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47 -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從心所欲 2021. 12. 1. 09:05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은 『성소부부고』에 실려 있는 5편의 전(傳) 가운데 가장 길다. <홍길동전>과 함께 허균소설의 쌍벽을 이룬다는 평을 듣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궁두(南宮斗)는 실재하였던 인물이다. 1666년에 홍만종(洪萬宗)이 우리나라 역대의 특이한 인물들의 사적을 모아놓은「해동이적(海東異蹟)」에 등장하고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언급이 있다.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은 남궁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허균이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자신이 꿈꾸는 도인의 삶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살아있을 때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살았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받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사람됨이 경박하고 인륜도덕을 어지럽히며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힌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에서와 같이 이상을 꿈꾸는 그의 생각들은 성리학에 경도된 당시의 인물들에게는 이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수차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끝내는 역모에 몰려 죽고 조선시대 내내 사면되지 못한 것도 결국은 허균이 그 시대에서 요구하는 보편적 사고에 머물러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두(斗), 대대로 임피(臨陂 : 전북 옥구의 옛 지명)에서 살아 집안도 오래되고 재산도 넉넉하여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에는 과거에 뽑혀 관리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남궁두만은 박사의 제자로서 과거공부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30세에 처음으로 을묘년(乙卯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과장(科場)을 울렸다. 일찍이 대신불약부(大信不約賦)라는 글을 지어 성균관(成均館) 시험에 수석으로 뽑혀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전송(傳誦)하기도 했다.
▶을묘년(乙卯年) : 1555년. 명종10년.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어서 감히 재주만 믿고는 고을에서 호탕한 채 멋대로 지냈었다. 잘난 체하면서 장리(長吏)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지도 않으니 읍내의 상하간이 모두 남궁두를 흘겨보며 앙심을 품었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장리(長吏) : 지방 고을 수령.

처음으로 선생이 서울로 이사하여 진취(進取)할 계획을 세우고는, 첩(妾) 한 사람만 시골집에 남겨 두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가을 수확을 처리하였다.
첩(妾)은 무인(武人)의 딸이었으나 매우 예쁘고 영특하여 글과 계산법을 가르쳐 주면 뛰어나게 빨리 알아차렸다. 그래서 남궁두는 그를 가장 사랑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서울에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독수공방으로 지냈으므로 몰래 남궁두의 성(姓)이 다른 당질(堂姪)과 사통(私通)하고 있었다.

무오년(1558년, 명종13) 가을 남궁두는 급한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30리를 남기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배들만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는 혼자서 말 한 필을 타고 시골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등불이 밝혀 있는 밤이었다. 노복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나 중문(中門)이 활짝 열려 있어 첩이 보이는데,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 당질 놈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 반자[半尺]쯤 닿지 않고 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안아서 맞아들이고 있었다.
남궁두는 분노를 참으며 짐짓 그 마지막까지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馬]을 외문(外門)의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겨 가린 채, 틈 사이로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희희덕거리며 온갖 추잡을 떨다가, 옷을 벗고 함께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남궁두는 당장 그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가서 벽을 더듬으니 걸려 있는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서 쏘아, 먼저 계집의 흉부를 꿰뚫어 즉시 넘어뜨리니 그 사내는 놀라서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또 쏘아 늑골을 적중시켜서 죽게 하였다.

남궁두는 관(官)에 알리고도 싶었으나 가문(家門)을 더럽히는 일이자, 또 고을 원님의 마음을 보장하기도 어려운 일이어서 곧 바로 두 시체를 끌고 가서 벼논의 도랑 속에 매장해 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왔었다.
다음날 날이 밝은 훨씬 뒤에야 집안의 종들은 첩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당질이 도망친 걸로 여기고 당질의 집에 가서 물어보니, 역시 간 곳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농장의 어떤 종놈이 남궁두의 곡식 1백여 석(石)을 훔친 적이 있어 남궁두가 오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 그 자는 남궁두가 두 사람을 죽였지 않을까 의심하고는 그 자취를 찾아대었다. 벼논 도랑의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걸 보고서 삽질하여 파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곧바로 첩의 집에 알리자 늙은 병졸이 현령(縣令)에게 고발하고, 사내 집안에서 숙원(宿怨)이 있었다는 증거를 세웠다. 현령이나 여러 아전들은 본래부터 남궁두를 불쾌하게 여겼기에 모두 기뻐하여 잘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미움으로 당질을 모살(謀殺)했다고 죄안(罪案)을 꾸몄다.

서울에서 두는 형틀에 묶이고, 오독(五毒)을 첨가한 죄인의 수레에 태워 이산(尼山 )에 이르렀다. 남궁두의 아내가 어린 딸을 업고 뒤늦게 도착해서는 간수(看守)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밤에 형틀을 풀어 빠져나가게 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간수가 그가 없음을 알아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를 읍내까지 데려와 딸과 함께 옥중에서 굶겨 죽였다. 임피의 전답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두 피해자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오독(五毒) : 참혹한 형벌을 가하는 다섯 가지의 형구(刑具).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 발목에 채우는 차꼬, 수갑(手匣), 쇠사슬 등을 말한다.
▶이산(尼山) : 충남의 지명.

