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21 - 불씨잡변 사불득화

從心所欲 2022. 3. 2. 14:34

불씨를 섬겨 화를 얻음[事佛得禍] 

 

양무제(梁武帝)는 중대통(中大通) 원년(元年) 9월에 동태사(同泰寺)에 나아가 사부(四部) 대중을 모아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어복(御服)을 벗고 법의(法衣)를 걸친 후 청정대사(淸淨大捨)를 행하니 모든 신하들이 돈 1억만(一億萬)을 가지고 삼보(三寶)앞에 빌고 황제의 몸을 굽혀 속죄하는데, 중들은 그대로 절을 받으면서 말 한마디 없었고, 임금은 궁궐로 돌아왔다. 무제(武帝)가 천감(天監) 연간으로부터 석씨(釋氏)의 법을 써서 오래도록 재계하여 고기를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니만 먹는 것도 나물국에 거친 밥뿐이요, 탑을 많이 쌓아 공사(公私)간에 비용을 많이 소비하였다.

▶중대통(中大通) : 중국 남북조 시대의 양(梁)나라 초대황제인 양무제의 연호로 원년은 529년.
▶무차대회(無遮大會) : 국가가 시주(施主)가 되어 궁중에서 승려나 속인을 구별하지 않고, 또 남녀와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고 다 같이 평등하게 널리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며 때로 물품까지 나누어 주는 법회.
▶청정대사(淸淨大捨) : 허물이나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깨끗케 하는 의식.
▶삼보(三寶) : 불(佛)ㆍ법(法)ㆍ승(僧).
▶천감(天監) : 양무제의 처음 연호(502년 - 519년).

 

이때에 왕후(王侯)와 그의 자제들이 교만하고 음란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임금은 늙어서 정치에 권태를 느끼고 또 부처의 계율에만 오로지 정신을 써서, 매양 중죄(重罪)를 처단할 때에는 종일토록 괴로워하였고, 혹은 반역을 꾀하는 일이 발각되어도 역시 울면서 용서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왕후(王侯)들은 더욱 횡포(橫暴)하여 혹은 대낮에 도시의 거리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혹은 어두운 밤에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기도 하며, 죄가 있어 망명하기 위해 공주(公主)의 집에 숨어 있으면 관리들이 감히 수사하여 잡지를 못하였으니, 임금은 그 폐단을 잘 알면서도 자애(慈愛)에 빠져 금하지 못하였다.

 

중대동(中大同) 원년 3월 경술(庚戌)에 임금이 동태사(同泰寺)에 나아가 절집에 머물면서 《삼혜경(三慧經)》을 강(講)하기 시작하여 4월 병술(丙戌)에야 강을 끝마쳤다.

▶중대동(中大同) : 양무제의 또 다른 연호(546년 ~ 547년).

그런데 이날 밤에 동태사(同泰寺)의 탑(塔)이 화재를 당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마귀 때문이니, 마땅히 불사(佛事)를 크게 하리라.”

하고,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도(道)가 높을수록 마귀가 성(盛)하고, 선(善)을 행함에는 장애가 생기나니, 마땅히 토목공사를 크게 하여 전날의 배로 증가시키리라.”

하고, 드디어 12층탑을 기공하여 완성되어 갈 무렵에 후경(侯景)의 난(亂)을 만나 중지되었다.

대성(臺城)이 함락됨에 이르러서 임금을 동태사에 가두어 두었는데, 임금이 목이 말라 그 절 중에게 꿀물을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

▶후경(侯景)의 난(亂) : 남북조(南北朝) 때 삭방(朔方)사람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建康)을 포위하고 대성(臺城)을 함락시켰다. 무제(武帝)는 핍박을 입고 굶어 죽었다.
▶대성(臺城) : 양나라의 서울.

 

진서산(眞西山)이 말하기를,

▶진서산(眞西山) : 송(宋)의 학자 진덕수(眞德秀). 주희(朱熹)의 문하생으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었다.

