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51 - 서병

從心所欲 2021. 12. 8. 08:38

조선시대의 사랑방(舍廊房)은 남자 주인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안방은 여성의 공간으로 부인에게 내주고, 남자는 바깥채인 사랑방에서 글을 읽으며 학문을 하고 자기 수양을 했다. 사랑방은 또한 손님을 맞는 접객 공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랑방은 주인의 안목과 품격을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검소함을 덕목으로 여기던 옛 선비들은 자신의 사랑방을 간소하면서도 단아하되 나름의 격조를 갖추려했다.

 

[사랑방, 국립전주박물관 사진]

 

[사랑방, 국립중앙박물관 사진]

 

주인의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그림을 걸기도 했겠지만, 글씨를 걸기도 했을 것이고 병풍이 보편화되면서는 글씨로 만든 병풍을 펴놓기도 했을 것이다. 병풍차가 글씨로만 된 병풍을 서병(書屛)이라고 한다. 서병(書屛)은 보통 종이에 먹으로 글씨를 써서 병풍을 꾸미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서병오필 서예 10폭병풍(徐丙五筆 書藝 十幅屛風)>, 병풍 전체크기 183.8 x 438.6cm, 국립중앙박물관]

 

서병오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했던 화가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과 만나면서 서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위 서병은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쓰여졌는데, 서병에는 글자체에 변화가 많은 행서(行書)나 초서(草書)가 주로 쓰였다.

 

[이하응 <여진시랑서서병(與陳侍郞書書屛)>, 10폭 병풍 中 1 ~ 5폭 각폭 크기 183.8 x 39.3cm, 국립고궁박물관]

 

[이하응 <여진시랑서서병(與陳侍郞書書屛)>, 10폭 병풍 中 6 ~ 10폭 각폭 크기 183.8 x 39.3cm, 국립고궁박물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이 주희(朱熹)가 지은 <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를 행서로 쓴 병풍이다. <여진랑서>는 주희가 시랑 직책에 있는 진(陳)씨 성을 가진 조정 대신에게 보냈던 서찰로, 주희가 당시의 국정운영에 대해 갖고 있던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하응은 그 가운데 강화(講和)에 대한 부분을 발췌하였다.

 

[이우초서병풍(李瑀草書屛風), 10폭 병풍, 각폭 138.2 x 34.9cm,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이우초서병풍> 中 1폭 병풍차]

 

이우(李瑀)는 율곡 이이(李珥)의 아우이다, 이우의 장인은 당대의 초서 명필이었던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이다. 이 초서 글씨는 그가 10대 중반이던 1556년에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것이다. 원래 17면의 서첩(書帖)이었던 것을 병풍 9폭에다 개장(改粧)한 것이며 제10폭에는 김순동(金舜東)이라는 안동 사람이 1965년에 쓴 발문이 있다. 이 병풍은 이우의 호를 따라 옥산서병(玉山書屛)으로도 불린다.

 

아래 <무일편(無逸篇)서병(書屛)>은 궁중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다른 서병들과는 달리 종이 대신에 비단을 사용하였고 바탕도 붉은 색이다.

 

[<무일편(無逸篇)서병(書屛)>, 10폭 병풍, 각 폭 195.0 x 53.4cm, 국립고궁박물관 ㅣ행서]

 

[<무일편(無逸篇)서병(書屛)> 中 1 - 3 폭]

 

「무일편(無逸篇)」은 ≪서경(書經)≫ 편명의 하나로 군주가 백성들의 일상인 농상(農桑)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안일(安逸)함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글이다. 이 글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周公)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주나라의 2대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성왕(成王)을 위하여 지었다는 것이다. 「무일편(無逸篇)」은 ≪시경(詩經)≫의 「7월편」과 함께 국왕이 반드시 알고 실천해야할 기본 도리로 간주되던 글이다. 그래서 임금이 즉위할 때나 탄일에 족자나 병풍으로 제작되어 임금이 항상 가까이 두고 새기도록 선물로 바쳐졌다. 「무일편(無逸篇)」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서병으로 가장 많이 제작된 내용이라 한다.

 

[<소학제사(小學題辞) ‧ 경재잠(敬斉箴)서병(書屛)>, 4폭, 168.9 x 217.8cm, 국립고궁박물관 ㅣ 행서]

 

「소학(小學)」은 주자의 제자가 주자의 지시에 따라 어린 아동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제사(題辞)는 「소학(小學)」의 첫 부분으로, 「소학(小學)」을 짓게 된 연유와 어린아이가 가장 기본적으로 힘써야 할 원칙 등을 제시한 부분이다.

<경재잠(敬斉箴)>은 주자(朱子)가 경(敬)의 성격과 공부에 대한 방법론을 사언시로 지은 것으로, 많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자신을 수행하는 방편으로 삼았다고 알려진 글이다.

병풍의 1폭부터 3폭까지는 <소학제사> 내용이고 4폭은 <경재잠>이다. 불발기 창(窓)이 있는 4폭의 왼쪽으로 아래의 <경재잠(敬斉箴) ‧ 소학제사(小學題辞) 서병(書屛)>이 이어져, 함께 한 세트가 되어 8폭 크기의 창호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재잠(敬斉箴) ‧ 소학제사(小學題辞) 서병(書屛)>, 4폭, 166.0 x 217.6cm, 국립고궁박물관 ㅣ 행서]

 

병풍 1폭의 내용은 <경재잠>이고 2 ~ 4폭은 <소학제사>이다. 그런데 병풍 1폭에 쓰인 <경재잠> 구절은 앞의 병풍 4폭 구절보다 앞에 나오는 것이다. <소학제사>를 적은 다른 폭들에도 순서가 잘못 배치된 것이 있어, 이 병풍들을 개장했다가 다시 장황하면서 순서 배치에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소학제사>를 적은 시작부분이나 끝나는 부분 구절의 문맥이 끊어진 상태라 이 두 병풍의 좌우로 또 다른 병풍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글씨는 종이에 쓰였지만 상하로는 푸른색 견직(絹織)을 사용하여 장황하였다.

 

[<서병(書屛)>, 10폭 병풍, 종이, 각 폭 162 x 37cm, 국립민속박물관 ㅣ 전서]

 

가훈(家訓)을 전서(篆書)체로 쓴 이 병풍은 장식적 요소를 많이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