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나옹애사

從心所欲 2022. 2. 3. 10:28

이정(李禎, 1578 ~ 1607)은 30세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화원화가이다. 부지런 떠는 삶이 싫었는지 게으를 ‘나(懶)’자를 써서 나옹(懶翁), 나재(懶齋), 나와(懶窩)와 같은 호들을 썼다. 이정은 허균보다 나이가 9살 어렸지만 두 사람은 가깝게 교유했던 사이로 전해진다. 이정이 젊은 나이에 타향에서 객사하자 허균은 <이정애사(李楨哀辭)>라는 글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흔히 <나옹애사(懶翁哀辭)>로도 불리는 글이다. 사(辭)는 우수와 격정 같은 소재를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서정적 한문 문체이다.

 

이정(李楨)의 자는 공간(公幹)이며 스스로 나옹(懶翁)이라 호하였다. 아버지 이숭효(李崇孝), 할아버지 배련(陪連), 증조 소불(小佛)이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그가 태어날 때, 한 금신 나한(金身羅漢)이 그의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면서 말하기를,
“너의 집 3대(代)에 걸쳐 네 사람이 모두 부처[佛]를 잘 그려서, 그린 부처가 수천 구(軀)나 된다. 그래서 내가 부처님 뜻을 받들어 너를 위하여 아들을 주어 보답하리라.”
하였다. 그 꿈을 깨고 나서 아기를 낳으니, 서광(瑞光)이 해를 꿰뚫었는데, 그 생김새가 꼭 닮았었다.
그의 부모가 일찍 죽어, 작은 아버지인 흥효(興孝)에게서 자랐다. 5세에 저절로 그림 그릴 줄을 알아, 붓을 들어 중[僧]을 그렸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그럴듯하여서 흥효가 기특히 여겨 가법(家法)대로 가르치니, 10세엔 벌써 대성하였다. 특히 산수화(山水畵)에도 정통(精通)하였지만 인물화(人物畫)와 불화(佛畫)가 가장 옛것에 핍진했다. 그림을 아는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에게 견주기도 하나, 그 정채(精彩)는 더 낫다고 한다. 11세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축년(己丑年)에 장안사(長安寺)를 고쳐 지을 때, 그가 그린 벽화(壁畫)와 산수화 및 천왕상(天王像) 여러 구(軀)가 다 날아 움직일 듯하고 삼엄하니, 난우(蘭嵎) 주 태사(朱太史)가 그 그림을 보고 천고에 최고라고 크게 칭찬하면서 ‘천하에 짝할 이가 없다.’고 하고는, 마침내 산수화를 그에게서 많이 그려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정은 사람됨이 게을러서 그림을 그리려 들지 않았으므로, 그의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은 드물다. 정미년(丁未年) 2월에 술로 병이 들어 서경(西京)에서 죽으니 애석하다.
▶기축년(己丑年) : 1589년(선조 22년)
▶정미년(丁未年) : 1607년(선조 40년)

 

글 속에 나오는 난우(蘭嵎) 주 태사(朱太史)는 1606년 조선에 왔던 명(明)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이때 허균은 주지번 일행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정이 주지번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정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 모습을 그려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르며 울곤 했었다. 그의 숙부ㆍ숙모 섬기기를 부모 같이 섬기어 감히 게으르지 않았고, 숙부 내외 역시 다 친자식 같이 여겼었다. 술을 즐겼고 마음은 활달하였다. 글씨도 잘 쓰고 시도 할 줄 알았는데, 다 속기(俗氣)를 벗어나 비범하였다. 겉보기에는 뒤가 흐려 무슨 일을 단단히 하지 못할 듯하나, 그 속은 툭 트이고 조예도 깊었다. 그리고 불교(佛敎)에 대해서는 경지가 매우 깊어 그의 이해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었다.

비록 가난하여 남에게 기식(寄食)하고 지냈으나 의(義) 아닌 것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권력 있고 지위 높은 사람일지라도 더럽게 여겨, 버리기를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질 듯이 하였다. 친구인 심우영(沈友英)ㆍ이경준(李耕俊)과 아주 도탑게 지내어 마치 형제 같았다. 그 두 사람은 여러 해를 그와 사귀었지만 한 번도 털끝만한 불의(不義)를 볼 수가 없었다.

 

이정과 형제 같이 지냈다는 심우영(沈友英)과 이경준(李耕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문명(文名)도 있었지만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벼슬길에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명문가 서자출신들과 어울려 여주의 소양강 가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스스로 자신들을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자처하고 지내며 당대의 명사였던 허균과도 교유하였다. 그러다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그들 일당이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가 역모로 몰려 사형 당한 인물들이다.

