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심사정 - 옛 법을 따르다.

從心所欲 2022. 2. 18. 13:35

창작력을 중시하는 지금의 예술관과는 달리 옛 동양회화에서는 남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가의 좋은 그림을 모사(模寫)하면서 그 정신과 기법을 체득하는 것이 그림 제작의 중요한 요체로 장려되었다.

그래서 지금 전하는 옛 그림들에는 누구누구의 그림이나 필법을 ‘방(倣)’했다는 화제가 적힌 그림들이 많다. ‘방(倣)’은 특정한 화가의 화풍이나 사의(寫意)를 따랐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에는 주로 원(元)나라 말기의 산수화가 예찬(倪瓚)과 명나라의 문인화가였던 심주(沈周), 그리고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동기창(董其昌)을 방(倣)한 예가 많다. 이들은 모두 남종문인화 계열의 화가들이었다.

 

전하는 심사정의 작품 중에 《방고산수첩(倣古山水帖)》이 있다. 어느 특정화가가 아닌 ‘옛 것[古]’을 방했다고 했다. 옛 화가들의 기법을 따랐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래서 이 화첩의 그림들을 설명하는 글에는 북송의 문인화가인 이공린(李公麟), 북송 말기의 화원화가 이당(頤唐), 남송 사대가의 하나인 유송년(劉松年), 남송 후반의 원체화를 대표하는 하규, 원말 사대가의 하나인 왕몽(王蒙), 명(明)나라 중기의 직업화가 구영(仇英) 등, 역대 중국 화가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북송원체화(北宋院體畫)의 영향도 언급되고 있다.

원체화(院體畫)는 중국 궁정화원에서 채용했던 독특한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을 가리킨다. 물론 그 양식은 왕조마다 왕실의 취향에 따라 바뀌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사실적이면서 정교하고 세밀하며, 전통적인 격(格)과 법(法)을 존중하였고, 장식적 효과를 중시한다는 특색을 갖는다. 북송원체화는 북송시대의 궁정화원 그림양식이다. 화조화에서는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화려함이 특징이지만 산수화에서는 자연의 대관(大觀)을 파악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대관적 산수화라고도 불리는데 대관(大觀)이란 크게 본다는 의미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을 통하여 산 전체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고산수첩(倣古山水帖)》의 그림들은 심사정이 같은 해에 그렸던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의 그림들과 확연히 다를 뿐 아니라, 첩 속의 그림들끼리도 각기 화풍이 다르다. ‘조선의 어떤 화가들보다 다양한 화풍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심사정에 대한 평가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방고산수첩 中 <기려심춘(騎驢尋春)>,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나귀를 타고 봄을 찾아 나서다.]

 

[방고산수첩 중 <계거상락(溪居山樂)>,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냇가에 살며 산을 즐기다.]

 

[방고산수첩 中 <연강운산(煙江雲山)>,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안개 낀 강과 구름 덮인 산.]

 

[방고산수첩 中 <장강첩장(長江疊嶂)>,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긴 강과 첩첩 산봉우리.]

 

[방고산수첩 中 <백운출수(白雲出岫)>,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흰 구름 속에 드러난 산의 정상.]

 

[방고산수첩 中 <급탄예선(急灘曳船)>,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빠른 여울에서 배를 끌다.]

 

[방고산수첩 中 <강산무진(江山無盡)>,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강과 산은 끝이 없다.]

 

[방고산수첩 中 <설제화정(雪霽和靜)>, 지본담채, 37.3 x 61.3cm, 간송미술관 ㅣ 눈 그친 후의 고요함.]

 

첩의 마지막 그림인 <설제화정(雪霽和靜)>에 ‘계미납월방고인각법(癸未臘月倣古人各法)’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계미년(癸未年)은 영조 39년인 1763년으로 심사정이 57세 때이다. 납월(臘月)은 음력 12월이니까 그 해 가을에 《심사정필산수도(沈師正筆山水圖)》를 그리고 몇 달 후에 이 《방고산수첩(倣古山水帖)》을 완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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