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46 - 오륜행실도 4

從心所欲 2021. 11. 6. 11:26

6폭은 효자와 충신에 대한 이야기다.

 

황향선침(黃香扇枕) - 황향(黃香)이 베개에 부채질하다 :

한나라의 황향(黃香)은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잃자 너무 슬퍼하여 마치 죽을 사람처럼 몰골이 초췌하여졌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또한 혼자 아버지를 봉양하면서 여름에는 베개와 돗자리에 부채를 부치고, 겨울이면 제 몸으로 이불을 따뜻이 덥혀 놓았다. 이에 고을 원이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황향은 후에 벼슬이 상서령에 이르렀으며 자손들이 다 높은 관직에 올랐다.

 

기신광초(紀信誑楚) - 기신이 초나라를 속이다 :

항우(項羽)가 영양(滎陽)을 포위하자 한나라 임금이 근심하였다. 그때 장군 기신(紀信)이 나서서, “일이 시급하니 제가 초나라를 속이겠습니다. 그 사이 왕은 피하소서.” 하였다. 밤에 진평이 여인 2천 명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내자 초나라가 사방으로 공격하였다. 때에 기신이 황색 지붕이 있는 임금의 수레를 타고 왼쪽에 임금의 깃발을 꽂고 나가면서 “성 안에 밥이 없어 한나라 임금이 초나라에 항복한다.”고 소리쳤다. 이에 초나라 병사들이 만세를 부르며 성의 동문 쪽으로 모여든 사이에 한나라 임금은 스물 남짓한 말을 데리고 서문으로 성을 빠져나갔다. 이에 항우가 기신을 불살라 죽였다.

 

[《오륜행실도 10폭병풍(五倫行實圖十曲屛風)》中 제6폭, 국립민속박물관]

 

7폭은 충신, 열녀, 효자의 이야기다.

 

소무장절(蘇武杖節) - 소무가 부절을 잡다 :

소무(蘇武)가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匈奴)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다. 흉노는 투항을 거부하는 소무를 북해(北海: 바이칼호) 부근으로 추방하여 소무는 그곳에서 19년간 양치기로 지냈다. 한나라와 흉노가 기원전 81년에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한 뒤에야 소무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40세에 떠나 60세가 넘어 돌아왔다. 소무는 그때까지 사신으로 떠나면서 황제에게 사신의 증표로 받은 부절(符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식처곡부(殖妻哭夫) - 식의 처가 남편을 위해 곡하다 :

제나라 장공(莊公)이 거(莒)나라를 공격할 때에 기량식(杞梁殖)이 싸움에 나가 죽었다. 장공이 돌아오다가 기량식의 아내를 마주 보고는 사람을 시켜 가서 길에서 문상하자, 식(殖)의 처(妻)가 이르기를, “남편이 죄로 죽은 것이 아닌데, 제가 어떻게 들판에서 문상을 받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장공이 수레를 돌이켜 집에 가서 예의를 갖춘 뒤 식의 아버지 집으로 찾아가 정식으로 문상하였다. 기량의 아내가 자식 없고 친척도 없어 갈 데 없어 남편의 주검을 성(城) 아래 누이고 슬피 울자,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열흘 동안을 우니 성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식의 처는 장례를 마치고 이르기를, “내 어디로 가리오? 여자는 모름지기 의지할 곳이 있는 법이거늘, 내 위로 부모가 없고, 가운데로 남편이 없고, 아래로 자식이 없으므로, 내 정성과 절의를 보일 데가 없구나. 그러니 또한 죽을 수밖에 없도다.” 하고는, 치수(淄水)에 빠져 죽었다.

 

곽거매자(郭巨埋子) - 곽거가 아들을 묻다 :

한나라 때 곽거(郭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늘 밥을 덜어 세 살 먹은 손자에게 주었다. 이를 보던 곽거가 어느 날 자기 아내에게 “가난한 터에 내 아들이 어머니의 밥을 빼앗으니 묻어 버리는 것이 낫겠소.” 하고는 땅을 팠다. 땅을 석 자쯤 파자 금 한 가마니가 나왔는데, 거기에 글이 쓰여 있기를,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내린다.”고 하였다.