 

“위진(魏晉) 이후의 임금 가운데에 부처 섬기기를 양무제(梁武帝)만큼 성하게 한 사람은 없었다. 대저 만승(萬乘)의 존귀(尊貴)함으로서 스스로 그 몸을 버려 부처의 시역(厮役) 노릇을 했으니 그 비열하고 아첨함이 극심하다 할 것이다. 채소와 면식(麵食)으로 종묘의 제사지내는 생뢰(牲牢)와 바꾸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명도(冥道)에 누(累)됨이 있을까 두려워함이요, 직관(織官)이 비단에 무늬를 놓는데, 사람이나 금수(禽獸)의 형상을 놓는 것까지를 금하였으니, 그것은 가위로 재단할 때에 인(仁)ㆍ서(恕)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려워함이며, 신하가 반역을 꾀하여도 용서하여 죽이지 않고, 백주에 도둑질을 자행하여도 차마 금하지 못했으니, 이 모두가 부처의 계율을 미루어 넓히려고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대개 논(論)하건대,

신선(神仙)을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이요, 부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양나라 무제가 얻었을 것인데 두 임금이 얻지 못하였음을 볼 때 그 구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비록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오랑캐의 허황한 교(敎)로는 중국을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고 산림(山林)에 도피해 사는 행동으로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구할 수 없는 것이랴! 한무제는 신선을 탐하다가 마침내 국고(國庫)가 텅 비도록 소모하는 화(禍)를 입고, 양무제는 부처에게 아첨하다가 마침내 위망(危亡)의 액(厄)을 초래하였은즉, 탐하고 아첨하여도 도움됨이 없는 것이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또 그 몸을 버려가면서 부처를 섬기는 것은 어찌 진세(塵世)의 시끄러움이 싫어 공적(空寂)함을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과연 저 가유(迦維)의 맏아들[嫡嗣]처럼 임금 자리를 헌신짝같이 보고 옷을 걷어붙이고 갈 수 있었다면 거의 참으로 부처를 배우는 사람이라 하겠지만, 특히 양무제는 이미 찬탈(簒奪)하고 시역(弑逆)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또 공벌(攻伐)로써 남의 땅을 침범했으며, 급기야 늘그막에 그의 태자(太子) 소통(蕭統) 같은 자효(慈孝)한 아들을 끝내 의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탐심에 연연하기가 이러하였으니, 또 어찌 참으로 그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옷을 바꿔 입고 수도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부도(浮屠)의 복을 맞이할 수 있다 하겠으나, 돈을 바쳐 속죄하고 돌아와서는 천자(天子)의 귀함을 잃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부처에게 아첨한다기보다 사실은 부처를 속이는 것이라 하겠다.

▶가유(迦維) : 가비라위(迦毗羅衛). 석가가 탄생한 땅.

 

또 그 비단의 무늬는 실물이 아닌 데도, 오히려 차마 해치지 못하면서, 저 어리석은 백성의 목숨을 어찌 조수(鳥獸)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해마다 정벌하여 죽인 사람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산을 만들고 둑을 쌓아 적의 지경(地境)으로 물을 대어 수만 명의 적군을 물고기로 만들면서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비록 조그마한 인(仁)의 이름은 있으나 실은 크게 불인(不仁)한 것이다.

또 나라가 존립(存立)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강(綱)과 상(常)인데 무제(武帝)는 여러 아들에게 변방을 다 맡기면서 예의(禮儀)를 가르침이 없었으므로, 정덕(正德)은 효경(梟獍)의 자질로 처음에는 아버지를 버리고 적국으로 달아났다가 마침내는 적병을 이끌고 들어와 국가를 전복시켰으며, 윤(綸)이나 역(繹)은 혹은 큰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거나, 혹은 상유(上游)에 진(陣)을 치고 있었는데, 군부(君父)가 난을 당하고 있었건만 ‘피를 뿌리고 분연히 싸울 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형제끼리 서로 원수가 되고, 숙질 사이에 서로 싸워 인륜의 악이 극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무제(武帝)의 배운 바가 석씨(釋氏)였기 때문이다.

▶효경(梟獍) : 불효라는 뜻. 효(梟)는 자라서 어미를 잡아먹고, 경(獍)은 자라서 아비를 잡아먹으므로 불효하는 사람을 효경이라고 한다.
▶윤(綸)이나 역(繹) : 각기 무제(武帝)의 무여섯째 아들과 일곱째 아들.

 

천륜(天倫)을 가합(假合)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아, 30~40년 동안에 풍속은 모두 무너지고 강상(綱常)은 땅에 떨어졌으니 이같이 극에 이르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 하여금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을 스승으로 삼아 방외(方外)의 교(敎)를 섞지 않음은 물론, 반드시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반드시 예법을 숭상하고, 반드시 형정(刑政)을 밝히게 했다면 어찌 이 같음이 있으랴?”

하였다.

▶삼왕(三王) : 하(夏)나라 우(禹)와, 은나라 탕(湯), 주(周)나라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

 

[불화, 조선민화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