남궁두는 곧바로 금대산(金臺山)으로 들어가 낙발(落髮)하고 중이 되었으니, 법명(法名)을 총지(摠持)라고 하였다. 계행(戒行)을 무척 엄하게 지키며 1년을 지냈다. 원수로 여기던 집에서 있는 곳을 알아내어 병졸들을 거느리고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꿈을 꾸는데, 산신(山神)이 일러주기를,
“원수진 사람들이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겠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나자 급히 하산(下山)에 버리니 잡으러 오던 사람들이 도착해서는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남궁두는 두류산(頭流山)으로 향하다가 쌍계사(雙溪寺)에서 한 달 정도 기거하였다. 이름 있는 절이라 중들이나 속인들이 모여드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그곳을 버리고 태백산(太白山)으로 향했다. 의령(宜寧)에 있는 야암(野庵)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두류산(頭流山) : 지리산(智異山)

뒤따라 중 한 사람이 도착하였다. 예쁘게 생겼고 나이도 어린데 삿갓을 벗고 당(堂)으로 오르더니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면서,
“그대는 사족(士族)이군요. 왜 뒤늦게 삭발하였습니까?”
하고는 조금 뒤에,
“참을성이 있는 분이군요.”
하더니 잠시 뒤에는,
“유도(儒道)를 업으로 하시면 큰 벼슬 하실 텐데.”
하였다. 얼마쯤 지나서는 껄걸 웃으면서,
“두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고 죄를 지어 도망 온 사람이군요.”
하는데, 말한 네 마디가 모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밤이 되어 그의 침소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해준 말이 사실이라고 승복하여 이어서 무척 간곡하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청했었다. 나이 젊은 중은,
“나는 겨우 관상(觀相)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오. 우리 스승께서는 모든 방술(方術)을 아십니다. 어떤 사람을 관상하고는 어떤 방술을 전해 주시니, 더러는 부주(符呪)로, 더러는 상위(象緯)로, 더러는 감여(堪輿)로, 더러는 추점(推占)을 전해 주시며 그 그릇에 따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상법(相法)을 전수받았으나 아직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남의 스승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부주(符呪) : 부적, 상위(象緯) : 점성술, 감여(堪輿) : 풍수지리, 추점(推占) : 점치는 것. 상법(相法) : 관상 보는 법.

남궁두가 지금 스승이 어디에 계시냐고 묻자 그 중은,
“무주(茂朱)의 치상산(雉裳山)에 계시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하자, 남궁두는 절하고 나왔다. 다음날 날이 밝아 안부를 살피러 가 보았더니 이내 떠나버렸다.
곧바로 방향을 돌려 막대를 짚고, 치상산에 도착하여 온 산을 두루 살폈다. 절이 거의 수십 곳이었으나 모든 절에 유별한 중[異僧]이라고는 없었다.

한 해 동안을 머물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돌이 구르는 층계와 산의 정상(頂上), 나는 새도 이른 적이 없는 곳까지를 찾아다녔다. 세 번 네 번을 돌며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중이 속였다고 여기고 창연(悵然)히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자 숲속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었는데,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흐르고 있었다. 남궁두는 마음 속으로 기뻐서,
“이 계곡 가운데가 선사(仙師)가 계시는 곳이 아닐는지.”
하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물줄기를 따라 몇 리(里) 정도를 걸어 들어가 우뚝 솟은 한 봉우리를 바라보니, 소나무와 삼목(杉木)이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인데 돌로 쌓은 층계로 대(臺)를 만들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옷깃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그 위로 오르니 동자(童子)가 맞이해 주며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
하기에, 남궁두는 읍(揖)하고서,
“총지(摠持)가 선사(仙師)를 찾아 뵈러 왔습니다.”
했더니, 동자가 동편의 왼쪽 합문(閤門)을 열어주었다. 노승(老僧)이 계시는데 모습은 마른 나무 같았으며 해진 가사(袈裟)를 입고 나오면서,
“화상(和尙)의 풍신이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오셨나?”
하였다. 남궁두는 꿇어앉으며,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기예(技藝)가 없습니다. 노사(老師)께서 많은 방술(方術)을 알고 계심을 듣고 세상에서 한 가지의 방술이라도 행하고 싶어서 천리 먼 길에 스승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1년을 지내고야 겨우 찾았습니다. 제자가 되어 배우려 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하였다. 장로(長老)가,
“산야(山野)에서 죽음이 임박해 있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나.”
하자, 남궁두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으나 굳게 거절하며 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남궁두는 처마 아래서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애소(哀訴)하였고 아침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았으나,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같이 여기며 부좌(趺坐)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3일을 보냈다. 남궁두가 갈수록 더 정성을 드리자, 장로는 그때에야 그의 정성을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며 방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방이 한 길[丈]밖에 되지 않았고 목침(木枕) 하나가 놓여 있으며 북쪽 벽을 뚫어 여섯 굽이의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자물쇠로 닫아 놓고 열쇠 하나를 감실 기둥에 걸어 놓았고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책 5~6권이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고 오직 죽지 않는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있겠네.”
했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그거면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였다. 장로(長老)가,
“대저 모든 방술(方術)이란 먼저 정신(精神)을 모은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혼(魂)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神仙)으로 탈바꿈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게 있겠나.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하게나.”
하였다.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4일이 되어도 장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루에 한 차례 흑두말(黑豆末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고도 전혀 배고프고 피로한 기색이 없어, 마음에 별다르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는 온 정성을 다하여 큰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흑두말(黑豆末) : 검은 콩가루

