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9 - 불씨잡변 유석동이지변

從心所欲 2022. 2. 21. 11:35

유가와 불가의 같고 다름의 변[儒釋同異之辨]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유가(儒家)와 석씨(釋氏)의 도(道)는 문자의 구절(句節) 구절은 같으나 일[事]의 내용은 다르다.”

하였다.

이제 또 이로써 널리 미루어 보면, 우리(유가(儒家))가 허(虛)라고 하고, 저들(불가(佛家))도 허라 하고, 우리가 적(寂)이라 하고 저들도 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허(虛)는 허하되 있는 것이요, 저들의 허는 허하여 없는 것이며, 우리의 적(寂)은 적하되 느끼는 것이요, 저들의 적은 적하여 그만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知)와 행(行)을 말하고, 저들은 오(悟)와 수(修)를 말한다. 우리의 지는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오(悟)는 이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의 행(行)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하여 잘못되거나 빠뜨림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修)란 만물을 끊어 버려 내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고, 저들은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고 하니,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원래 이 이(理)가 있어 바야흐로 이(理)가 정(靜)할 때에는 지극히 고요하여 이 이치의 체(體 : 본체)가 갖추어지고, 이(理)가 동(動)하게 되어서는 느끼고 통하여 이 이치의 용(用 : 작용)을 행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도 감(感)하여 천하의 모든 연고[故]를 드디어 통한다.”

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만법(萬法)을 낳는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본래 이 법이 없는 것인데 외계(外界)를 대한 후에 법이 생긴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법(法)이 정(靜)할 때에는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없고, 법(法)이 동(動)하게 되어서는 만나는 바의 경계(境界)에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그가 말하기를,

“주착(住著)하는 바가 없음에 응하여 그 마음이 생긴다.”

【안(按) : 정도전의 주】 이 말은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온 것으로, 주착하는 바가 없음에 응한다는 것은 안팎이 전연 없으므로 가운데가 허하여 물(物)이 없고, 선악 시비를 가슴 가운데에 두지 않아서 그 마음에 생기는 것은 주착함이 없는 마음으로 밖에 응하여 물(物)에 누(累)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사씨(謝氏)가 《논어》의 ‘무적무막(無適無莫)’이란 글을 해석할 때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一切)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의 법도 사라진다.”

는 것이 이것이다.

【안(按)】 기신론(起信論)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理)가 진실로 있다고 하는데, 저들은 법(法)이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하니, 어쩌면 그 말은 같은데 일은 이렇게도 다른가?

우리는,

“내가 있어서 만 가지 변화를 수작(酬作)한다.”

하는데, 저들은,

“나를 떠나서 일체에 수순(隨順)한다.”

하니 그 말이 같은 것 같으나, 그러나 이른바 ‘만 가지 변화를 수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올 때 마음이 그것에 응하여 각각 그 마땅한 법칙에 따라 알맞게 처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아들 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효자(孝子)가 되게 하고 적자(賊子)가 되지 못하게 하며, 여기에 신하 된 사람이 있으면 충신(忠臣)이 되게 하고 난신(亂臣)이 되지 못하게 하며, 물(物)에 이르러서도 소[牛]는 밭을 갈고 사람을 떠받지는 못하게 하며, 말은 물건을 싣되 사람을 물지는 못하게 하며, 호랑이는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물지 못하게 하나니, 대개 그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는 이치에 인하여 처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석씨(釋氏)의 이른바 ‘일체에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무릇 남의 아들된 사람의 경우에, 효자되는 사람은 스스로 효자되고 적자(賊子)되는 사람은 스스로 적자되며, 남의 신하된 사람의 경우는, 충성하는 사람은 스스로 충신되고, 난(亂)하는 사람은 스스로 난신(亂臣)되며, 소나 말이 밭 갈고 물건을 싣고 하는 것이 스스로 갈고 싣고 하며, 사람을 떠받고 물고 하는 것도 스스로 떠받고 물고 하여, 스스로 하는 대로 들어 줄 뿐이요, 내 마음을 그 사이에 씀은 없다.

불씨의 학이 이와 같은지라 저들 스스로가 물(物)을 부리기는 하되 물에게 부림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일 돈 한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할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즉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ㆍ보상(輔相)의 직책을 준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설이 반복되어 두서(頭緖)가 비록 많으나, 요컨대 우리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마음과 이치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공(空)함으로써 이치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공(空)하나 만물의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이고 석씨는 간단(間斷)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우리와 저들의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 다만 사람의 보는 것이 옳게 보았느냐 잘못 보았느냐에 있을 뿐이다.

