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의 <수성구지(壽城舊址)>라는 그림이 있다. ‘수성(壽城)의 옛 터’라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곳을 ‘궁궐 여인들의 내불당(內佛堂)이었던 인수(仁壽), 자수원의 옛터로 짐작되는 곳’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다. ‘내불당(內佛堂)’은 태조가 왕실의 불교신앙을 위하여 창건한 절로 경복궁 내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면 수성(壽城)은 경복궁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선의 그림에 나타난 지역은 누가 보더라도 경복궁 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뒤에 있는 산에 검은 색으로 칠해진 바위는 얼핏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연상케 하여, 인왕산의 동편 자락일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한편으로는 백악산의 서편에도 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백악산 자락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풍수를 따지던 그 때에 서향으로 건물을 지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어떻든 간에 경복궁 안은 아니다.
<정선필 수성구지도(鄭敾筆壽城舊址圖)>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어지는 설명은 이렇다.
인왕산 기슭의 ‘수성(壽城) 옛 터’를 그린 그림이다. 옥류동(玉流洞)의 계류가 흘러 백운동천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던 자수원(慈壽院) 터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자수원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 선왕의 후궁들을 모여 살게 했던 자수궁(慈壽宮)과 수성궁이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때 비구니 승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얻은 명칭이다. 자수원은 현종(顯宗, 재위 1659~1674) 때인 1661년 철폐되었는데, 1710년 도성 내에 창고를 지을 자리로 ‘인왕산 아래 수성궁 터’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건물이 완전히 없어진 후이고 그 자리를 ‘수성 옛 터’로 불렀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자수궁(慈壽宮) 또는 자수원(慈壽院) 터는 어디일까? 자수궁 터 표지판은 종로구 옥인동 45-1에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표지판의 내용이 이랬다.
[자수궁터 표지판, 여성문화유산연구회 사진]
기가 막힐 일이다. 한국학의 진흥과 민족 문화의 창달을 위해 설립되었다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차 여전히 자수궁을 ‘풍수지리가인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 등에 의하여 인왕산왕기설(仁旺山王氣說)이 강력히 제기되자 광해군이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창건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수궁(慈壽宮)의 실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히 밝혀져 있다. 광해군 때보다 150여년 앞선 문종 때이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1450년) 3월 21일 기사이다.
임금이 무안군(撫安君)의 예전 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이름을 자수궁(慈壽宮)이라 하였으니, 장차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을 거처하도록 함이었다.
기사에서 임금은 물론 문종이고 무안군(撫安君)은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방번(芳蕃)이다. 선왕(先王)은 세종이다. 즉 자수궁은 문종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세종의 후궁들의 거처를 위하여 마련한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실록에는 같은 해 6월 6일에 세종(世宗)의 후궁(後宮)들이 빈전(殯殿)에서 자수궁(慈壽宮)으로 옮겨간 사실도 확인된다.
일반인도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평생 역사를 공부했다는 사학자들이 모여서 저따위 흰소리나 해대고 있는 것은 광해군에 대한 반감으로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신들이 얼마나 게으른지 티를 내는 것 외에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나마 서울시는 2016년에 표지판을 새로 고쳤다.
수성궁에 대해서도 《단종실록》 단종 2년(1454년) 3월 13일 기사에 이렇게 나와있다.
임금이 예조에 전지하기를,
"문종(文宗)의 후궁(後宮)이 사는 곳을 수성궁(壽成宮)이라 칭하라.“
하였다.
기사에 쓰인 수성궁(壽成宮)의 한자는 정선이 쓴 수성(壽城)과는 ‘성’자가 다르다. 그러나 세조 때의 기사에는 수성궁(壽城宮)으로도 기재가 되었다.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 ‘壽成宮’으로 쓰였다. 세조 때 사관과 정선의 실수인지는 몰라도 두 이름이 같은 궁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듯하다.
《세조실록》 세조 1년(1455년) 11월 13일 세조가 각 궁전에 소속된 체아직(遞兒職)의 조달방안에 대하여 세조가 지시하는 내용의 기사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대전(大殿)에는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를 아울러서 52인인데 체아(遞兒) 15를 주되 7품(品)을 5인, 8품을 6인, 9품을 4인으로 하고, 자수궁(慈壽宮)에는 별감·소친시를 아울러서 6인이고, 신빈궁(愼嬪宮)에는 별감·소친시를 아울러서 6인인데 체아는 1품이 1인이며, 의빈궁(懿嬪宮)에는 별감·소친시를 아울러 8인이고, 수성궁(壽城宮)에는 별감·소친시를 아울러 24인인데 체아는 9품이 1인이며....“
위 기사를 통해 수성궁과 자수궁은 서로 다른 궁(宮)이고, 적어도 세조 때부터 있어왔으며, 소속된 인원의 수로 미루어 수성궁이 자수궁보다 더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세조 2년 7월 15일자 기사에도 수성궁과 자수궁이 함께 등장한다.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대궐 안에서의 공상(供上)과 경외(京外)의 공처(公處)에서 술의 사용을 일체 금지시키되, 수성궁(壽成宮)과 자수궁(慈壽宮), 영수궁(寧壽宮)에서는 종전대로 술을 쓰고, 또 민간에서 술을 사용하는 것도 금하지 말라."