첫날밤에는 앉아서 사경(四更)을 지내자 눈이 저절로 감겼으나 참아내고 새벽까지 보냈으며, 둘째 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아냈다. 셋째와 넷째 날의 밤에도 피로하고 고달파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더러는 머리를 벽에 찧고 부딪히며 겨우 참았다. 일곱째 밤을 지냈더니 툭 트이듯 정신이 밝게 깨쳐 상쾌함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장로(長老)가 기뻐하며,
“그대에게는 정말로 큰 인내력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룰 수 없겠나.”
하고는 이어서 두 가지의 경전(經傳)을 꺼내 주면서,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라는 책이니 수련(修煉)하는 데 가장 좋은 비결(祕訣)이며 선가(仙家)의 가장 높은 교리[上乘]이다. 《황정경(黃庭經)》의 내옥경경(內玉景經)은 기(氣)를 인도하고 오장(五臟)을 단련하는 지요(至要)한 것으로 역시 도가(道家)의 묘체(妙諦)다. 이 두 책을 만 번 정도 읽으면 저절로 오해(悟解)할 수 있으리니, 매일 열 번씩 읽도록 하게나.”
하였다. 또,
“무릇 학문이 비승(飛昇)하는 사람은 염두(念頭)를 단제(斷除)하고 편안히 앉아서 기신(氣神)을 연정(煉精)해야 하며, 삼보(三寶)를 밀폐시켜 용호(龍虎)가 서로 싸우는 틈에서도 도술(道術)은 이루어지니 그런 게 제일의 첩경이네. 자신이 상지(上智)나 숙품(宿稟, 뛰어난 성품)이 아니고서야 빨리 이루어질 수는 없네. 그대의 성품은 박고(朴固)하고 강인(剛忍)하니 높은 교리(敎理)로써 가르쳐주기는 어렵네. 맨 먼저 곡식으로 식사하는 걸 끊어보게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낮은 곳에서 최상까지 도달하는 방법일세.
무릇 사람의 생명이란 오행(五行)에서 정기(精氣)를 받았기 때문에 오장(五臟)은 각각 오행(五行)이 주관하는 거라네. 위장(胃臟)은 토기(土氣)를 받아 사람이 마시거나 먹는 것은 모두 위장으로 들어가네. 비록 곡정(穀精)으로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이 없게 한다 하더라도 기(氣)가 토(土)에 끌려 끝내는 찌꺼기[魄]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니 옛날의 곡식을 먹지 않던 사람들이란 모두 그래서였네. 그대는 먼저 곡식 먹지 않는 것을 시험해 보게나.”
하였다.
그리고는 곧 남궁두로 하여금 7일 동안 하루에 두 끼니만 먹도록 하였다. 또 7일 동안은 한 끼니는 밥, 한 끼니는 죽을 먹도록 하고, 다시 7일 동안은 한 끼니의 죽을 없애고 밥만 한 끼니 먹도록 하였다. 다시 7일 동안은 밥 대신 죽만 한 끼니 먹도록 하고는 28일이 지나자 밥이건 죽이건 먹지 못하게 하고, 열쇠로 윗 감실(龕室)의 자물쇠를 열어 칠(漆)을 입힌 합(盒)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흑두말(黑豆末)이 든 것이고 하나는 황정(黃精, 죽대 뿌리)과 복숭아씨 가루였다. 각각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차례 먹으라 하였다.
남궁두는 본래 식량(食量)이 커서 허기증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고, 몸이 수척해지고 피곤해지며 눈이 흐려져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지만 계속 참아냈다. 흑두말을 21일째 복용했던 날, 갑자기 배 안이 채워진 듯하여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 후에는 곧바로 측백나무 잎과 호마(胡麻, 참깨)를 먹도록 해 주자, 온몸에 촘촘히 부스럼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 또 1백 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고 새 살이 나와 완전히 전대로 되어졌다. 장로(長老)가 기뻐하며,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체질을 타고났네. 다만 욕념(慾念)을 없애면 되겠군.”
하였다. 3년 동안 머무르며 두 가지의 비결(祕訣)을 모두 만 번씩 읽었다. 가슴속이 씻은 듯이 시원해져 신회(神會, 신이 통함)가 있는 듯하였다.
장로(長老)가 호흡 자주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또 운기(運氣)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기(氣)가 이미 움직여졌다. 마침내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로서 육자 비결(六子祕訣)을 행하여 호흡도(呼吸道)를 이루자, 얼굴에 점점 살이 찌고 기운은 갈수록 상쾌해지며 온갖 상념이 모두 사라졌다.