 

[《오륜행실도 10폭병풍(五倫行實圖十曲屛風)》中 제7폭, 국립민속박물관]

 

8폭 역시 충신, 효자, 열녀의 이야기다.

 

약수효사(若水効死) - 약수가 죽음을 바치다 :

중국 북송의 제8대 황제 휘종(徽宗)이 금나라 병영에 잡혀갔는데, 금나라 사람이 황제의 황포(黃袍)를 벗기고 청의(靑衣)로 갈아입히려하자, 이부시랑(吏部侍郞) 이약수(李若水)가 안고 울며 금나라 사람을 개라고 꾸짖었다. 금나라 사람이 이약수를 끌어내어 헐도록 얼굴을 치니, 이약수가 고통을 못 이겨 엎드러졌다. 금의 장수 점한(粘罕)이 이르기를, “이시랑을 죽이지 말라.” 하니, 이약수가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고자 하였다. 이에 옆에서 이르기를, “오늘 순종하면 내일 부귀할 것이다.” 하자, 약수는 “하늘에 두 해 없는데 내 어찌 두 임금을 두랴?” 하였다. 또한 그의 종이 또 이르기를, “영감님 부모가 늙으시니, 조금 굴복하시면 한 번 가 뵈실 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까, 꾸짖어 이르기를, “충신이 임금 섬기되 죽어도 두 뜻 없으니, 내 다시는 집을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러나 부모가 늙으셨으니, 네 돌아가거든 바로 사뢰지 말고 내 형제를 시켜서 조용히 사뢰게 하라.” 하였다. 열흘은 지나 점한이 이약수를 불러 일을 의논하려 하는데, 이약수가 금나라의 죄를 열거하며 그를 꾸짖자, 금나라 병사가 이약수를 잡아내려 그 입을 쳐서 피가 낭자했다. 그런데도 이약수가 피를 뿜으며 더욱 꾸짖자, 칼로 목을 베고 혀를 잘라 죽였다. 이약수가 죽기에 임하여 “머리를 들어 하늘께 물음이여! 하늘이 마침내 말을 아니하시는도다. 충신이 죽음에 이름이여! 죽은들 또한 무슨 허물이겠는가?”라고 노래하였다.

 

맹종읍죽(孟宗泣竹) - 맹종이 대나무 숲에서 울다 :

삼국 오(吳)나라 사람 맹종(孟宗)은 마음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늙고 병든 어머니가 겨울이 다가오는데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맹종이 죽순을 구하지 못해 대나무 숲에서 울고 있을 때 죽순 두어 줄기가 솟아났다. 맹종이 가져다가 국을 만들어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사람들이 모두 일컫기를, “효도가 지극해서 그렇다.” 하였다.

 

고행할비(高行割鼻) - 고행이 코를 베다

한나라의 고행(高行)이 남편을 일찍 잃은 뒤 시집가지 않고 혼자 지내자 고관(高官)들이 다투어 취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고 있었다. 이때 양(梁)나라 임금이 재상을 시켜서 초빙하니, 고행이 이르기를, “여자의 법도는 한 번 시집가면 개가하지 않음으로 곧은 절개를 온전케 하는 것이니, 죽은 이를 잊고 산 사람에게 가면 신의가 아니고, 귀한 이를 보고 천한 이를 잊으면 정절이 아니며, 정의를 버리고 이익을 따르면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코를 베었다. 그런 뒤 이르기를, “내 이미 형벌을 받았으니, 죽지 아니함은 어린 자식을 못 견뎌 함입니다. 임금이 나를 구하심은 외모이니, 이제 형벌 받은 사람이니 놓아 주소서.” 하므로, 임금이 그 행실을 높이 여겨 그 몸을 보살피고 이름을 ‘높은 행실’이라는 뜻의 고행(高行)이라 하였다.

