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43 - 오륜행실도 1

從心所欲 2021. 11. 3. 10:42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비전(vision)은 성리학적 이상세계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는 전제하에 유교적인 교화 정치의 이론적 근거를 찾는 학문인 동시에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밝혀내려는 철학적 학문이기도 하다. 비록 정도전은 그 꿈을 직접 이루지 못했지만 성리학은 이후 조선을 다스리는 중심 사상이자 사회를 움직이는 규례가 되었다.

아울러 삼강오륜(三綱五倫)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실천적 도덕 윤리가 되어야 했다.

 

그런 조선에서 세종 때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세종은 풍속을 교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에 대한 서적을 발행하여 백성들이 항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하의 충성, 자식의 효도, 지어미의 절개에서 사표가 될 만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례들을 가려 뽑아 만든 책이 조선 최초의 도덕 윤리 교과서라 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이다. 책은 발행 취지에 맞추어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림이 곁들여졌다.

 

1434년에 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처음 발간된 이래, 나라에서는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1514),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1518),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5)로 행실도를 계속 편찬해 내었다.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는 오륜(五倫)에서 빠진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에 대한 내용을 따로 다룬 것이다. 그리고 정조 때인 1797년에는 삼강과 이륜을 묶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가 발행되었다. 책은 각 사례마다 그림이 먼저 나오고 한문과 한글 순으로 설명되어 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31.7 x 18.9cm, 국립중앙박물관 ㅣ 글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간행하기 위하여 주조한 활자인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였고 그림은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을 판화로 만들어 찍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31.7 x 18.9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은 중앙에서 제작하여 지방에 나누어 주면 지방에서는 이 원본의 책을 뜯어 한 장씩 목판에 뒤집어 붙여서 다시 목판으로 새겨 제작 배포하는 방법으로 민간에 보급하였다. 조선시대 내내 발행한 이런 행실도를 통하여 효행 및 열녀 고사가 널리 알려지면서 민간에서도 행실도의 행적을 따라 행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병풍제작이 활발해짐에 따라 오륜행실도는 민간에서 병풍으로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병풍이라는 기구의 제한성 때문에 오륜행실도 병풍은 제작자의 의도와 취향에 따른 차이가 있어 병풍마다 소재와 형식이 매우 다양하다.

 

[행실도 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中 <민손단의(閔損單衣)>, 지본채색, 각 폭 87.6 x 39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행실도 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은 다섯 개의 효자도(孝子圖)와 다섯 개의 형제도(兄弟圖)가 그려진 열 폭 병풍이다. 이 병풍은 발견 당시 표구가 된 상태가 아니어서 원래의 배열 순서를 알 수 없으나 현재는 효자도와 형제도로 나누어 병풍으로 표구되어 있다. 그림은 화풍으로 보아 직업 화가가 아닌 민간 화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화면 윗부분에는 소개하는 고사의 제목을 적고, 한문과 한글로 고사의 내용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런데 글씨는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판각하여 찍은 것으로 보인다.

 

<민손단의(閔損單衣)>는 ‘민손이 홑옷을 입다’라는 뜻이다.

민손은 공자의 제자로 노(魯)나라 사람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아비가 계모를 들였는데, 계모가 자신이 데리고 들어온 두 아들만을 사랑하여 겨울에 그들에게는 솜옷을 주고 민손에게는 갈꽃을 넣은 옷을 주었다. 겨울에 민손이 말을 몰고 가다 추워서 말고삐를 놓쳐버리자, 그 아비가 그 사실을 알고 계모를 쫓아내려 했다. 그러자 민손이 꿇어 엎드려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있으면 한 아들만 춥지만, 어머니가 가게 되면 세 아들이 추울 것입니다.”

이에 그 아비가 그의 말을 선하게 여겨 계모를 쫓아내지 않으니, 계모도 뉘우치고 민손을 어여삐 여겼다는 고사다.

 

[행실도 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中 <자로부미(子路負米)>, 지본채색, 각 폭 87.6 x 39cm,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에 대한 고사이다.

자로가 가난하여 명아주와 팥잎만 가지고 끼니를 해결하던 때에, 한 날은 그 부모를 위하여 백 리 밖에 가서 쌀을 구하여 지고 왔다. 그 후 부모를 여읜 뒤에 위(衞)나라에서 벼슬을 하게 되면서 딸린 수레가 일백이 되고, 곡식 십만 석을 쌓으며, 요를 겹쳐 깔고 높이 앉으며, 음식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을 때에 자로는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명아주와 팥잎을 먹고 어버이 위하여 쌀 지려 하여도 못하리로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자로야말로 살아서는 힘껏 효도하고 죽어서는 못내 그리워한다고 할만하다.” 하였다는 내용이다.

 

[행실도 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中 <강굉동피(姜肱同被)>, 지본채색, 각 폭 87.6 x 39cm, 국립중앙박물관]

 

<강굉동피(姜肱同被)> : 강굉이 한 이불을 덮다.

한(漢)나라의 강굉(姜肱)은 대대로 내려오는 이름난 집안의 사람으로, 두 아우 중해(仲海)와 계강(季江)과 함께 모두 효도하며 어질다는 소문이 났다. 형제들은 우애가 좋아 늘 한 이불을 덮고 자기까지 하였다. 각기 장가를 들어서도 형제는 변치 않고 한 방에서 잠을 잤는데, 자식 낳을 것을 생각해서 서로 번갈아 가며 자기 방으로 가고는 했다.

어느 날 강굉이 아우 계강과 들에 나갔다가 도적을 만났는데 도적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형제는 서로 자기가 죽겠다고 다투었다. 이를 본 도적은 칼을 거두어 넣고는, “두 분은 어진 사람들인데 우리가 불량해서 죄를 범하게 되었소.”라고 하면서 형제를 풀어 주고 갔다.

 

[행실도 십곡병풍(行實圖十曲屛風) 中 <목융자과(繆肜自撾)>, 지본채색, 각 폭 87.6 x 39cm, 국립중앙박물관]

 

<목융자과(繆肜自撾)> : 목융이 스스로 매를 때리다.

한(漢)나라의 목용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 네 사람이 한 집에 살았다. 그런데 동생들이 각기 결혼하자 동생의 부인들이 모두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를 원하면서 자주 말다툼이 생겼다. 목용은 이를 탄식하여 문을 닫고 자기 스스로를 매질하며 자신에게 이르기를, “목용아, 네가 몸을 닦아 성인의 일을 배우려 하는 것은 장차 풍속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네 집 하나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였다. 이를 아우들과 그 부인들이 듣고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다시 화목하게 되었다.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속예술사전(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역주 이륜행실도(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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