6년을 지내서 장로(長老)가,
“그대에게는 도골(道骨)이 있어 법으로는 마땅히 상승(上昇, 신선이 되어 승천함)할 만하네. 이 수준에서 내려간다 해도 왕자교(王子喬)ㆍ전갱(錢鏗) 정도는 될 것이네. 욕념(慾念)이 비록 동(動)하더라도 오직 그걸 참아야 하네. 무릇 욕념이란 비록 식색(食色)의 욕념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망상(妄想)은 참[眞]에 해로우니 반드시 모든 유(有)를 없애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련해야 하네.”
하였다.
그런 후에 비어 있는 두 번째 집에다 남궁두를 앉히고는, 오르고 내리며 구르고 넘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르쳐 주는 말마다 자상하고 친절하였다. 남궁두는 가르쳐 주는 바에 의거하여 태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감고 내면으로 장로(長老)를 보았다. 그런 때에는 춥고 더움, 주림과 배부름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윗잇몸에서 조그마한 오얏 같은 물건이 단물을 혀 위로 흐르게 하는 것을 깨닫고 장로(長老)에게 알리자, 장로는 천천히 빨아 뱃속으로 삼키라 하고는 기뻐하며,
“서주기(黍柱基)가 세워졌으니 화후(火候)를 움직일 수 있네.”
하면서 곧바로 벽에 삼재경(三才鏡,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비추는 거울)을 걸고 좌우에 칠성검(七星劍) 두 개를 꽂아 절름발이 걸음을 걸으며 주문(呪文)을 외어 마귀를 물리치고 도(道)를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었다.
단련한 지 거의 6개월 만에 단전(丹田)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 남궁두는 도(道)가 이루어짐을 기뻐하다 급히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남을 억제할 수 없더니 타녀(姹女, 신단(神丹)의 물)에 불이 붙어 이환(泥丸)이 타오르자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장로(長老)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치면서,
“슬프다,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는구려.”
하고는 급히 남궁두를 편안히 앉게 하여 기(氣)를 내리게 하였다.
기는 비록 수그러졌으나 마음이 두근거려 온종일 안정되지 않았다. 장로가 탄식하면서,
“세상에서 드문 사람을 만났기에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업(業)의 가로막음을 제거하지 못하여 끝내 엎질러지고 말았으니 그대의 운명(運命)이지, 내 힘으로 어떻게 하겠나.”
하고는 이어서 소다(蘇茶, 회복시키는 차)를 마시게 하였다. 7일 만에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에 뜨거움이 오르지 않았다. 장로(長老)가,
“그대는 비록 신태(神胎)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역시 지상(地上)의 신선(神仙)은 될 수 있을 것이며, 조금만 더 수양한다면 8백세의 수(壽)를 누릴 수 있을 거네. 그대의 운명(運命)에는 당연히 아들을 두도록 되어 있으나 정자(精子)가 나오는 길이 이미 막혔으니 복약(服藥)하여 트이도록 하게나.”
하면서 붉은 오동 열매와 같은 환약(丸藥) 두 알을 꺼내 주어 그걸 삼켰다.
남궁두가 청(請)하기를,
“우둔한 사람이 가르침대로 하지 못했음은 나 자신의 운명이 기박함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제자(弟子)가 스승님을 모신 지가 이제 7년입니다만 아직도 스승님의 출처(出處)도 모르고 있습니다. 제발 자세하게 가르쳐 주셔서 뒷날에라도 사모하는 정성이 위안 받을 수 있게 해주심이 어떨까요?”
했다. 장로(長老)가 웃으면서,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대는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자세히 말해 주겠네.

