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서회는 혼자 멀리까지 가서 전송하고 돌아왔다. 그러자 재상 권덕여(權德輿)가 이르기를, “임하의 원을 전송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회는 “내가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부터 임하의 원이 나를 알았는데 이제 와서 그를 어찌 버리겠소. 만약 공(公)이 다른 사람에게 참소를 당하여 나가게 되었을 때 그렇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덕여가 서회의 사람됨이 곧은 것을 조정에 이야기하였더니 이이간(李夷簡)이 서회를 추천하여 감찰어사에 임명하였다. 서회는 이이간에게 가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추천하게 된 사정을 물었다. 이이간이 이르기를, “그대가 양(楊) 임하(臨賀)도 저버리지 않는데 나라를 저버리겠소?”라고 하였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6폭 병풍 中 <서회불부(徐晦不負)>, 국립민속박물관]

 

 

참고 및 인용 : 국립민속박물관, 역주 이륜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역주 삼강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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