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49 - 친정도(親政圖)

從心所欲 2021. 11. 28. 15:20

친정(親政)의 사전적 의미는 임금이 직접 정치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뜻은 임금이 관리들에 대한 인사 행정을 직접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전권을 쥐고 무엇이든 왕의 마음대로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조선의 시스템은 그리 만만하고 허술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관제상 인사권은 문신은 이조(吏曹)에, 무신(武臣)은 병조(兵曹)에 있었다. 인사행정의 최종 책임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에게 있었지만, 그렇다고 판서가 마음대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새로운 관리를 임명할 때 당상관은 참의(參議)가 추천하고, 당하관은 전랑(銓郞)으로 불리는 정5품직 정랑(正郞)과 정6품직 좌랑(佐郞)이 추천했다.

특히 이조의 전랑들에게는 삼사(三司)의 당하관에 대한 임명동의권인 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自代權)까지 부여되어 있어, 이들은 비록 품계는 낮으나 상급자나 다른 기관의 압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인사 추천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해두었다.

 

물론 인사의 최종결정권자는 왕이다. 특히 2품 이상의 벼슬에 대해서는 왕이 직접 결제를 하는데, 이때는 각 직위마다 추천된 세 사람의 후보 중에서 왕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었다. 이것이 소위 낙점(落點)이다.

조선은 이러한 인사 행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치적을 조사하고 종합하는 시스템도 운영하였다. 모든 문무(文武) 양반의 관리들에 대하여 1년에 두 번, 즉 음력 6월과 12월에 그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모여 공 있는 자는 승진시키고 죄 있는 자는 좌천시키거나 파면시키며 새로운 인재를 선발하여 임용하였다. 이를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했다.

 

도목정사 가운데서도 왕이 직접 현장에 참여하여 재결하는 도목정사를 친림도정(親臨都政)이라고 하는데, 친정도(親政圖)는 바로 이 친림도정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로 미루어 ‘친정(親政)’은 친림도정에서 유래된 말로 보인다.

친림도정은 숙종과 경종 연간에도 있었지만 거의 이벤트성 행사였다. 반면에 영조는 재위 17년인 1741년부터 자주 친림도정을 행하였다. 정조 역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재위 2년부터 지속적으로 친림도정을 행하였다.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 저본(紵本)채색, 계첩 크기 51 x 33cm, 국립중앙박물관 ㅣ 영조4년인 1728년 창덕궁 어수당에서의 친림도정을 그린 것으로 그림은 첩의 양면을 펼친 상태]

 

정조9년, 1785년의 친림도정은 중희당(重熙堂)에서 거행되었다. 이전까지는 주로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창경궁 명정전 서쪽에 있는 정자인 함인정(涵仁亭)에서 실시했다.

중희당(重熙堂)은 창덕궁 내부에 있었던 동궁의 본 건물이다. 정조가 특별히 이 해에 중희당을 택한 것은 전해에 세자로 책봉된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조의 기대와는 달리 문효세자는 다음 해에 홍역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정조는 다시는 중희당에서 친림도정을 하지 않았다.

 

정조9년 당시 정조는 인사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사에 따른 여러 가지 복잡한 기준 때문에 관리가 될 자격을 갖추고도 관직을 맡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각 관서에서는 인원이 비어 업무가 원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이 친정도정에서 인사 소통을 강력히 지시하였다. 더하여 구체적인 인사정체 해소 방안을 직접 지시하면서 친림도정이 왕의 단순한 의례적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은 정조9년의 친림도정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병풍이다.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1폭 ~ 4폭,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5폭 ~ 8폭,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대정(大政)은 12월에 행해지는 도목정사를 말한다. 6월에 행해지는 도목정사는 ‘소정(小政)’이라 불렸다. 갱운(賡韻)은 다른 사람의 시운(詩韻)에 맞추어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이날 도정을 마친 뒤 어제(御製)를 내려 도목정사에 참석한 신하들로 하여금 이에 차운하여 시를 짓도록 했다. 정조의 어제와 19명의 신하들이 지은 시가 병풍 1폭에 실려 있다.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1폭, 국립중앙박물관]

 

중희당친정시갱운(重凞堂親政時賡韻)이라는 제목에 이어진 첫줄이 정조의 어제다.

 

親臨大政重凞堂 중희당에서 열리는 대정에 참석하여

誡勑銓臣有十行 전신(銓臣)을 훈계하고 타일렀으니

此日霑官凡幾輩 오늘 은혜를 입어 벼슬아치가 된 모든 무리는

廣恩端祝萬年祥 임금의 은혜를 넓혀 만년의 상서로움을 축원할지라.