나는 상락(上洛, 상주(尙州)의 옛 이름)의 큰 성씨(姓氏)의 후손으로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증손자였네. 송(宋) 나라 희령(熙寧, 신종(神宗)의 연호) 2년(1069년, 고려 문종23)에 태어났네. 열네 살에 나병[風癩]에 걸려 부모가 거두어 주지를 않고 숲속에 버렸네. 밤에 호랑이가 안아다가 석실(石室)에 놓아 주고는 눈에 불을 켜고 두 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며 그 곁에 있는 나를 끝내 해치려 하지 않더군. 통증이 한창 극도에 달하여 호랑이의 어금니에 물려 속히 죽지 못하는 것만이 한스럽더군.
초라(草羅)라는 풀이 벼랑의 구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잎이 넓고 뿌리가 크더군. 시험 삼아 씻어서 먹었더니 뱃속이 조금 채워졌네. 그걸 먹으며 몇 개월이 지나자 부스럼이 줄어지고 점점 혼자서 일어섰었네. 그리하여 많이 캐다가 끼니마다 그걸 먹었었네. 산 중턱의 것을 거의 전부를 캐 먹으며 몇 백일을 지내자 부스럼이 다 벗겨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에 기뻐하며 실컷 먹었더니 또 1백일이 지나자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 산의 정상에 올라가지더군. 이미 나병은 나았으나 옛날의 마을을 판별하지 못하여 길에 나와서도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네.
뜻밖에 중 한 사람이 산봉우리 아래로 지나가고 있어 그곳으로 찾아가 길을 막으며 묻기를 ‘이곳은 어떤 산입니까?’ 했더니 중이 ‘이건 태백산(太白山)이요, 지역은 진주부(眞珠府)의 소속입니다.’ 하더군. 그래서 근방에 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은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으나 길이 단절되어 쉽게 올라갈 수 없을 것이오.’ 하였네. 나는 곧 날아서 그 암자에 이르렀더니 선방(禪房)은 낮에도 문이 닫히고 사람이라곤 없더군. 손으로 곁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운데에 있는 집으로 가보았더니, 늙고 병든 중 한 사람이 굵은 베옷을 두르고 탁자에 기대어 숨차하며 거의 죽어가는 모습이었네. 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간밤의 꿈에 노인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 비결서(祕訣書)를 전할 사람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진정 그 사람이군.’ 하면서,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 한 뭉치의 책을 꺼내서 주었네.
그리고는 ‘이걸 만 번 읽으면 그 의미를 저절로 알 것이니 노력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게나.’ 하였네.
내가 그건 누가 전해준 것이냐고 물었더니 ‘신라(新羅) 의상대사(義湘大師)께서 중국에 들어가 정양진인(正陽眞人)을 만났더니 이 책을 주셨고 임종(臨終)에 나에게 부탁하시며 2백 년 뒤에는 반드시 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대가 그분의 예언에 합치되는 사람이니 받아가지고 힘쓰게나, 나는 전해줄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으려네.’ 하면서 부좌(趺坐)하고 조용히 입적(入寂)하였었네. 나는 곧바로 그분을 다비(茶毗)하여 감색(紺色)의 사리(舍利) 1백 알맹이를 얻어 내어 탑(塔) 속에 매장하였네.
책 뭉치를 풀고 살펴보니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 및 《금벽용호경(金碧龍虎經)》, 《참동계(參同契)》, 《황정내외경(黃庭內外經)》, 《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 《태식심인(胎息心印》, 《통고정관(洞古定觀)》, 《대통청정(大通淸淨)》등의 경전(經傳)이었네.
그 암자에 들어가 독거(獨居)하면서 수련(修煉)을 하였네. 마귀(魔鬼)들이 만방에서 와서 둘러쌌으나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니 사라져 갔네. 온갖 애를 쓰며 11년 만에야 신태(神胎)를 이루었네. 법으로는 당연히 해탈해서 떠났겠지만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머물러서 동국(東國) 삼도(三道)의 모든 신(神)을 거느리라고 명령하셨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 지 5백여 년이었네. 기한이 차면 당연히 상승(上昇)할 걸세. 내가 수십 명을 만나 보았지만 더러는 기(氣)가 지나치게 예민(銳敏)하고, 더러는 너무 둔하기도 하고, 더러는 인내력이 적거나, 더러는 인연이 옅고, 더러는 욕념(慾念)이 많아 모두 성공할 수가 없었네. 만약 성도(成道)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내 임무를 맡기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갔으련만, 수백 년을 헛되이 보내고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니 이건 나의 티끌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지 못해서 그런 걸 거야.”
하였다.

남궁두는 장로와 함께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곤 했지만 그가 숨기는 것이 있어 늘 이상하게 여겼다. 그의 배꼽 아래 한 치[寸] 정도의 부분을 가리고 남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점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며 그걸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장로(長老)는 웃으면서,
“그걸 왜 쉽게 보여 주랴. 보여 주면 그대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인데.”
하였다. 남궁두는,
“왜 놀라겠습니까, 한 번 보는 것이 원입니다.”
하자, 장로(長老)가 싸맨 것을 풀어 놓으니 반짝이는 금빛 1백여 줄기가 천장까지 쏘아댔다. 바로 볼 수도 없어 의자 밑으로 숨으니 장로(長老)는 다시 그걸 싸매서 전과 같이 하였다. 남궁두는 또,
“스승님은 벌써부터 모든 신(神)들을 다스린다면서 왜 한 사람도 찾아와 받드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니, 장로(長老)는,
“나는 정신을 날려서 그들의 조화를 받곤 했었네.”
하였다. 또 여러 귀신 구경하기를 청했더니,
“내년 정월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네.”
하였다.

