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기(律己) 제6조 낙시(樂施) 2
가난한 친구나 궁한 친척들은 힘을 헤아려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
(貧交窮族 量力以周之)
▶율기(律己)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편인 율기(律己)는 자신을 가다듬는 일을 말한다. 수령이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부터 은혜를 베푸는 일까지 6조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율기(律己)의 제6조인 ‘낙시(樂施)’는 은혜 베풀기를 즐기는 일이다.
한집안 사람들을 임지에 데리고 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들 중에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식구를 따져서 매월 생활비를 대 주지 않을 수 없으며, 소공친(小功親) 중에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반달 생활비를 대 주어야 하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곤경에 처했을 때만 돌보아 주면 될 것이다.
▶소공친(小功親) : 상복을 5개월 동안 입는 관계의 친척. 종조부모(從祖父母), 재종형제(再從兄弟), 종질(從姪), 종손(從孫) 등. |
가난함이 그리 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틈틈이 조금씩 보내주면 될 것이다.
가난한 친구가 와서 도움을 청할 때에는 후히 대접을 하고 물건을 줄 적에는 노자까지 계산하여 집에 돌아가서도 남는 것이 있게 하는 것이 좋다.
유송(劉宋)의 강병지(江秉之)가 신안 태수(新安太守)로 있을 때 받은 녹봉(祿俸)을 모두 친척과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벼슬살이하는 동안에 책상[書案] 하나 만든 것뿐인데 그것마저도 관고(官庫)에 넣어 두었다.
▶유송(劉宋) : 남조(南朝) 송(宋)의 별칭. 유유(劉裕)가 세운 나라. 420~479. |
방언겸(房彥謙)이 경양령(涇陽令)이 되었다. 옛날부터의 가업(家業)이 있었고, 또 받은 녹봉도 모두 친척이나 친구들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주는 데 쓰고 비록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태연히 지냈다. 일찍이 그의 아들 방현령(房玄齡)에게,
“사람들은 모두 녹봉으로 부자가 되는데 나만은 벼슬살이 때문에 가난하게 되니 자손들에게 남겨줄 것은 청백(淸白)뿐이다.”
하였다.
▶방언겸(房彥謙) : 수(隋)나라 문제(文帝)ㆍ양제(煬帝) 때의 관리. 집안이 부유하였으나 전후 벼슬살이할 적에 받은 녹봉도 다 친척이나 친구들을 도와주어 집안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
나유덕(羅惟德)이 영국지부(寧國知府)로 있을 때 하루는 유인(劉寅)을 만나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오늘 아주 유쾌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므로 유인이 무슨 일이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말하였다.
“요즈음 가난한 일가 10여 인이 굶주리다가 멀리까지 와서 도와주기를 청하기에 그동안 모아 둔 녹봉을 모두 털어서 주었는데도 아버님 이하 온 가족들이 한 사람도 내가 하는 일을 막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기분이 유쾌합니다.”
▶나유덕(羅惟德) : 명(明)나라 세종(世宗)~신종(神宗) 때 학자. 이름은 여방(汝芳), 자가 유덕(惟德). |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부임하는 고을마다 종족(宗族)을 만나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관곡히 대접하였다. 자신의 생활 규모를 줄여가면서도 종족이 요구하면 반드시 들어주면서 말하였다.
“우리 종족이 쇠퇴하여 녹을 먹는 자는 나뿐이다. 만약 내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비록 청렴하고 절약했다는 이름은 얻을지라도 조상의 마음을 체득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벼슬살이하는 도리가 제 몸만 살찌게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관고(官庫)에 남은 재정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것은 지극한 덕(德)이며, 재물을 남용하여 관가의 빚을 지게 되면 그것은 예(禮)가 아니다. 근세에 이복암(李伏菴) 어른이 만윤(灣尹)이 되어 함부로 은혜를 베풀다가 공채(公債)를 8천 냥이나 졌다. 비록 그 허물을 보고 어진 마음을 알 수 있으나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본받을 일은 못 된다.
▶이복암(李伏菴) : 복암(伏菴)은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의 호이다. 조선 문신이며, 천주교(天主敎) 교도(敎徒)로, 벼슬은 의주 부윤(義州府尹), 병조와 예조의 참판, 좌승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 |
감사(監司) 한지(韓祉)가 임지에 있을 때 매양 시제(時祭) 때를 당하면 여러 비장(裨將)들을 시켜서 제단(祭單) - 제수단자(祭需單子)이다. - 을 썼는데 온종일 걸려서야 끝이 났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제사 드리는 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니, 한지가
“이들은 모두 우리 선영(先塋) 안에 있는 동족들의 무덤이다. 우리 선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다 같이 지친(至親)으로서 함께 한 산에 묻혔는데, 한쪽 자손은 부귀영화를 누려 조상이 관에서 바치는 성대한 제물을 받고 한쪽 자손은 쓸쓸하여 조상이 술 한 잔도 받지 못한다면 어찌 신도(神道)가 편안할 것이며 족속들의 부귀영화에 힘입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전의(全義)의 수령으로 있을 때 읍의 재력이 지극히 보잘것없었으나 여러 곳의 제단(祭單)은 한결같이 이와 같았다.
▶한지(韓祉) : 조선 문신. 1675~?. 호는 월악(月嶽),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벼슬은 충청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청백(淸白)하기로 유명하였다. ▶시제(時祭) : 음력 10월에 조상의 산소에 가서 드리는 제사 또는 2월ㆍ5월ㆍ8월ㆍ11월에 가묘(家廟)에 지내는 제사. |
감사 이창정(李昌庭)이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있을 때 공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관(官)의 품계도 공과 같았다. 성명이 같은 그 사람의 친구 중에 가난한 선비가 있었는데, 딸의 혼수(婚需)를 도움받기 위해서 찾아와 공을 보니 그의 친구가 아니었다. 실망하여 머뭇거리므로 공이 자리에 앉힌 후 서서히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사람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본인이 아니라도 관계없다.”
하면서 후히 대접하고 혼수를 마련해 주되 한 가지도 빠진 것이 없게 해주었다. 그 사람이 감사히 여기며 말하였다.
“비록 그 친구가 마련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창정(李昌庭) : 조선 문신. 1573~1625. 호는 화음(華陰), 무구옹(無求翁)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순천(順天)ㆍ동래(東萊)의 부사(府使),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목민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민심서 95 - 녹봉을 절약한 이익은 백성에게 돌아가야 한다. (0) | 2021.12.11 |
---|---|
목민심서 94 - 관가의 재물로 남을 돕는 것은 옳지 않다. (0) | 2021.12.07 |
목민심서 92 - 기꺼이 베푸는 것이 덕을 심는 근본이다. (0) | 2021.11.30 |
목민심서 91 - 재물은 버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0) | 2021.11.26 |
목민심서 90 - 쓰고 남는 것은 장부에 기록하여 수령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에 대비하라. (0) | 2021.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