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심사정필산수도

從心所欲 2022. 2. 8. 17:52

조선시대에 이름을 얻었던 화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양반 신분으로 취미삼아 그린을 그림 이들과 전문 화원이다. 공재 윤두서와 관아재 조영석이 전자에 속하고 정선, 김홍도, 신윤복은 모두 전문 화원들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에서 벗어나 양반 신분이면서도 그림을 천직처럼 여기며 살아가야했던 인물이 있었다.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 ~ 1769)이다.

 

심사정의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냈고 그 증조부의 형은 효종의 사위였으니 증조부대에만 해도 심사정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심익창(沈益昌)이 경종 때에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시해를 도모한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사사되면서 심사정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심사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역적 집안의 자손이라는 굴레를 지고 살아야 했다. 과거를 치를 수도 없고 관직에 나아갈 기회는 더욱 없어진 처지의 심사정은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친가와 외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공부했고 이후 일생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심사정의 7촌 손자가 지은 <현재거사묘지명(玄齋居士墓誌銘)>에는 그의 일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있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년 동안 걱정으로 지새며 낙이라곤 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 가운데서도 하루도 붓을 쥐지 않는 날이 없었다. 몸이 불편하여 보기 딱할 때에도 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 받는 쓰라림이나 모욕 받는 부끄러움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림 솜씨는 당대에도 이미 ‘나라 안에서 제일[國中第一]’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역적 가문의 후손이라는 멍에 때문에 그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달팠다. 그의 그림에 화평을 적는 일조차 사람들이 기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40이 넘은 1748년에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된 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역적의 후손이 어진 제작에 참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로 인해 5일 만에 물러나야만 했다.

 

강세황, 허필 등과 안산에서 어울렸던 아버지 이용휴를 따라 심사정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을 이가환은 “성품이 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당대의 그림에 있어 진실로 제일인자로 불리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았다. 굶주려 세상을 떠나니 슬프다”라고 심사정을 회고하였다. <현재거사묘지명>에는 “현재거사가 이미 세상을 떠났건만 집이 가난하여 시신을 염하지도 못했다”는 글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불우했을지는 후세가 다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표암 강세황은 그를 이해하고 감싸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강세황은 심사정과 가까이 지내며 심사정의 그림에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표암 강세황은 <현재화첩(玄齋畵帖)>의 발문에 심사정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현재는 석전 심주(沈周)로부터 시작하여 그림 배우기를 시작하여 처음에는 마피(麻披)의 추법을 쓰고 혹은 미가의 대혼점도 하다가 중년에야 비로소 대부벽식(大斧劈式) 준법(皴法)을 썼다.”

 

심사정이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皴法)을 구사하고,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다가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皴)을 즐겨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강세황의 글과 지금 전하는 작품들을 통하여 심사정은 그림에 입문하여 화법을 익히는 수련기인 초기에는 주로 남종화법을 익혔고, 40세가 넘어선 중기에는 그동안 익힌 남종화법을 북종화법의 하나인 절파화풍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했으며, 50세가 넘어서부터는 자신만의 화풍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는 화사에 대하여 무소불능이나 더욱 화훼 초충을 잘 그렸고 그 다음이 영모, 그 다음이 산수화이다. 더욱 산수화에 애를 많이 썼다.”

 

강세황은 심사정이 화훼와 조충을 가장 잘 그렸다고 했으나 지금 전하는 심수정의 작품은 산수화가 가장 많다. 강세황은 심사정의 그림이 ‘호방하고 농숙한 면에서는 겸재에 못 미칠지 모르나 굳세고 힘찬 것과 고아함에서는 오히려 낫다’고 평했다.

 

전하는 심사정의 산수화에는 각기 다른 여러 특징들이 보인다. 그래서 ‘화파나 화법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의 어떤 화가보다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화풍을 깊이 이해하고 폭넓게 수용하여 자신만의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보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는 7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미년 가을에 그렸다는 관지가 있다. 계미년은 1763년, 즉 심사정이 57세 때로, 만년의 작품이다.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 견본수묵, 142.4 x 46.4cm,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의 미술가(안휘준 외, 2006,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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