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허균 46 -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從心所欲 2021. 11. 27. 10:04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역시 <엄처사전(嚴處士傳)>처럼 매우 짧은 글이다. 조선시대의 불우했던 이달(李達)이라는 시인을 조명했다. 이달은 허난설헌과 허균의 시(詩) 스승이기도 했다.

 

허균이 이 작품을 통하여 ‘능력은 있으나 적서(嫡庶)차별에 의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던 한 인간의 불우한 일생을 작품으로 형상화시켜 모순된 사회를 비판하려고 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에 대한 허균의 관심은 높이살만 할지라도, 시를 잘 짓는다는 것 하나로 관직에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아무리 글재주를 통하여 인재를 뽑았던 조선시대라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조선시대에 관리가 되려면 시 짓는 재주뿐만 아니라 거경궁리(居敬窮理)나 극기복례(克己復禮) 같은 소양도 겸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의 자는 익지(益之)로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후손이다. 그는 어머니가 천인(賤人)이어서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원주(原州)의 손곡(蓀谷)에 살면서 자신의 호(號)로 하였다.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 1345 ~ 1405.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다. 본관은 홍주(洪州). 공민왕 14년에 문과에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조선 건국 후에는 1398년(태조7)에 등용되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했다. 하륜(河崙)등과 《삼국사략 (三國史略)》을 찬수하기도 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소설《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
이달은 젊은 시절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지은 글도 무척 많았다.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이 있어 벼슬을 버리고 가버렸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을 따라 노닐며 서로 마음이 맞아 아주 기뻐하고 시사(詩社)를 결성하였다. 이달은 한창 소장공(蘇長公)의 시법(詩法)을 본받아, 그 요체를 터득하여 한번 붓을 잡으면 문득 수백 편을 적어 냈으나 모두 농섬(穠贍)하여 읊기에 좋은 시들이었다.
▶한리학관(漢吏學官) :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사역원(司譯院) 소속 벼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 최경창(1539 ~ 1583)과 백광훈(1537 ~ 1582)은 조선시대의 시인으로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소장공(蘇長公) : 북송의 시인 소식(蘇軾)

하루는 사암(思菴) 정승이 이달에게 말해주기를,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 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되네. 자첨(子瞻)의 시는 호방(豪放)하기는 하지만 이미 당시의 아래로 떨어지네.”
하였다. 그리고는 시렁 위에서 이태백(李太白)의 악부(樂府)와 가음시(歌吟詩),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찾아내서 보여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란 듯 정법이 거기에 있음을 알았다. 드디어 전에 배운 기법을 완전히 버리고, 예전에 숨어 살던 손곡(蓀谷)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갔다.
▶사암(思菴)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박순(朴淳)의 호이다. 대사성,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했다.
▶자첨(子瞻) : 소식(蘇軾)의 자(字). 호는 동파(東坡)다.

《문선(文選)》과 이태백 및 성당(盛唐)의 십이가(十二家), 유수주(劉隨州), 위좌사(韋左史)와 백겸(伯謙)의《당음(唐音)》까지를 꺼내서 문을 닫고 외었다. 밤이면 날을 새운 적도 있었고, 온종일 무릎을 자리에서 떼지 않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5년을 지내자 어렴풋이 깨우쳐짐이 있었다. 시험 삼아 시를 지었더니 어휘가 무척 청절(淸切)하여 옛날의 수법은 완전히 씻어졌었다.
▶십이가(十二家) ... 백겸(伯謙) : 십이가는 당(唐)나라 성당(盛唐)의 시인으로 유명했던 12명의 시인. 유수주(劉隨州)는 당나라 중당(中唐)의 시인 유장경(劉長卿)이 수주 자사(隨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부르는 이름이다. 위좌사(韋左史)는 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 백겸(伯謙)은 《당음(唐音)》을 지은 원(元)나라의 양사홍(楊士弘).

