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45 - 엄처사전(嚴處士傳)

從心所欲 2021. 11. 24. 08:35

‘전(傳)’은 한 인물의 일생 행적을 기록하는 한문문체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편술할 때에 백이열전(伯夷列傳)을 비롯한 70여 편의 전(傳)을 남긴 이후에 역대의 사가들이 이를 계승하면서 정사(正史)의 문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傳)은 문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정사(正史)에 수용되지 못한 처사(處士)나 은둔자의 드러나지 않은 덕행이나 본받을 만한 행실을 서술하는 방편으로도 활용되었다. 동시에 ‘전(傳)’에서 다루는 인물의 성격과 문장의 형태도 매우 다양해졌다.

 

허균은 홍길동전 외에도 자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5편의 전을 남겼다. 이 글들은 홍길동전과는 달리 모두 한문으로 쓰인 것으로 허균이 40여세 즈음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처사전(嚴處士傳)」은 불우한 한 선비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다른 4편의 ‘전(傳)’들이 기인(奇人)이나 협사(俠士)의 이야기를 다룬 것과는 달리 평범하지만 불우한 선비를 다뤘다.「엄처사전」은 불우한 한 선비의 일생을 통하여 특별한 재능이 있으면서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아쉬움을 서술한 전형적인 ‘전’ 양식의 작품이다. 한문으로 500자 정도로 매우 짧은 글이다.

 

엄 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그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을 다하여 새벽이나 저녁에는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즐겨하자, 그물을 짜고 간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기필코 잡아다가 대접하였다.

그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타이르자,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시부(詩賦)를 아주 아건(雅健)하게 지어 내서 여러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유독 《주역(周易)》과 《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어 이치에 높고 멀리 나아가, 저술한 글들이 하도 낙서(河圖洛書)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자기를 데려가고 어머니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했지만, 회생하지 못하자 여러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3년간 여묘(廬墓) 살이에도 죽만 마셨다.
▶하도 낙서(河圖洛書) :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길이 8척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으로《주역》의 8괘에 원용되었고, 낙서는 하우씨(夏禹氏)의 9년 치수(治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글로서《서경(書經)》중의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원용되었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처사(處士)는 울면서,
“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과거보려 하였다. 이제 왜 과거를 보아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는 누릴 수 없게 하랴.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하면서 목메인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남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만년(晩年)에 우계현(羽溪縣 강릉의 속현)으로 이사와 살며 산수(山水)가 유절(幽絶)한 곳을 택하여 띠집[茆舍]을 짓고,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편안하게 살았다.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툭 트여 남들과 거슬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으나 고을에서의 잘잘못을 평하거나,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어야 할 것들에 있어서는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가 없었고, 일체를 의(義)로만 재단하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반드시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화려한 명리(名利) 따위야 완전히 벗어난 듯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사서(史書)를 읽으며 성패(成敗)ㆍ치란(治亂)ㆍ군자(君子)ㆍ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히 판단하고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무목(武穆)이나 문산(文山)이 죽어간 대목에 있어서는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무목(武穆)이나 문산(文山) : 무목은 송나라 악비(岳飛)의 시호로 악비는 39세 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 문산은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의 호이다. 문천상은 원(元)나라가 침입할 때 잡혀가서 3년을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다가 피살된 송나라의 이름난 충신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여 운치가 있었고, 시도 역시 장려(壯麗)하게 지어 냈다. 그래서 전해지고 외어지던 것들이 1백여 편이었는데, 모두 시작(詩作)의 규범에 합치되었으나 처사 자신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조정(朝廷)에서도 듣고, 가상히 여겨 두 번이나 재랑(齋郞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말았다.
향년(享年) 78세였다. 생을 마치려던 무렵에 오래 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학자 10여 명을 초대하였다.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고는 이어서 자기 죽은 뒤의 일을 말했으니, 반드시 선산(先山)에다 장사지내 주고 그의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아끼던 도서(圖書)들을 문인(門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서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유문(遺文)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모아놓지를 못했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분명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그의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선비들이 묻혀 사는 암혈(巖穴)에는 이분처럼 이름이 인몰(湮沒)하여 전해지지 않는 선비들로는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어서, 더욱 슬퍼진다.

 

끝부분에 나오는 ‘외사씨(外史氏)’는 허균 자신을 가리킨다. 외사씨(外史氏)를 빌려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은 ‘전(傳)’체의 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전통적 방법이다.

 

[《필자미상 고사인물도 화집》中, 견본채색, 39.7 x 29.1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3, 임형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