 

[《오륜행실도 10폭병풍(五倫行實圖十曲屛風)》中 제8폭, 국립민속박물관]

 

9폭은 효자와 충신에 대한 고사다.

 

누백포호(婁伯捕虎) - 누백이 범을 잡다 :

고려 때의 한림학사 최누백(崔婁伯)은 수원 호장(戶長)의 아들인데, 나이 열다섯 때에 아버지가 사냥을 갔다가 범에게 물려죽었다. 이에 누백이 호랑이를 잡으러 나서자 어머니가 말렸다. 누백이 “아비의 원수를 갚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즉시 도끼를 메고 범의 자취를 밟은 끝에 배불리 먹고 누워있는 범을 발견했다. 누백이 바로 범의 앞으로 달려들어 “네가 내 아버지를 먹었으니 내 반드시 너를 먹겠다.” 하고 범을 꾸짖자, 범이 꼬리를 치며 엎드렸다. 누백이 도끼로 범을 찍어 배를 가른 뒤 아버지의 살과 뼈를 꺼내어 그릇에 담고 범의 고기는 항아리에 담아 물 가운데 묻었다. 아버지를 홍법산(洪法山) 서편에 장사지내고 시묘살이를 하는 중 하루는 선잠이 들었는데, 아버지가 나타나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어서는 지키니[生則養死則守], 누가 효도의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하였는가?[誰謂孝無始終]” 하고는 사라졌다. 누백은 거상(居喪)을 마친 뒤 범의 고기를 다 먹었다.

 

주운절함(朱雲折檻) - 주운이 난간을 끊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에 관리와 백성들이 모여 사뢰기를, “재난과 변고는 왕씨(王氏)가 권세를 잡은 탓입니다.” 하니, 임금이 자신의 스승인 장우(張禹)의 집에 가서 의견을 묻게 하였다. 그러자 장우는 왕씨가 황제의 외척인 탓에 자신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재난과 변고는 뜻이 깊어 쉬이 알 수 없으니, 폐하가 좋은 정치를 하셔서 응하시면 됩니다. 갓 글을 배운 소인배의 말을 들어서 무엇 하시겠습니까?” 라고 답을 했다.

주운(朱雲)이 이 말을 듣고는 황제에게 “조정의 대신이 다 거짓인 것이니, 참마검(斬馬劒)을 주시면 영신(佞臣) 하나를 베어 나머지를 다스리고 싶습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누구냐?”고 묻자 주운이 “장우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성제 임금이 대노하여 “조무래기가 스승님을 모욕한다. 반드시 죽일 것이니, 어사(御使)는 끌어 내리라.” 하였다. 주운이 난간을 붙잡고 버티자 난간이 꺾어졌다. 주운은 끌려가며 “신이 용방(龍逄)과 비간(比干)을 따라서 즐기는 것이 족하겠습니다”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때 신경기(辛慶忌)라는 장군이 머리를 땅에 박으며 피가 흐르도록 임금에게 충언하자, 임금이 마음이 풀리어 주운의 죄를 용서하였다. 후에 부러진 난간을 고치려 하자 성제는, “고치지 말고 그 대로 두어, 곧은 신하의 뜻을 나타내라.” 하였다.

▶참마검(斬馬劒) : 말을 벨만큼 날카롭고 큰 검.
▶영신(佞臣) : 아첨하는 간사스러운 신하.
▶용방(龍逄) :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신하로 임금에게 간언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비간(比干) :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숙부로 주왕에게 간언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오륜행실도 10폭병풍(五倫行實圖十曲屛風)》中 제9폭, 국립민속박물관]

 

10폭은 열녀, 효자, 충신에 대한 고사다.

 

취가취팽(翠哥就烹) - 취가가 삶겨지다.

