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49 - 장산인전(張山人傳)

從心所欲 2021. 12. 9. 07:41

벼슬살이에 문제가 될 만큼 도가와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허균은 「한정록」을 지을 만큼 은거(隱居)에 대해 동경하면서 동시에 양생술과 신선사상에도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일사소설(逸士小說)’이라 부르는데, <장산인전>은 그런 류에 속하는 글이다.

 

장산인(張山人)의 이름은 한웅(漢雄),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임은 알 수 없다.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양의(瘍醫) 업무에 종사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전에 상륙(商陸)을 먹고서 귀신을 볼 수도, 부릴 수도 있었다 한다. 나이 98세 때 40 정도로 보였는데, 출가(出家)하여 가신 곳도 알지 못했다. 그분이 집을 떠날 때, 2권의 책을 아들에게 주었으니 바로 《옥추경(玉樞經)》과 《운화현추(運化玄樞)》였다.
▶양의(瘍醫) : 종기, 부스럼, 외상을 치료하는 의원.
▶상륙(商陸) : 한약재 이름.
▶《옥추경(玉樞經)》과 《운화현추(運化玄樞)》: 《옥추경》은 도경(道經)의 경본(經本).《운화현추》는 도술(道術)을 터득하는 책으로 추정.

산인(山人 : 장한웅(張漢雄))이 그걸 받아 수만 번을 읽고 나자, 역시 귀신을 부릴 수 있었고 학질(瘧疾)도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는, 마흔 살에 출가(出家)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입산하였다. 그곳에서 곧 이인(異人)을 만나 연마법(煉魔法)을 배웠고, 또 도교(道敎)의 진리에 관한 10권의 책을 읽었다. 빈 암자(菴子)에 앉아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3년을 보냈다.

하루는 계곡을 지나는데, 두 사람의 중[僧]이 그를 따랐다. 우거진 숲 사이에 이르자,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엎드려서 맞아 주고 있었다. 산인이 꾸짖자, 호랑이들은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태도를 보였다. 산인 자신이 한 호랑이에 올라타고, 두 중으로 하여금 함께 다른 하나에 타게 하여 절[寺] 문 앞에 이르자 호랑이들이 내려놓고 물러가 버렸다.

산에서 머문 지 18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살았다. 나이가 60세였으나 용모는 정정하였다.
이웃에 비워 둔 집이 있는데, 흉측하여 거처할 수가 없자, 그 집의 주인이 귀신을 물리쳐 달라고 그에게 청했다. 산인이 밤에 그 집으로 가 보았다. 두 명의 귀신이 와서 꿇어 앉아 말하기를,
“우리는 문(門) 귀신과 부엌 귀신입니다. 요사스러운 뱀이 이 집을 차지하고서 간사한 짓을 하고 있으니 제발 그것을 죽여주십시오.”
하면서, 곧 뜰 가운데의 큰 홰나무 밑동을 가리켰다. 산인(山人)이 주술(呪術)의 물을 뿜어내자 조금 뒤에 사람 얼굴 모습의 큰 뱀이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꿈틀거리며 절반도 나오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것을 태워버리게 하자 집은 마침내 깨끗해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면서 화살로 꽂아 물고기를 잡으면, 산인이 죽은 것만 골라서 물동이에 넣고는 단약을 넣었는데, 그러면 물고기가 다시 살아나 유유히 헤엄치곤 하였다. 사람들이 죽은 꿩으로 시험해 보라고 하자, 또 단약을 입 속으로 넣으니 훨훨 날개를 치며 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스럽게 여겨,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까?”
물으면, 산인(山人)은,
“일반 사람들이란 태어나면서 그 정(情)이 방자하여 삼혼(三魂)과 칠백(七魄)이 택사(宅舍)에서 떠난 사람도 3년이 지난 뒤에야 끊어지니 약으로써는 살려낼 수가 없다.”
고 대답하였다.
▶삼혼(三魂) : 불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정혼(精魂)으로 태광(台光), 상령(爽靈), 유정(幽精).
▶칠백(七魄) : 사람의 몸에 있다는 일곱 가지의 혼백. 즉 시구(尸狗), 복시(伏尸), 작음(雀陰), 탄적(呑賊), 비독(非毒), 제예(除穢), 취폐(臭肺).

산인(山人)은 사실과는 다르게 글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글만 잘 지어 냈고, 또 밤눈이 어둡다고 말하며 밤에 바깥출입을 않으면서도 어두운 곳에서 잔글씨도 읽을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잡기(雜技) 놀이로, 베로 만든 병에 술을 담는 거나 종이로 만든 그릇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은 일 등 세상 사람의 눈을 휘둥거리게 한 것들이 모두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점쟁이[卜人] 이화(李和)란 사람이 점 잘 치기로 한창 유명했었는데, 산인은 자기보다 아랫수로 여겼다. 그가 점치는 것을 볼 때마다 잘 맞히지 못하면 산인이 고쳐서 말해주는데 모두 적중되는 말이어서 이화가 한마디도 감히 보태질 못했다. 이화가,
“산인(山人)의 좌우에는 항상 3백 명의 귀신들이 호위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인(異人)이다.”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산인의 나이는 74세였다. 그는 가산(家産)을 처리하여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승복(僧服)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5월에 소요산(逍遙山)으로 입산하였다. 그곳의 중에게,
“금년은 나의 명(命)이 다하는 해이니 반드시 화장(火葬)해 달라.”
고 말하였다. 오래지 않아 적군이 들어와 앉은 채로 칼에 찔렸는데, 그의 피는 하얀 기름 같았으며 시체가 엎어지지도 않았다. 잠시 후에 큰 뇌성을 치며 비가 내리자 적군은 겁이 나서 가버렸다.
산승(山僧)이 다비(茶毗)를 하자 서광(瑞光)이 3일 동안 밤낮으로 하늘에 잇대어 있었고 사리(舍利) 72개를 얻었다. 그 중에서 큰 것은 가시연[芡] 열매만큼 컸었고, 감청(紺靑)의 빛깔을 띠었다. 모두를 탑(塔) 속에 매장해 두었다.

이 해 9월에 산인(山人)은 강화도(江華島)에 사는 정붕(鄭䨜)의 집에 왔었는데, 정붕은 그의 죽음을 몰랐으며 3일이나 머물다가 가면서 금강산으로 간다고 말하더란다. 다음 해에야 비로소 그가 죽었음을 알았는데, 사람들은, 죽은 뒤에 신선(神仙)이 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정붕이란 사람 또한 이인(異人)을 만나서 점(占)을 잘 치고 관상을 잘 보던 상률가(象律家)였다. 하는 말마다 대부분 기이하게 적중하였으며 재랑(齋郞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받지를 않았다. 혹자는, 그가 귀신을 부릴 수 있었는데 젊어서 죽었다고 하였다.

 

[필자미상 고사인물도화집, 견본채색, 39.7 x 29.1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3, 임형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