▶전신(銓臣) : 원래는 문무반(文武班) 관료들에 대한 도목정사를 맡고 있는 이조와 병조의 신하들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친림도정에 참석한 신하들을 가리킨다.

 

정조의 어제(御製) 시에서 신하들이 차운해야 할 글자는 ‘堂’, ‘行’, ‘祥’ 이었다. 신하들이 지은 시를 적은 7번째, 14번째, 28번째 줄에 ‘堂’, ‘行’, ‘祥’ 자가 나란한 것을 볼 수 있다. 정조의 어제 시는 신하들보다 한 글자 높게 시작하여 적었다.

이 1폭의 상단에는 후대에 쓴 글이 적혀있다. 이는 친림도정에 참석했던 승정원 좌부승지 홍인호(洪仁浩)의 동생인 홍의호(洪義浩)가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1폭 상단부분]

 

‘선조(先朝, 정조)께서 을사년(乙巳年, 1785년) 겨울 중희당에 친림하여 대정(大政)을 하실 때, 돌아가신 맏형[先伯]이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임금을 모셔 이 갱시병풍[賡詩之屛]을 하사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전까지의 친정도 계첩(契帖)이나 계병(契屛)들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관리들이 도목정사에 참여했던 것을 기념하여 스스로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었다. 하지만 이 병풍은 왕이 제작을 명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그 가치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홍인호 집안에서는 이 병풍을 가보처럼 간직했을 것이고, 홍인호의 동생 홍의호는 혹시라도 세월이 흘러 이 병풍이 왕이 내려준 하사품이라는 사실이 묻혀 버릴까봐 병풍 한 구석에다 이런 글을 남긴 듯싶다.

 

병풍의 2폭부터 7폭까지는 5폭의 중희당 도목정사 장면을 중심으로 주변의 전각들이 그려졌다. 이는 이전의 친정계병이 한 두 폭에 간략히 행사장면을 그리고 나머지를 산수화나 감상용 회화로 채웠던 것과 비교할 때 내용과 규모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중 도목정사 장면]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5폭, 도목정사 장면]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에는 더 넓은 공간 확보를 위하여 중희당 앞 월대 위에 마루를 잇대어 깐 보계(補階)를 설치하였다. 중희당 앞 보계와 전정(殿庭)에 늘어선 시위 군사를 제외하더라도 참석인원의 수가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5폭 부분]

 

중희당 내부 제일 깊숙이는 오봉병을 갖춘 어좌가 자리하고 있다. 간단히 의자만 그려 넣어 어좌를 상징했던「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에 비하면 제대로 격식을 갖춰 그렸다. 어좌 가까이 좌우에 엎드려 있는 3명은 내관(內官)들이고 그 앞에 좌우에 둘씩 4명은 사관(史官)들이다. 2개의 붉은색 탁자를 가운데 두고 엎드린 양쪽의 9명은 규장각의 제학과 승정원의 승지들이다. 다음으로는 이조와 병조의 당상관들이다. 오른쪽에 이조의 판서, 참판, 참의 3명, 왼쪽에 병조의 판서, 참판, 참의, 참지 4명이 자리하였다. 그들 가운데 양쪽을 마주하여 엎드려있는 2인은 판서가 인사후보자 명단을 적은 망장(望狀)을 읽으면 이를 왕에게 올릴 수 있도록 받아 적는 낭관(郎官)으로 추정된다. 중희당 건물 밖에 임시로 설치한 보계의 좌우 인물들은 이조와 병조의 전랑들이다.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重熙堂 親臨大政時 賡韻詩屛)> 8폭, 좌목(座目)]

 

8폭은 친림도정에 참석한 대신들의 명단인 좌목이다. 이 좌목이 이전의 친정도 좌목과 다른 점은 인사의 책임부서인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에 앞서 규장각과 승정원 관리들을 먼저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는 「무신친정계첩」의 좌목과 비교해보면 커다란 차이다.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중 좌목]

 

이비(吏批)와 병비(兵批)는 각기 이조와 병조에서 인사임명에 대한 왕의 재가(裁可)를 받는 자리에 참석한 관리들을 뜻한다. 각기 이조와 병조의 낭관까지 기록한 뒤에야 승정원 관리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반면에 <중희당 친림대정시 갱운시병>에서는 규장각 각신(閣臣)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그 뒤로 승정원에 이어 이조와 병조의 관리 순으로 적었다. 이런 차이는 정조의 규장각에 대한 신임과 함께 이조와 병조에 부여되었던 통청권과 자대권의 변화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복잡하고 장황한 내막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 및 인용 : 정조의 중희당 친림도정의 의미와 <乙巳親政契屛>(유재빈, 2017, 한국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