원나라 혜종 때 크게 흉년이 들어 군량이 부족하자 평장(平章) 유합랄불화(劉哈剌不花)의 군대가 사람들을 잡아 삶아 먹으려했는데 여기에 이중의(李仲義)라는 사람이 포함되었다. 이를 안 이중의의 아우가 달려가서 형수 유씨(劉氏)한테 전하였다. 유씨(劉氏)의 이름은 취가(翠哥)였다. 유씨가 달려가서 울며 엎드려 이르기를, “저 사람이 내 남편이니 살려 주소서. 우리 집에 장 한 독과 쌀 한 말 닷 되가 있으니, 그것을 가져오시고 내 남편일랑 놓아 주소서.”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유씨는 “내 남편은 여위고 작거니와 살찌고 검은 사람이 맛이 좋다 하는데, 내가 살찌고 검으니, 내가 대신 죽고 싶습니다.”고 하였고, 군대가 남편은 놓아 주고 유씨를 삶았다.

 

강혁거효(江革巨孝) - 강혁의 큰 효도

한나라 강혁(江革)이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난리를 만나, 어머니를 업고 숨어 다니면서 나물을 캐어 어머니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자주 도적을 만나 잡혀갈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강혁은 슬피 울며 공손하고 간절하게, 늙은 어머니가 있음을 사정하여 도적들을 감동시켰다. 때로는 도적들이 숨어서 피할 길을 알려주기도 하여 난리 중에 몸을 보전할 수 있었다. 강혁은 헐벗으며 더부살이 하면서도 어머니를 공양하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나중에 고향에 돌아와 세시(歲時)에 점고(點考)를 하러 관아에 갈 때면 거동이 어려운 늙은 어머니를 수레에 태우고 우마 대신에 자신이 직접 수레를 끌고 다녀, 마을에서 일컫기를, “강거효(江巨孝)”라 하였다. 거효(巨孝)는 ‘큰 효도’라는 뜻이다. 어머니가 죽자 무덤에 가서 3년을 살고 그 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아, 고을 원이 사람을 시켜 벗게 하였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쌀 천(千) 곡(斛)을 하사하고 8개월마다 고을 원으로 하여금 안부를 확인하고 양과 술을 보내게 하였다.

▶점고(點考) : 명부(名簿)에 일일이 점을 찍어 가며 조사하는 인원점검.
▶곡(斛) : 10말이 1곡.

 

길재항절(吉再抗節) - 길재가 절의를 지키다 :

고려 말, 길재(吉再)는 주서(注書)라는 관직에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이 아직 동궁 시절에 길재를 불러들이고, 정종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에 임명하게 하였다. 그러자 길재가 상서하기를, “내가 신조(辛朝, 1386년, 고려 32대 우왕 12년)에 급제하여 문하주서를 하였습니다. 신하가 두 임금이 없으니 시골에 놓아 보내시면 늙은 어미 봉양하고 두 성(姓)을 아니 섬기는 뜻을 이루고 싶습니다.” 하였다. 정종이 권근에게 “길재가 절의를 지키어 벼슬을 아니 하니, 어찌 처치하겠는가?”라고 묻자, 권근이 “한(後漢) 때 엄자릉이 벼슬을 아니 하므로, 광무황제가 그 뜻을 좇아서 놓아 보냈으니, 이제 길재가 갈 것을 구한다면, 제 마음대로 하게 하소서.”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이 허락하여 돌려보내면서, 길재의 집을 나라에서 보살피라 하였다. 태종 18년(1418)에 세종이 즉위하자 정종의 명을 지켜 길재의 아들을 벼슬 시키고 길재에게는 나중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추증하였다.

 

[《오륜행실도 10폭병풍(五倫行實圖十曲屛風)》中 제10폭, 국립민속박물관]

 

 

참고 및 인용 : 국립민속박물관, 역주 이륜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역주 삼강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