그날이 되자 장로(長老)는 감실(龕室) 속에서 옷상자를 꺼내서 여덟 가지 채색의 방산건(方山巾)을 쓰고, 일곱 개의 별ㆍ해ㆍ달의 수를 놓은 도포(道袍)를 입고, 둥근 청옥(靑玉)에 사자를 그린 띠[帶]를 두르고 다섯 가지 꽃으로 무늬진 신을 신고, 손에는 여덟 모진 옥(玉)으로 만든 여의주(如意珠)를 붙잡고 섬돌대 위에 부좌(趺坐)하였다. 남궁두는 서쪽으로 향해서 모셨고, 동자(童子)는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대(臺) 위의 두 잣나무에 각각 울긋불긋한 꽃등불이 걸리더니 조금 지나자 산골에 가득한 수천수만의 나무에 모두 꽃등불이 걸려 붉은 불꽃이 공간을 가득 채워 대낮 같았다. 기이하고 괴상한 모습의 짐승들이 나타나는데, 더러는 곰이나 호랑이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자나 코끼리 같았다. 어떤 것은 표범인데 다리가 둘이고, 어떤 것은 규룡(虯龍)의 모양에 날개가 있고, 어떤 것은 용이면서 뿔이 없었다. 어떤 것은 용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것은 뿔이 세 개인데 사람처럼 서서 빨리 달리고, 어떤 것은 사람 얼굴처럼 생겨 눈동자가 세 개나 달린 것들로 수백 마리나 되었다.
또 코끼리ㆍ노루ㆍ사슴ㆍ돼지의 모양을 지닌 것으로 노오란 눈에 하얀 이빨, 붉은 털 하얀 발굽에 뛰고 할퀴고 하는 것들이 1천여 마리 정도나 되었는데 그를 모두가 열지어 좌우에 모시고 섰었다. 또 금동(金童)과 옥녀(玉女)가 지휘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이 서 있었다. 기치창검을 든 군대도 1천여 명으로 삥 둘러 서 있었다.
대(臺) 위에는 온갖 향기가 욱욱하고 패옥[璜珮] 부딪치는 소리들이 쟁쟁거렸다. 바로 이어서 푸른 장삼을 입고 상아 홀(笏)을 들고, 옥[水蒼]을 차고 고깔을 쓴 두 사람이 섬돌 아래서 국궁(鞠躬)하고는 창(唱)하기를,
“동방(東方)의 극호림(極好林)ㆍ광하(廣霞)ㆍ홍영산(紅暎山) 등 삼대신군(三大神君)이 뵙습니다.”
하였다. 그들 삼대신(三大神)은 모두 빨간 금관을 쓰고 붉은 도포에 옥띠를 띠고, 홀을 단정히 잡고, 구름이 그려진 신을 신고, 칼과 노리개를 찼으며 키가 헌칠했다. 얼굴은 희맑고 길었으며 미목(眉目)이 밝고 수려하였다. 장로(長老)가 일어서서 공수(拱手)하니 삼대신은 함께 두 번 읍(揖)하고는 물러갔다.
또 창하기를,
“봉호(蓬壺)ㆍ방장(方丈)ㆍ도교(圖嶠)ㆍ조주(祖洲)ㆍ영해(瀛海) 등 오주(五洲)의 진관(眞官)이 뵙습니다.”
하였다. 다섯 신(神)은 각각 지방색을 보이는 도포를 입고 관(冠)이나 패물은 앞의 것과 같았고, 모두 헌걸차고 수려했다. 장로(長老)가 일어서니 다섯 신(神)들이 모두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또 창하기를,
“동해ㆍ남해ㆍ서해의 장리(長離)ㆍ광야(廣野)ㆍ옥초(沃焦)ㆍ현롱(玄隴)ㆍ지폐(地肺)ㆍ총진(摠眞)ㆍ여궤(女几)ㆍ동화(東華)ㆍ선원(仙源)ㆍ임소(琳宵) 등 십도(十島)의 여관(女官)들이 뵙습니다.”
하자, 선녀(仙女) 10인이 모두 꽃으로 수놓은 금말건(金襪巾)을 쓰고 붉은 구슬로 된 보요(步搖)를 꽂아, 구슬과 비취옥이 영롱하게 얼굴에 반사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금봉(金鳳)의 무늬를 놓은 하얀 저고리에 파란 비단으로 만든 무릎 아래까지 닿는 긴 치마를 드리웠다. 태을영부(太乙靈符)를 차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나고, 푸르고 붉은 모가 난 낮은 신을 신었다. 헌칠하고 긴 허리로 남자들이 하던 절을 올리니 장로(長老)는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절을 받자 여관(女官)들이 물러갔다.
또 창하기를,
“천인(天印)ㆍ자개(紫蓋)ㆍ금마(金馬)ㆍ단릉(丹陵)ㆍ천량(天梁)ㆍ남루(南壘)ㆍ목주(穆洲) 등 칠도(七道)의 사명신장(司命神將)이 뵙습니다.”
하니 붉은 말액(抹額 건(巾)의 일종)에 깃을 꽂고 무인(武人)들이 입는 고의(袴衣)와 꽃으로 수놓은 앞가림 옷을 입고, 팔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비스듬히 걸었고, 손에는 붉은 창을 붙잡고 있었다. 모두 사자의 형태에 범의 모습으로 붉은 머리털을 세우고 금빛 눈동자에 용의 수염이 달렸었다. 읍(揖)만 하고 절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또 창하기를,
“단산(丹山)ㆍ현림(玄林)ㆍ창구(蒼丘)ㆍ소천(素泉)ㆍ자야(赭野) 등 다섯신의 거느림을 받는 산림(山林)ㆍ수택(藪澤)ㆍ영독(嶺瀆)ㆍ성황(城隍) 등의 모든 귀백(鬼伯)ㆍ귀모(鬼母)는 함께 뵙습니다.”
하였다.
5대 신장들의 모습은 앞의 7도 신장들의 모습과 같았고, 각각 한 부대(部隊)가 1백여 명이나 되는 영관(靈官)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키가 작고 누추했으며 어떤 것은 키가 컸으며, 어떤 것은 말쑥하고 어떤 것은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지닌 자들이었다. 여자 중에는 더러 늙은 추녀이고 더러는 곱고 젊었으나 그들의 옷은 모두 지방색을 따라 입었는데 열 지어 서서 네 번 절하고 물러나와 다섯 대열이 되었다.
장로(長老)가 소동(小童)에게 명령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서 남쪽으로 돌아 서쪽에 이르러 중대(中隊)의 앞에 서게 하니,
“여러 신령(神靈)들이 모두 모였으나 오직 위주(魏州)의 조부인(趙夫人)만 오지 않았습니다.”
고 아뢰었다. 소천신(素泉神)이 나와서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그는 귀양살이 가서 이제는 사람으로 강등되었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오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장로(長老)는 광하(廣霞) 등 세 진인(眞人)을 불러서 앞에 세워 놓고 말하기를,
“경(卿)들은 세 방면(方面)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상제님의 어진 덕(德)을 실천하여 백성들이 경들의 은택(恩澤)을 입은 지 오래였다. 요즈음 액운이 다가오고 있어 만 백성이 재앙(災殃)에 걸려들었는데 이에 대하여 구출할 방책을 강구하였는가?”
하고 물었다. 세 사람은 모두 탄식을 거듭하며,
“정말로 유시(諭示)하신 바와 같습니다. 어제 봉래산(蓬萊山)의 치수대감(治水大監)이 자하원군(紫霞元君)이 계신 곳으로부터 와서 홍영산(紅映山)에 들러 말하기를 ‘여러 진인(眞人)들이 구광전(九光殿) 위에 있으며 상제(上帝)를 모시는데, 삼도제군(三島帝君)이 있어 말하기를 「염부제(閻浮提)에 살고 있는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지나치게 교사스럽고 간사하여 속임수를 잘 쓰고 복(福)을 아끼지 않으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효(不孝)ㆍ불충(不忠)하고, 귀신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구림동(句林洞)에 사는 이면(狸面)의 대마(大魔)를 빌려다가 적토(赤土)의 군대를 모두 모아 가서 소탕하려 한다. 그래서 연속된 전쟁 7년째에 나라는 다행히 망하진 않을지라도 3방의 백성들을 10에 5~6을 살육하여서 경계하려 한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하인 저희들도 그 말을 듣고 역시 모두 두려워서 마음이 떨리더이다. 그러나 큰 운수의 소관인데 어찌 감히 힘으로 해결되겠습니까?”
한다.
장로(長老)도 역시 탄식하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중대(中隊)로부터 대포 한 알을 쏘는 소리가 나자 네 개의 대열이 모두 호응하여 북과 쇠를 울려서 도왔다. 그리하여 나무 위의 등불이 하나하나 땅에 떨어지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많은 구름이 내리 깔렸다.
