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바다 위의 왕양명

從心所欲 2022. 1. 28. 06:02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진정한 앎은 내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서 찾아야 하는가?

앎과 실천은 서로 다른가?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 ~ 1528)이 이룩한 신유가(新儒家)철학인 양명학(陽明學)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주희의 주자학과는 다른 답을 내놓았다.

사람에게는 선을 지향하는 마음과 악을 지향하는 마음이 함께 갖추어져 있어 이 중에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더 근본적이기는 하나 욕망 때문에 가려지기 쉬우므로 수양을 통해 선의 마음을 확충하고 악의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고 것이 주희의 견해였지만 왕수인은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 선악이 없다고 보았다.

주희가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의 이치가 이(理)라고 한 것에 대하여 왕수인은 마음이 곧 이(理)이고 이(理)는 곧 기(氣)라는 논리를 폈다. 또한 이(理)가 마음을 떠나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心外無理], 마음 밖에는 사가 없다[心外無事]고 했다.

또한 “안다고 하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이며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여 ‘먼저 알고 나중에 실천한다[先知後行]’는 주희의 학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왕수인(王守仁) 자신도 주자학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갔지만 젊은 시절 주희가 주장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방법을 따랐다가 실망한 일이 있었다. 바깥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사물의 이치를 찾는다는 주자학적 궁리법을 따라 왕수인은 꼬박 7일 동안 뜰에 있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그 이치를 탐구하려고 해봤지만, 결국 얻은 것 없이 병만 나 버렸던 것이다. 이후로 왕수인은 주자학에 회의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관직에 있던 왕수인은 35세 때인 1506년에 환관 유근(劉瑾)에게 밉보여 곤장을 맞고 귀주(貴州) 용장(龍場)의 역승(驛丞)이란 말단으로 좌천되었다. 왕수인은 그곳에서 약 1년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이(理)로 파악하는 주자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으며, 진정 중요한 것은 마음[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이 참된 학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자학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를 흔히 ‘용장(龍場)의 오도(悟道)’라고 한다.

이 시기에 그가 <범해(泛海)>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왕수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險夷原不滯胸中 험하고 평평한 것이 원래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何異浮雲過太空 뜬구름이 허공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夜靜海濤三萬里 밤의 고요함 속에 바다 파도는 삼만리를 가고
月明飛錫下天風 달빛은 하늘 높이 부는 바람 아래로 온 땅을 비추네.

 

이 시는 왕수인이 용장에서 자신이 깨달은 학문에 대한 기쁨이나 자신감을 피력한 것처럼 보인다. 요란을 떨지 않고도 삼만리를 가는 파도처럼, 세찬 바람 속에서도 온 누리를 비추는 달빛처럼, 자신이 밝힌 학문이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의 학설은 주자학에 비해 훨씬 명료하고 실천에 옮기기 쉬웠기 때문에 당시 명나라에서 크게 유행하여 그의 학설을 따르는 학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자의 성리학을 추종한 조선에서 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 불리며 이단 취급을 받았다. 조선에서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자에 경도된 대부분의 조선 선비들은 마음을 우주의 본체로 파악하고 있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비하한 것처럼 심즉리설(心卽理說)을 내세운 양명학을 불교와 같은 류의 학문으로 여겼다.

그나마 양명학이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의 홍대용(洪大容)이나 박지원, 박제가 대에 이르러서다. 그런데 이들보다 약 50년 앞선 세대였던 겸재 정선이 왕수인의 <범해(泛海)> 시 구절을 화제로 하여 그림을 남겼다.

 

[정선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124.5 x 67.6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제목은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로 전해지지만, <범해(泛海)>의 마지막 두 구절을 적은 이 그림 속 선인(仙人)은 왕수인일 수밖에 없다. 정선은 시 구절이 잘 드러나게 커다란 달과 넘실대는 파도를 그리고 ‘바다에 떠서’라는 시 제목 ‘범해(泛海)’에 걸맞게 바다 위에 의연히 서있는 왕수인을 그렸다. 노인의 모습이지만 험난한 파도 위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다. 그림 속 왕수인은 이런 말을 할 듯싶다.

 

“나의 영명함이여, 천지와 귀신을 주재한다!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하늘이 높다 한들 누가 우러러보겠는가?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땅이 깊다 한들 누가 내려다보겠는가? 나의 영명함이 없다면, 누가 귀신의 길흉화복을 가져오는 힘을 느낄 것인가? 천지도 귀신도 만물도 나의 영명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니, 나의 영명도 천지와 귀신과 만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하나의 기운이 전체에 흐르나니, 어찌 너와 내가 따로 있겠는가!”
『전습록(傳習錄)』
▶『전습록(傳習錄)』: 왕수인의 어록과 서간을 제자들이 모아 엮은 책.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인물세계사(함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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