하였다.
기사에 나오는 영수궁(寧壽宮)은 태종(太宗)이 승하한 뒤 태종(太宗)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별궁이다. 원래 이름은 의빈궁(懿嬪宮)이었으나 세조 3년에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라 영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자수궁은 세종의 후궁들 거처이다. 수성궁의 관노 숫자가 자수궁보다 많은 것은 문종이 승하한지 2 ~ 3년 밖에 안 된 시점이라 수성궁에 있는 후궁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성궁은 연산군 때까지도 존치되었었다. 연산군일기 연산 5년(1499년) 2월 4일에 연산군이 승정원에 내린 지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선왕의 후궁이 있는, 자수궁(慈壽宮)·수성궁(壽成宮)·창수궁(昌壽宮)은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나누어 모시도록 하라. 대저 내관의 직무는 궁문을 지키고 정제(庭除)를 소제할 뿐으로 후궁의 생존 시엔 마땅히 앞에서 모시도록 하지만, 사후엔 내관으로써 3년상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대체에 어떠할지? 후궁에 아들이 있으면 아들이 마땅히 지켜야 하며, 아들이 없으면 종이 지켜야지 이를 내관으로써 대신케 함은 불가하니, 경 등이 참작하여 의계(議啓)하라."
연산군 10년인 1504에 연산군은 “수성궁에 거처하는 선왕의 후궁들을 모두 자수궁으로 옮기고, 수성궁은 이름을 고쳐 성종의 후궁을 거처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흥청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수성궁의 이름을 정청궁(貞淸宮)으로 고치게 했다. 그러나 이내 새로 정청궁(貞淸宮)을 지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실제로 수성궁의 이름이 정청궁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던 별궁들은 예법에 따라 ‘궁(宮)’이란 명칭이 붙은 것일 뿐이지 실제 궁궐이 아니다. 자수궁의 경우에서 보듯 민가를 고쳐 후궁을 거처하게 하고 궁(宮)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별궁에 거처하던 후궁들이 다 죽고 나면,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지 않는 한 건물은 퇴락하고 명칭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연산군 이후로는 수성궁이라는 명칭은 실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산군으로부터 100여년 뒤인 광해군 대에 이르면 수성궁은 이미 명칭까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일기》광해 8년(1616년) 8월 20일의 기사에는 창경궁을 재건하고 남은 자재를 적재해둘 장소에 대하여 선수도감이 광해군에게 이런 건의를 한다.
"도감에 쓰고 남은 쌀과 포목이 넉넉하게 있으니 쌀과 목면으로 이렇게 계산하여 운송비용을 지급하고 실어다 수성동(壽城洞) 공가(空家)로 들여다가 수직(守直)하게 하면 허술하게 될 걱정도 없을 듯하고 내외의 도성 백성들도 작으나마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성동(壽城洞) 공가(空家)’가 꼭 수성궁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정에서 민가의 빈 집을 논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고, 또 집의 크기가 남은 건축 자재를 쌓아둘 만큼 넓은 곳이라면 옛 수성궁 터일 가능성이 높다.
자수궁은 인조 때에 궁(宮)이라는 명칭을 떼고 자수원(慈壽院)으로 바뀌어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그리고 현종 2년(1661년)에 이르러서는 선조(宣祖) 때의 후궁을 마지막으로 자수원에 더 이상 후궁이 거처하지 않게 되자 자수원을 철폐하고, 자수원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 성균관의 학사를 수리하는데 쓰게 하였다. 자수원 터에는 한성의 4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이 들어섰다.
겸재 정선은 장동에 오래 살았기에 옛 수성궁 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수궁 터는 그가 살던 집에서 자수교라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될만큼 가까이에 있던 곳이다. 정선이 두 터의 차이를 몰라 자수궁 터를 수성궁 터로 그렸을 리가 만무하다. 우리로서야 지금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수궁 터는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참조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왕조실록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철 2 - 북산산수화첩 (0) | 2021.12.06 |
---|---|
김수철 1 - 겨울 산수 (0) | 2021.12.04 |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 2 (0) | 2021.11.25 |
윤두서의 아들 윤덕희 1 (0) | 2021.11.22 |
와운(渦雲) 또는 둔운(屯雲) (0) | 2021.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