 

좋은 시절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문득 술이 거나하여 소리 높이 노래를 불렀고, 다니다가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만나게 되면 흥얼거리며 바라보느라고 집에 돌아갈 줄도 몰랐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추워서 떠는 사람을 만나면 옷을 벗어 입혀 주곤 하였는데, 속된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헐뜯기만 하고 돌보지는 않았다.
일찍이 세도 있는 정승이 불러다가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흰 비단을 마련해 주고 술을 잘 대접하였다. 그러자 이정은 일부러 취한 척하고 누웠다가 한참 만에 일어나, 솟을대문으로 소 두 바리에 화물(貨物)을 가득 실리고 두 사람이 몰고 들어오는 모습 한 폭을 그려 놓고는 붓을 동댕이치고 가버렸다. 그 재상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쫓기어 평양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의 아름다움을 못내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끝내 거기서 죽고 말았다. 임시로 선연동(嬋姸洞)에 매장(埋葬)하였다.

나는, 소탈하고 영특하되 행검(行檢)이 적은 것이 서로 동조(同調)되므로, 나이고 벼슬이고 따지지 않고 가장 깊이 서로 사랑해 왔는데,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문득 유명(幽明)을 달리하였다. 아, 슬프다.
그가 선(禪)을 이야기할 때에, 현묘한 도리를 핵실하여 내 마음을 맑게 일깨워 주던 것을 늘 생각하건대, 그것은 신선과 부처의 진리에서 터득한 것이리라. 문득 그것을 위해 먹을 것도 폐하였으니, 아, 금신(金身)의 현몽(現夢)이 아니었던들 어찌 이런 사람이 태어났을 것인가? 그 또한 기이한 일이다. 드디어 글을 지어 슬퍼하노라.

 

허균이 이처럼 죽음을 슬퍼했던 이정의 그림들은 원숙한 솜씨와 세련된 화격(畵格)을 보여 준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화의(畵意)는 전통주의적이었지만 화풍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련의 산수도들은 전통적인 안견파(安堅派) 화풍과 당시에 유행했던 절파 화풍(浙派畵風)이 절충된 그림들로 소개되고 있다. 확 트인 공간의 표현이라는 안견파 화풍의 특징과 등장인물을 위한 배경으로서의 거칠게 표현된 산수라는 절파화풍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전이정필산수도(傳李禎筆山水圖), 지본수묵, 19.1 x 25.5cm, 국립중앙박물관]

 

허균은 아래의 시로 이정의 죽음을 추도하는 <이정애사(李楨哀辭)>의 끝을 맺었다.

 

嗚呼懶翁兮   아 나옹이여!
命何其短      그 명이 어이 그리 짧은고?
不朽者存兮   그러나 삭지 않을 것 남아 있거니
余其奚歎      내 어찌 서글퍼하리.
嗣宗之放兮   사종(嗣宗)의 호방함에
子敬之誕      자경(子敬)의 허탄(虛誕)함과
井丹之潔兮   정단(井丹)의 청고(淸高)함이며
長康之癡      장강(長康)의 어리석음이라.
抱此姱節兮   이 모든 아름다운 장점 아울러 지니고서
去而何之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余不諧俗兮   내 속세에 얼리지 못하여
爲世之畸      세상의 쭉정이 되었을 제
子獨與我同調兮 자네만이 나와 뜻이 맞아
早締交而莫逆 일찍이 벗을 맺어 단짝이 되었네.
般紛紛衆詈而群訶兮 사람마다 시끄럽게 모두들 헐뜯고 나무라니
哀余行之安適    어디로 갈까 슬프도다 이내몸.
獨携子而歸來兮 그대만 이끌고 돌아와서
思自放於山之中 산중에나 숨어 살까 생각했네.
塵容容而緇素兮 티끌이 날아서 흰 옷을 더럽힘이여
蘭芷悴兮秋風    난초 지초는 가을바람에 여위었네.
恐年歲之將晏兮 나이도 장차 저물어 가니
期速駕而徂東    빨리 멍에 지워 동으로 가려고 기약했지만
孰云玉樓之催召兮 누가 알았으랴 옥루(玉樓)에서 빨리 데려갈 것을.
曾莫戀夫人寰    일찍이 인간 세상에 연연치 않아
邈飆馭之難挽兮 아득히 회오리바람 타고 가나니 붙잡기 어려워라.
杳五雲於蓬山    봉래산에 오색구름만 아득한데
聽玉簫之縹緲兮 아련히 옥퉁소 소리 들음이여.
渙余涕兮闌干    눈물이 줄줄 흐르누나.
悲此身之孰儔依兮 서러워라 이 몸 그 누굴 의지할까
痛知音之已隔    원통하다 지기는 이미 선계(仙界)에 갔네.
桂樹兮寒巖       계수나무여 차가운 뫼라면
秋花兮幽谷       가을꽃이여 그윽한 골짜기로다.
誰同歸兮逍遙    누구랑 같이 갈거나. 서성이노라.
弔孤影兮憯惻    외로운 내 그림자 슬퍼하노니 섧기도 하여라.
瑤潭淨兮皎潔    요담(瑤潭)은 맑아라. 깨끗하기 그지없고
月冏冏兮舒光    달빛은 밝아라. 온 누리를 비추네.
怳然睹子之風神兮 아련히 그대 모습 봄이여
聆高詠其五章    오장(五章)을 소리 높여 읊조림 듣는 듯하구나.
嗚呼千秋萬歲兮何終極 아 천추만세토록 어찌 다하랴
懷伊人兮不可忘 그대 그리는 마음 잊을 수 없으리.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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