석씨는 그 마음을 체험한 경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四大身中誰是主 네 원소로 된 몸[四大身] 가운데 어느 것을 주(主)라 하고

六根塵裏孰爲精 여섯 감관의 번뇌[六根塵] 속에 무엇을 정(精)이라 할까.

【안(按)】 〈대(大)는 그 이상 더 큰 것이 없다는 뜻으로 번역하여 원소라 함.〉지(地 : 뼈), 수(水 : 피ㆍ고름), 화(火 : 온기), 풍(風 : 호흡) 이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으나 그 네 가지 원소를 따로 떼어 내면 본래 주(主)가 없는 것이고,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입에 대한 맛과 피부에 대한 감촉이 여섯 가지[六根]의 번뇌인데 그것이 서로 대경(對境)이 되어 생기지만, 그 6근(六根)을 따로 떼어 내면 본래 정(精)이 없으므로, 마치 거울에 비치는 형상을 있다고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黑漫漫地開眸看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라.

終日聞聲不見形 온종일 소리는 들리어도 형체를 볼 수 없다네.

【안(按)】 지혜로써 용(用)에 비추면 비록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아도 그 캄캄한 속에 광명이 있나니, 마치 거울 빛이 어두움 속에서도 광명이 있는 것과 같음이다.

 

하였고, 우리 유가에선 마음의 체험한 경지를 말하기를,

 

謂有寧有跡 있다고 한들 어찌 자취가 있으며

謂無復何存 없다고 하면 다시 어찌 있으랴.

惟應酬酢際 오직 사물에 응하여 수작할 즈음에

特達見本根 다만 통달하여 본근을 볼 뿐이다.

하였다.

【안(按)】 이는 주자의 시(詩)이었다.

 

또 도심(道心)이란 본래 형체가 없거늘 소리가 있겠는가? 역시 이 이치를 마음에 간직하여 수작의 본근을 삼아야 하리니, 배우는 자가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이 마음의 발현되는 곳에 나아가서 실제로 체험하고 궁구(窮究)해 본다면, 그들과 우리와의 같은 점과 다른 점과 옳게 본 것과 잘못 본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朱子)의 설로써 거듭 말하건대, 마음이 비록 한 몸의 주(主)가 되지만 그 체(體)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할 수 있고, 이치가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용(用)의 미묘(微妙)함은 실로 사람의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니, 처음부터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精)하고 조(粗)함임을 논(論)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혹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간직함이 없다면 어둡고 뒤섞이어 모든 이치의 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요, 모든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여 궁구함이 없으면, 막히어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하지 못하리니 이것은 그 이론으로나 사세로 보아 서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풀되, 사람들에게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제 스스로가 알아 단정(端正)하고 엄숙(嚴肅)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에 이 마음을 간직하여 이 이치를 궁구하는 근본으로 삼게 하며, 사람들에게 모든 이치의 묘함이 있는 줄을 알아,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그 즈음에 궁구하여 마음을 극진히 하는 공(功)을 이룩하되, 크고 작음을 서로 흐뭇하게 하고 동(動)하거나 정(靜)함을 함께 길러갈 뿐, 처음부터 그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하고 조함임을 택하지 않게 하나니,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쌓아 활연(豁然)히 관통하는 데에 이르면 역시 혼연히 하나가 되는 줄을 알아서 과연 안이고 밖이고 정하고 조함이 없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꼭 이러한 것을 천근(淺近)하고 지리(支離)하게 여겨 형체를 숨기고 그림자를 감추려 하면서 따로이 일종의 궁벽하고 황홀하고 까다롭고 앞뒤가 막힌 논리를 만들어, 힘써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막연히 그 마음을 문자와 언어 밖에 두게 하여 말하기를,

“도(道)는 반드시 이같이 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

하니 이것은 근세의 불씨의 학의 피ㆍ음ㆍ둔ㆍ사(詖淫遁邪)가 더욱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와서 옛 사람의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참된 학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그 또한 잘못이다. 주자의 말이 이 모든 것을 되풀이하고 변론하여 친절하게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이에 잠심(潜心)하여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보현사 십육나한탱화(普賢寺十六羅漢幀畵) 1, 견본채색, 월정사 성보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