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병풍

병풍 40 - 난정수계도

從心所欲 2021. 10. 22. 12:14

353년 3월 3일,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동진(東晋)의 우군장군(右軍將軍)이자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가 자신의 관할지역인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서 시회(詩會)를 가졌다. 난정(蘭亭)은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의 성(城)에서 서남쪽으로 27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는데, 주변은 산이 높고 험하며 수풀이 무성했지만 죽림이 있고 맑은 냇물이 있는 곳이었다.

 

왕희지를 비롯하여 왕희지의 네 아들을 포함한 42인이 이곳에 모여 물가에 가서 몸을 씻어 상서롭지 못한 것을 씻어내는 불계(祓禊) 의식을 가진 뒤,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다. 26명의 문사가 37수의 시를 지었고, 이 시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난정집(蘭亭集)」이다. 왕희지는 이 「난정집」의 머리말인 서(序)를 스스로 짓고 썼다.

왕희지가 행서(行書)로 쓴 324자(字)의 이 서문은 이후 ‘천하제일의 행서’라는 칭송을 듣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서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회자되는 중국 서예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왕희지가 직접 썼다는 <난정집서(蘭亭集序)>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는 왕희지의 서법을 좋아하고 숭상하기까지 하였다는 당태종(唐太宗)이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죽을 때 같이 묻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난정집서(蘭亭集序)>는 모두 후세 서예가들이 임모한 모사품들이다.

 

[<난정집서(蘭亭集序)> 당(唐)의 서예가 우세남(虞世南) 모본, 24.8 x 57.7cm ㅣ 명나라 때까지는 또 다른 당나라 서예가인 저수량의 필적으로 전해져오다가 동기창이 우세남의 것으로 추정한 이후 우세남의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난정집서(蘭亭集序)>는 난정기(蘭亭記), 계서(禊序), 난정서(蘭亭序)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난정집서>는 서체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명문장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난정집서(蘭亭集序)>

영화(永和) 9년(353년) 계축년 늦은 봄 초순에 회계(會稽)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 모이니 계(禊)를 닦는 일이었다. 많은 현재(賢才)들이 모이고 젊은이와 나이 많은 이가 모두 모였다[少長咸集].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한 산줄기,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으며, 또 맑은 물과 급한 여울이 있어 좌우를 띠처럼 비추면서 둘러싸고 있다. 물길을 끌어다 술잔을 띄워 보낼[流觴] 굽은 물줄기[曲水]를 만들고 차례대로 둘러앉으니, 비록 관악기나 현악기의 성대함은 없어도 한 잔 술에 시 한 수 읊는 것이 그윽한 감정을 활짝 펴기에 족하였다.
▶영화(永和) 9년 : 353년. 영화(永和)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에 동진(東晋)의 5대 황제인 목제(穆帝)가 사용하던 연호(345년 ~ 356년)

이날 하늘은 맑게 개이고 공기도 맑으며 봄바람은 온화하였다. 우주의 무한함을 우러르고 만물의 무성함을 굽어 살피며, 눈길 가는 대로 보면서 감회를 풀고 보고 듣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니 참으로 즐거울 만하였다.
무릇 사람이 서로 어울려 세상을 살아감에 혹은 회포에 취하여 한 방 안에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맡겨진 처지에 따라 육체 밖에서 방랑하기도 한다. 비록 취향이 만 가지로 다르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같지 않으나 그 만남에 기뻐하여 잠시 스스로 흔연히 자족하여 나이 들어가는 것조차 모르다가 하는 일이 지루하게 되면 감정도 변화에 따라 옮겨져 슬픈 마음이 들게 된다. 아까의 기뻐하던 일이 잠깐 사이에 이미 낡은 자취가 되어버리니, 오히려 이 때문에 감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은 자연의 조화에 따라 끝내는 다하고 만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 역시 중대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매번 옛 사람들이 감회를 일으켰던 이유를 보면 마치 한 개의 부절을 맞춘 듯하니, 일찍이 글을 대하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마음속에서는 깨우쳐지지가 않았다.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을 하나라고 한 것은 허황되고 거짓된 것이며, 팽조(彭祖)와 일찍 죽은 자[殤]를 같다 한 것은 망령되이 꾸민 것임을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보는 것도 또한 지금 사람들이 옛 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리니, 슬프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차례로 쓰고, 그들이 지은 글을 기록한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상황이 변하여도 감회를 일으키는 이치는 같다. 후세에 읽어보는 사람들 역시 이 글에 감회가 있을 것이다.
▶팽조(彭祖) : 중국의 신화 왕조인 하(夏)왕조 때의 인물로 은(殷)왕조까지 800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

 

난정수계는 중국 문사(文士)들의 고상한 모임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여졌고,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신라시대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연회를 벌린 장소로 유명한 경주 포석정(鮑石亭)이나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바위 위의 유배거(流杯渠)도 난정수계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 문사들의 아회(雅會) 중에는 난정수계의 고사를 표방하는 모임도 있었지만,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계축년의 모임이 지속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1회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난정수계가 열렸던 계축년(癸丑年)과 삼짇날인 3월의 첫 뱀[巳]일인 상사일(上巳日)은 문인들의 시회(詩會)에서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로 대표되는 18세기 이후의 여항 문인들의 시사(詩社) 역시 난정수계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가 있든 없든 가까운 사람들과 맑은 시냇물이 있는 자연을 함께 즐긴다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그러한 동경은 그림으로도 전해졌다.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우로부터 첫 부분, 지본수묵, 권(券) 전체 크기 31.2cm x 300.7cm, 국립민속박물관]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우로부터 둘째 부분, 지본수묵, 권(券) 전체 크기 31.2cm x 300.7cm, 국립민속박물관]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우로부터 셋째 부분, 지본수묵, 권(券) 전체 크기 31.2cm x 300.7cm, 국립민속박물관]

 

[<난정수계도(蘭亭修稧圖)>마지막 부분, 지본수묵, 권(券) 전체 크기 31.2cm x 300.7cm,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는 그림의 크기와 구성으로 미루어 해체한 병풍의 병풍차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 병풍의 우측과 좌측 끝인 1폭, 8폭의 그림이 다른 폭의 그림들보다 작다.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1폭,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2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3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4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5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6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7폭, 지본채색, 122.6 x 60.9cm,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미상 난정수계도(筆者未詳蘭亭修禊圖)> 8폭, 지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러 시회들이 열리면서 중국의 난정수계(蘭亭修禊)를 상상하여 그리던 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시회를 담은 그림들이 등장했다. 유숙(劉淑, 1827 ~ 1873)의 1853년 작으로 알려진 <수계도권(修禊圖卷)>이 대표적이다.

중인 출신의 여항문인들이 난정수계가 있은 지 150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한성 남산에서 시회를 가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유숙 <수계도권(修禊圖卷)>의 그림부분 우로부터 부분1, 도권(圖卷) 전체 크기 30 x 800cm, 국립민속박물관]

 

[유숙 <수계도권(修禊圖卷)>의 그림부분 우로부터 부분2, 도권(圖卷) 전체 크기 30 x 800cm, 국립민속박물관]

 

[유숙 <수계도권(修禊圖卷)>의 그림부분 우로부터 부분2, 도권(圖卷) 전체 크기 30 x 800cm, 국립민속박물관]

 

유숙은 유최진(柳最進)이 중심이 된 벽오사(碧梧社)라는 시사(詩社)의 일원으로 1847년에는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수계도권(修禊圖卷)>은 벽오사(碧梧社)가 아닌 또 다른 시사(詩社)인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시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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