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8 - 불씨잡변 불씨선교지변

從心所欲 2022. 2. 17. 13:55

불씨의 선과 교의 변[佛氏禪敎之辨]

 

불씨의 설이 그 최초에는 인연(因緣)과 과보(果報)를 논(論)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는 데 불과한지라, 비록 허무를 종(宗)으로 삼아 인사(人事)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선을 행하면 복을 얻고 악을 행하면 화를 얻는다는 설은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며, 몸가짐을 계율(戒律)에 맞춤으로써 방사(放肆)해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였었다. 그러므로 인륜은 비록 저버렸으면서도 의리를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다.

▶방사(放肆) :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것.

 

그런데 달마(達摩)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그의 설이 얕고 비루(卑陋)하여 고명(高明)한 선비들을 현혹시킬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서 이에 말하기를,

“문자에도 의존하지 않고 언어의 길도 끊어졌다.”

하고는,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자기 본성만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외쳤다.

그 말이 한번 나와 첩경(捷徑)이 문득 열림으로써, 그들의 무리가 서로 돌려가며 논술하였으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을 수 없으며 악(惡)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끊을 수도 없다.”

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도를 끊었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음(淫)과 노(怒)와 치(癡)도 모두 범행(梵行)이다.”

하니, 이는 계율(戒律)에 맞추어 몸 가지는 도를 잃어버렸거늘, 그럼에도 스스로 세속(世俗)의 일정한 형(型)에서 벗어나 속박을 풀어버린다 하여 오만하게 예법 밖으로 나가 제멋대로 방사(放肆)하기를 미친 것처럼 급급하니 사람의 도리라고는 조금도 없는지라, 이른바 의리라는 것도 이에 이르러 모두 상실했다 하겠다.

▶범행(梵行) : 음욕(淫欲)을 끊는 깨끗한 수행.

 

주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은 이를 근심하여 다음의 시를 읊었다.

 

西方論緣業 서방세계는 연과 업을 논하여

卑卑喩群愚 비루하게도 뭇 어리석은 자들을 꾀는구나.

流傳世代久 흘러 전한 그 세대가 오래 됨에는

梯接凌空虛 사다리의 대임이 허공을 능가하도다.

顧盻指心性 이것저것 보고 모두 보며 심성을 가리켜

名言超有無 이름 짓기를 유무를 초월했다 말하네.

【안(按) : 정도전의 주】 본설에 대략 세 가지 순서가 있으니 처음에 재계(齋戒)가 있고 그 다음에 의학(義學)이고 선학(禪學)이다. 연(緣)의 이름은 열둘이 있으니 촉(觸)ㆍ애(愛)ㆍ수(受)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老)ㆍ사(死)ㆍ우(憂)ㆍ비(悲)ㆍ고(苦)ㆍ뇌(惱)이다. 업(業)의 이름은 셋이 있으니 신(身)ㆍ구(口)ㆍ의(意)이다. 심(心)과 성(性)을 가리킨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곧 불심이니, 나의 성(性)을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함이다. 유무를 초월했다는 것은, 유를 말하면 ‘색(色)은 곧 공이다.’ 하고, 무를 말하면 ‘공은 곧 색이다.’ 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捷徑一以開 빠른 길이 한번 열리자

靡然世爭趨 바람에 휩쓸리듯 온 세상이 쏠리는데

號空不踐實 공만을 부르짖고 실은 밟지 않고

躓彼榛棘塗 저 가시덤불 길에 갈팡질팡하는구나.

誰哉繼三聖 그 누가 삼성을 계승하여

爲我焚其書 우리들을 위해 그 글을 불사를 건가.

【안(按)】 세 성인[三聖]은 우(禹)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

 

주문공께서 이처럼 깊이 근심하신지라 나 또한 이를 위하여 서글퍼 재삼 탄식하는 바이다.

 

[보덕사 사성전 후불탱화(報德寺 四聖殿 後佛幀畵), 견본채색, 월정사 성보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