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52 -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병

從心所欲 2021. 12. 14. 16:30

영조는 조선의 왕으로는 유례가 없을 나이인 83세까지 장수한 왕이다. 재위기간도 무려 52년이나 되어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80넘은 노인이 돌아가신 집에 조문을 가서 ‘호상(好喪)’이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 했다가 상주와 싸움이 일어났다는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60을 넘기는 사람도 드문 시절이었다. 그래선지 40만 넘어서도 자신의 호에 늙은이 ‘옹(翁)’자를 스스럼없이 붙여가며 나이든 행세를 했다.

 

‘노(老)’자는 늙은이를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한자이지만, 예전에는 이 ‘노(老)’자에 조금 더 깊은 뜻이 있었던 듯도 하다.

조선 시대에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나이 많은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기로소(耆老所)가 있었다. 태종이 즉위하던 해인 1400년에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는 이름으로 제도화하였고 세종 때에 기로소(耆老所)로 명칭이 바뀌었다. ‘기(耆)’와 ‘노(老)’는 모두 ‘늙은이’라는 훈(訓)을 갖지만 기(耆)는 나이 70을, 노(老)는 80을 뜻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실제 일상에서 그런 기준이 적용되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노(老)’는 훨씬 나이든 개념이라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기로소에는 원칙적으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과 현직의 문관(文官)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왕은 예외였다. 숙종은 59세에,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대부분 단명했던 왕들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재위했던 기간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기로소에 들어가고도 32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다.

 

왕이 기로소에 속한 신하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를 기로연(耆老宴)이라 한다. 조선에서의 기로연은 기로소가 생기기 전인 1394년,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환갑이 되던 해에 연로한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 처음이다. 이후 기로연은 양(陽)의 숫자가 겹치는 3월 3일 상사일(上巳日)이나 9월 9일 중구일(重九日)에 열렸다. 성종 때까지도 정례적으로 행해지던 기로연은 그 후 왕위의 혼란과 왜란과 호란이 겹치면서 불규칙하게 시행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재개되었다. 영조는 자신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1744년(영조 20년) 10월에 숭정전(崇政殿)에서 진연(進宴)을 열었고, 모두 15차례나 궁중 밖의 기로소를 방문하여 어첩을 모신 영수각(靈壽閣)에 전배(展拜)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은 영조가 72세가 된 1765년 을유년(乙酉年)에 당시의 왕세손이었던 정조를 대동하고 기로소(耆老所)를 방문한 일과 같은 해 10월 경희궁(慶喜宮) 경현당(景賢堂)에서 열린 수작례(受爵禮)를 그린 8폭 병풍이다.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8폭 지본채색, 병풍 전체크기 187.3 x 452cm, 국립민속박물관]

 

1폭에는 영조가 왕세손을 대동하여 기로소(耆老所)를 방문하였을 때의 동정에 대하여 기록한 서문이 있다. 서문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정보(李鼎輔)가 썼는데, 내용에는 태조 이성계와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내용도 함께 적었다.

또한 마지막 폭인 8폭에는 기로소에서 영조를 접견한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 이철보(李喆輔) 등 기로신 8인의 좌목(座目)이 적혀 있다.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1폭, 국립민속박물관]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8폭, 국립민속박물관]

 

2, 3, 4폭에는 을유년(영조 41, 1765년) 8월 18일 영조가 기로소(耆老所)를 방문하여 기로소 내의 영수각(靈壽閣)에서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기영관(耆英館)에서 잔치를 베풀어 기로신들에게 선온(宣醞)한 행사가 그려져 있다.

▶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궁중에서 빚은 술을 하사하는 것.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2폭, 국립민속박물관]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3폭, 국립민속박물관]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4폭, 국립민속박물관]

 

5폭부터 7폭까지는 10월 11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해진 수작례(受爵禮) 장면을 그린 것이다. 수작(受爵)은 잔을 받는다는 의미로 수작례는 신하들이 헌수(獻壽)하는 술잔을 영조가 받는 의식이다.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5폭, 국립민속박물관]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6폭, 국립민속박물관]

 

[<영조 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 乙酉耆老宴‧受爵宴圖) 병풍> 中 7폭, 국립민속박물관]

 

전해인 1764년은 영조의 재위 40년이 되는 해이자 영조가 71세인 망팔(望八)이 된 해였다. 그러나 영조는 이에 대한 별다른 행사를 갖지 않았다. 이에 왕세손과 여러 대신들이 여러 차례 잔치를 갖기를 간곡하게 청한 결과 이듬해인 1765년에 수작례를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행사를 하나의 병풍에 그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한다.

 

 

참조 및 인용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국립민속박물관),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