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문가들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1710 ~ 1760)의 그림을 맑은 담채, 간결한 표현, 단아한 분위기 같은 표현들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문외한의 눈에는 이인상의 그림들 거의 대부분에는 뭔가 색감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수묵화조차도 농묵(濃墨)을 거의 쓰지 않아 얼핏 색 바랜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이인상이 화폭에 먹칠을 해놓은 듯한 그림이 있다. 거기다 그림 자체도 전통 수묵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여백도 없고 복잡하다. 그동안에는 주로 <와운(渦雲)>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나 최근에는 <둔운도(屯雲圖)>로 소개되기도 한다.
얼핏 현대의 추상화 같이 보이는 이 그림은 <와운(渦雲)>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왔었다. ‘소용돌이 구름’이라는 뜻이다. 시커먼 먹구름 위에 행서로 쓰인 제발은 그동안 유홍준 박사가 번역한 내용에 따라 술 취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왔다.
깊은 산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처음 그대에게 갈 때,
종이와 먹물이 다 못쓰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취헌시(翠軒詩)를 쓰고 싶었으나취한 뒤에 글씨를 쓰니
마치 뭉게뭉게 진을 친 구름과도 같았으니,
바로 이 화폭과 같습니다.
한번 웃어주십시오.
이 그림을 십 수 년 전부터 꾸준히 소개해온 미술평론가 손철주도 거의 같은 맥락으로 제발을 풀이해 왔다. 글 내용이 그럴듯하여 옛날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이 그림이 그려진 이유가 수긍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인상에 대하여 20년 이상을 연구하고 몇 년 전 그 결과를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이란 책으로 펴낸 박희병은 제발에 대하여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우중(雨中)에 전옥서(典獄署)로 처음 출근하여
종이가 번지고 먹이 잘못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생각건대 읍취헌(挹翠軒)의 시구 “취한 후에 글자를 쓰니 둔운(屯雲)과 같네”가
참으로 이 그림과 비슷해 이 때문에 한번 웃는다.
원령이 쓰다.
獄署雨中初臨, 不畏紙潘墨敗, 意翠軒詩 醉後作字如屯雲, 正類此幅 爲之一笑 元霝書
▶전옥서(典獄署) : 형조(刑曹)에 소속되어 죄수들을 관리하던 관서
▶읍취헌(挹翠軒) : 연산군 때 촉망받던 관리였으나 유자광(柳子光)에 관련된 탄핵소를 올렸다가 모함을 받아 유배되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 당했던 박은(朴誾)의 호(號).
▶원령(元霝) : 이인상의 자.
국문학 교수인 박희병은 제발의 새로운 해석에 따라 이 그림을 <와운(渦雲)> 대신에 <둔운도(屯雲圖)>로 명명했다. 둔운(屯雲)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이나 ‘뭉쳐있는 구름’을 뜻한다.
이인상은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해낸 집안 출신으로 영조11년인 1735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증조부가 서얼 출신이라 신분상의 제약으로 본과는 치르지 못하였다. 그러다 1739년 음직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섰고 그 다음 해에는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종8품직 봉사(奉事)로 발령을 받았으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5일 만에 전옥서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따라서 박희병의 해석이 이인상의 행적과도 들어맞는다고 볼 때, 이 그림은 이인상이 전옥서로 처음 출근한 1740년 윤6월의 어느 날에 그린 그림이 된다. 제발에 우중(雨中)에 출근했다고 했으니, 전옥서에서 바라본 먹구름 낀 하늘을 그렸을 것이다.
아무 관련성도 없지만 이인상의 소용돌이치는 구름 모양에서 문득 유명한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하늘의 소용돌이무늬가 떠오른다.
고흐가 구름을 그렸는지 대기의 흐름을 그렸는지 아니면 밤하늘에 흐르는 우주의 기운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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