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5년인 1474년에 편찬이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본예식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규정하고 정리한 책이다. 여기서 오례(五禮)란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이다. 그 가운데 길례는 국가에서 사직과 종묘 등에 제사 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흔히 제사(祭祀)를 돌아가신 이의 ‘죽음’과 연관시키는 탓에 ‘흉(凶)’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조들은 제사를 길(吉)한 것으로 보아 길례(吉禮)라 하였다. 물론 누군가의 죽음을 당하여 치르게 되는 장례(葬禮)는 흉례(凶禮)에 속한다.
조선에서의 국가제사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하늘 신[天神]을 위한 환구제(圜丘祭), 국토와 오곡의 신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조상신이라 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제례(宗廟祭禮), 농사의 신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드리는 선농제(先農祭)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제사들은 제사의 등급에 따라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나 절차가 달랐으며 제례에 사용하는 음식이나 복식, 음악, 무용도 차이가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종묘친제규제도설(宗廟親祭規制圖說) 병풍》은 조선의 국왕이 종묘에 친림하여 행하는 제사의식의 절차를 그림과 글로 정리한 병풍이다.
이런 류의 병풍은 정조의 지시에 의하여 처음 제작되었다고 한다. 정조는 이 병풍을 만들어 향소(享所)에 두고 종묘에서 제향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실무 관원들이 늘 보고 익혀 잘 준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종묘제례는 정조뿐만 아니라 역대 모든 조선 왕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였다. 단순히 자신들의 선조에 대한 예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효’의 실천을 만백성에게 보여준다는 상징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효(孝)’의 개념은 ‘충(忠)’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종묘제례는 유교의 중심가치인 충(忠)과 효(孝)를 고양하는 통치의식이기도 했다. 정조는 그런 종묘제례가 예(禮)에 따라 한 치의 실수나 착오 없이 치러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종묘친제규제도설(宗廟親祭規制圖說) 병풍》은 종묘 제사의 주요 절차를 상단에는 그림을 넣고 하단에는 글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병풍의 제1폭 하단에 종묘의 각 실에 대한 설명이 철종까지 기록되어 있어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은 고종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종묘는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졌다고 하며. 고려에서도 종묘가 있었고 조선은 1392년 건국 후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웠었다. 그러나 도읍을 한성으로 정하면서 1395년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 쪽에 사직(社稷), 왼쪽에 종묘를 설치하였다. 현재 종묘의 정전(正殿)에는 27명의 국왕 중 태조를 비롯한 열아홉 왕과 왕비들의 신주 49위(位)가 봉안되어 있다. 나머지 왕들과 그 왕비들의 신주는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져 있다.
1폭의 <종묘전도(宗廟全圖)>는 종묘의 건물 배치도이다. 그림 아래에는 종묘의 정전(正殿)과 부속건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 제1실부터 17실까지 각 실(室)에 모셔진 물품, 즉 신위(神位)와 옥책(玉冊), 금보(金寶) 등의 현황을 기록해 놓았다. 현재 종묘 정전의 신실(神室) 수는 19실이지만 병풍이 만들어진 고종 때에는 17실이었다. 옥책(玉冊)은 왕이나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에 새긴 간책(簡冊)을 말하고, 금보(金寶)는 추상존호(追上尊號)를 새긴 도장을 가리킨다.
영녕전(永寧殿)은 종묘 정전의 서쪽에 위치해있다. 세종 때에 정종(定宗)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종묘의 태실(太室)이 부족하여 정전(正殿)에 모셔져 있던 태조 이성계의 선대(先代) 4조(祖)를 모실 별묘(別廟)를 건립하게 된 것이 창건의 배경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셔두었다가 세월이 지나 5세의 원조(遠祖)가 되면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그러나 현재 종묘와 영녕전에 모신 신위를 보면 그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듯하다. 태조는 예외로 치더라도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 인조, 영조, 정조와 같은 왕들은 여전히 종묘 정전에 모셔지고 있는 반면, 정종, 문종, 단종, 인종, 명종, 경종 같이 치세 기간이 짧았던 왕들은 영녕전에 모셔져있다. 지위가 군(君)으로 격하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없다.
그림 아래에는 영녕전 영역에 위치한 건물들의 명칭, 규모, 기능과 제1실부터 14실까지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오향(五享)은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납일(臘日)에 왕이 직접 드리는 큰 제사[大祭] 때에 쓰일 제기를 살펴보는 성기(省器)와 제물로 쓰는 희생(犧牲)을 살펴보는 성생(省牲)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납일(臘日)은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未日)로, 이때는 대개 연말 무렵으로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리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4폭의 오른쪽은 <속절삭망의도(俗節朔望儀圖)>이다. 속절(俗節)은 제삿날 이외에 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을 가리키는데 정월 초하루와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이다. 삭망(朔望)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소규모로 제사를 드렸다. 4폭 왼쪽의 ‘천신의도(薦新儀圖)’는 햇곡식과 햇과일을 바치는 의식인 천신의(薦新儀)에 대한 의례도이다.
이어서 5폭은 왕이 봄과 가을에 종묘를 찾아 참배하는 의식인 전알의(展謁儀)를 그린 <전알의도(展謁儀圖)>이다.
종묘제례의 주요 절차는 제일 먼저 신을 맞이하는 의식인 취위(就位)와 신관례(晨祼禮) - 음식을 바치는 진찬(進饌) - 신에게 잔을 세 번 올리는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로 이어지며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의식인 종헌례(終獻禮)가 끝나면 제사에 쓰인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례(飮福禮)를 행한다. 그런 뒤 제례에 올린 제물을 거두는 철변두(徹邊豆) -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로 4번 절을 하는 송신사배(送神四拜)로 의식이 끝난다. 이후에 제관(祭官)은 제례에 쓰인 축문과 물건을 태우는 망료례(望燎禮)를 별도로 행한다.
제6폭은 <오향친제설찬도(五享親祭設饌圖)>는 맨 위의 큰 그림이 오향(五享) 때의 제상(祭床) 차림인 ‘설찬도(設饌圖)‘이다. 아래 왼쪽은 제례 때 술잔을 놓는 곳인 신실(神室) 밖의 준소(尊所)에 준비되어야 할 제기(祭器)들이고, 오른쪽은 제물을 준비하는데 쓰이는 기구인 ’전사청기용(典祀廳器用)‘ 이다.
제7폭은 <오향친제반차도(五享親祭班次圖)>로 종묘의 큰 제사인 오향(五享) 때의 참석자들의 위치와 대형이다.
왕이 붕어하고 삼년이 지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 때, 해당 왕과 왕비의 도장인 보인(寶印),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담은 책(冊), 책봉할 때 내리는 임명장인 교명(校命), 왕의 통치 행위 중 모범이 될 만한 사례들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이 함께 봉안되었다. 종묘 정전(正殿)의 19개의 신실의 각 중앙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주장(神主欌)이 있고, 그 좌우로 동쪽에는 보장(寶欌), 서쪽에는 책장(冊欌)이 배치되어 있다.
마지막 폭인 제8폭인 <친상책보의도(親上冊寶儀圖)>는 왕이 직접 책(冊)과 보인(寶印)을 올리는 의식에 대한 설명이다.
그림 중간 왼쪽 부분에 휘장을 치고 병풍을 두른 앞에 높인 것이 책장과 보장에 봉안되기 전에 책과 보인을 모셔두는 배안상(拜案床)이다.
참고 및 인용 : 국립고궁박물관, 위대한 문화유산(안태욱,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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