장로는 방으로 들어와 관(冠)과 옷을 벗고 등불을 밝히고 방 가운데 앉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서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다음날 남궁두를 불러들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인연이 엷어서 여기에 오래 남아 있기에는 합당치 못하니 하산(下山)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黃精)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나. 음탕한 사람이나 도둑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ㆍ소ㆍ개고기 등을 먹지 말며, 타인을 음해(陰害)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땅 위의 신선이네. 행하고 수양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면 또한 승선(昇仙)도 할 수 있을 거네. 《황정경(黃庭經)》과《참동계(參同契)》는 도가(道家)의 높은 교리이니 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도인경(度人經)》은 노자(老子)의 도(道)를 전하는 글이고, 《옥추경(玉樞經)》은 바로 뇌부(雷府)의 여러 신들을 존숭하는 글이니 항상 지니고 다니면 귀신들이 두려워하고 흠앙할 것이네. 이 밖에 마음을 닦는 요체는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 최상이 되는 것이네. 일반 사람이 한 번 선과 악을 생각하여도 귀신들이 좌우에 벌려 있어 모두를 먼저 알아내고, 상제(上帝)께서 강림(降臨)하심이 무척 가까워 하나의 일을 하면 곧바로 그걸 두궁(斗宮)에 기록하여 억제하고 응답해 주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른 거네. 이치에 어두운 사람이 이를 업신여기고 꽉 막힌 하늘이니 두려울 게 없다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창창(蒼蒼)한 하늘 위에 참다운 주재자(主宰者)가 처리하는 자루[柄]를 조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자네야 참아내는 마음이 강하긴 하지만 욕념(慾念)이 제거되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삼가지 않는다면 한 차례 이단(異端)에 떨어지는 경우 끝없이 오랜 괴로움을 당할 걸세. 삼감이 없어서야 되겠나.”
하였다.
남궁두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곧 하직하여 하산(下山)하였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에 이르고 보니, 옛날의 집이라고는 터도 남지 않았고 전장(田莊)은 모두 2~4차례씩 주인이 바뀌었다. 또 서울로 가보아도 옛날의 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만이 묵은 풀 속에 종횡으로 놓여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돌아오고 말았다.
늘 생각하던 착실한 늙은 종이 있었다. 그 종은 해남(海南)에 살며 충분한 전택(田宅)도 있다기에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더니 얼마 후에 자기 주인임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울어댔다. 그가 살던 곳을 비워 주며 거처하도록 하였다. 상민(常民)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선생은 비록 다시 가업(家業)을 세웠으나 스승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해남에서 떠나 용담(龍潭)의 지역에 은거하였다. 깊은 산 골짜기를 골라서 살았으니, 치상산(雉裳山)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다시 선사(仙師) 만나기를 바라던 계획이었으리라.
수십 년 동안 황정(黃精)과 솔잎을 채취하여 식사로 했으니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지 않고 걸음걸이도 나는 듯하였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무신년(1608, 선조41) 가을 허균(許筠)이 공주(公州)에서 파직을 당하고 부안(扶安)에서 살았다. 선생이 고부(古阜)로부터 도보로 나의 여관방을 찾아 주셨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經)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선사(仙師) 만났던 전말(顚末)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위에서와 같이 말해 주었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에 83세였으나 얼굴은 마치 46~47세 된 사람과 같았다. 시력(視力)이나 청력(聽力)이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톡 쏘는 눈동자나 검은 머리털이 의젓하여 여윈 학(鶴)과 같았다. 어떤 때는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으며 《참동계(參同契)》나 《황정경(黃庭經)》을 쉬지 않고 외곤 하였다. 간혹,
“몰래 해로운 일을 하지 말며, 귀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착한 일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욕심을 끊고 마음을 단련한다면 상선(上仙)의 극치를 세울 수 있으며, 난새[鸞]와 학(鶴)이 며칠 사이에 내려와 맞아줄 것이네.”
하였다.
나는 선생의 음식ㆍ거처가 보통 사람과 같음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선생은,
“내가 처음에는 비승(飛昇)하리라 여겼는데 빨리 이루고 싶어 하다가 이루지를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님께서 이미 지상의 신선은 되었으니 부지런히 수련하면 8백세의 나이는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네. 요즘 산중(山中)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하여 속세로 내려왔으나 아는 사람 한 사람 없을뿐더러,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나의 늙고 누추함을 멸시하여 인간의 재미라고는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보고 싶어 하는 것이란 본래 즐거운 일인데, 쓸쓸하고 즐거움이라고는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속세의 음식을 금하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승화(乘化)하여 깨끗이 돌아가 하늘이 주신 바에 순종하려네. 그대야말로 선재(仙才)와 도골(道骨) 있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진선(眞仙)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참아내지를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네. 인(忍)이라는 글자 하나는 선가(仙家)의 오묘한 비결(祕訣)이니 그대 또한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나.”
하였다. 얼마 동안 머무시다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떠나갔으니, 사람들은 그가 용담(龍潭)으로 다시 갔다고들 하였다.