그리하여 당나라 여러 시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장편(長篇), 단편(短篇) 및 율시(律詩), 절구(絶句)를 지어냈다. 글자와 구절을 단련(鍛鍊)하고 성음(聲音)과 운율(韻律)을 췌마(揣摩)하면서, 법도에 부당함이 있으면 달이 넘고 해가 가도록 개찬(改竄)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 10여 편을 지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고 여러분들 사이에서 읊자, 모두 감탄해 마지않으며 깜짝 놀랐었다. 최고죽(崔孤竹)ㆍ백옥봉(白玉峯) 등도 모두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고, 제봉(霽峯)ㆍ하곡(荷谷)과 같은 당대의 시로 이름난 분들이 모두 성당(盛唐) 풍의 시를 짓는다고 추켜세웠다.
그의 시는 청신(淸新)하고 아려(雅麗)하여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ㆍ맹호연ㆍ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버금하고,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錢起)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신라(新羅)ㆍ고려(高麗) 이래로 당시(唐詩)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정말로 사암(思菴)이 고무시켜 준 힘이었으니, 그건 진섭(陳涉)이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을 열어 준 것이라고나 할까.
▶제봉(霽峯)ㆍ하곡(荷谷) : 제봉(霽峯)은 조선시대의 시인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호이다. 문과에 장원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하곡(荷谷)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허균의 친형 허봉(許篈)의 호.
▶전기(錢起) : 당 나라 중당의 대표적 시인.
▶진섭(陳涉) : 이름은 승(勝). 진(秦)나라 말엽에 기병(起兵)하여 진(秦)에 항거하여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고조(漢高祖)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진승이 처음에 기병하여 유방에게 봉기의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이달은 이 때문에 이름이 우리나라에 울렸고, 귀하게 여겨져 그의 신분은 놓아두고도 칭찬해 마지않는 분들로 시문(詩文)에 뛰어난 3~4명의 거장(巨匠)들이 있었다. 그러나 속인(俗人)들 중에는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줄줄이 이어 있어,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덮어씌우며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죽게 하거나 그의 명성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담하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검속(檢束)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속(時俗)의 예법에 익숙하지도 못하여 이런 것들 때문에 시류(時流)에 거슬렸었다.
그는 고금(古今)의 이야기를 잘했으며,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면 술을 즐겨 마셨다. 진(晉) 나라 사람(왕희지 등을 가리킴)에 가깝도록 글씨도 잘 썼다. 그의 마음은 툭 트여 한계가 없었고, 먹고 사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서 사람들 중에는 이 때문에 더 그를 좋아하는 이도 있었다.
평생 동안 몸을 붙일 곳도 없어 사방으로 유리(流離)하며 걸식(乞食)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갔음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이야 곤궁했어도 불후(不朽)의 명시를 남겼으니 한 때의 부귀로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인데 내가 가려서 4권으로 만들어 전해지게 하였다.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태사(太史) 주지번(朱之蕃)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았다. 만랑무가(漫浪舞歌)라는 시를 읽고서는 격절차상(擊節嗟賞)하면서,
“이 작품이 이태백(李太白)의 시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도 이달의 반죽원(斑竹怨)이라는 시를 보고서,
“청련(靑蓮)의 시집 속에 넣어도, 안목(眼目) 갖춘 사람일망정 판별하기 쉽지 않으리라.”
했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망언(妄言)을 할 사람이겠는가. 슬프다. 달의 시야말로 진실로 기특했었다.
▶주지번(朱之蕃) : 명(明)나라 때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고 시로도 이름이 크게 났던 인물이다.1606년 사신(使臣)으로 조선을 방문했고 이때 허균은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주지번과 만나 서로 글을 나누었으며,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그 시들이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허균은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격절차상(擊節嗟賞) : 감탄하여 무릎을 치며 탄식함.

▶석주(石洲) 권필(權韠) :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선조와 해군 때에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가 귀양 가는 도중에 죽었다.
▶청련(靑蓮) : 이백(李白)의 호.

 

허균은 25세 때에 지은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이달에 대하여 “젊어서 화류계(花柳界)에 출입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재주를 시새우는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비방하였고, 심지어는 ‘어머니도 잘 대우하지 않고 부인과의 예의도 닦지 않았다.’ 하며 비난해 마지않았다.”라고 적었다.

 

[필자미상 고사인물도화집, 견본채색, 39.7 x 29.1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83, 임형택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