허균(許筠)은 논한다.
전해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佛敎)는 숭상했어도 도교(道敎)는 숭상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몇 천 년이 지났으나 득도(得道)하여 신선되어 간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해오는 말이 과연 징험이 되는 말이랴. 그러나 내가 보았던 남궁 선생(南宮先生)으로 말한다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선생이 스승으로 여겼던 분은 과연 어떤 사람이고, 상(相) 보는 사람에게 알아냈다는 것도 결코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못 되며, 말했던 것들도 역시 모두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요컨대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실체 없는 소리이리라.
다만 선생의 나이와 용모로 본다면 참으로 득도(得道)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닐 것인지. 어찌하여 80의 나이이고도 그처럼 건강했으랴. 이건 또 도교 숭상하는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결정내릴 수도 없으리라. 아아, 그거야말로 기이하도다.
우리나라가 궁벽한 바다 밖 멀리에 있어 뛰어난 은사(隱士)로 선문자(羨門子)나 안기생(安期生)과 같은 분들이 드물었으나 암석(巖石)의 사이에 그러한 이인(異人)이 있어 여러 천백 년 만에 남궁 선생으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누가 ‘좁은 지역이니 그러한 인물이 없다.’라고 말하랴.
도(道)에 통달하면 신선이고 도에 몽매하면 범인이다. 전해진다는 말이 이식(耳食)과 무엇이 다르리오. 선생으로 하여금 빨리 이루려던 욕망이 없게 하여 끝내 단련하던 효과를 거둘 수 있게만 했다면 저들 선문자ㆍ안기생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맞서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으랴.
다만 그분이 찾아 내지 못하여 다 이루어진 공(功)을 실패하고 말았으니 오호, 애석하도다.
▶선문자(羨門子)나 안기생(安期生) : 중국의 진(秦)과 한(漢)나라 시절 전설 속 중국 동해에 있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사는 신선들.
▶이식(耳食) : 귀로 듣기만 하여 그 전체는 따지지 않고 옳다고 믿어버리는 것.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남궁두의 나이가 90살이 되었어도 거의 늙지를 않았고, 늘 명산대천을 떠돌아다녔으며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서 사는 신선인 ‘지선(地仙)’이라 하였다고 적었다.

 

[필자미상 고사인물도화집, 견본채색, 39.7 x 29.1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3, 임형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