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7 - 불씨잡변 불씨걸식지변

從心所欲 2022. 2. 11. 18:05

불씨 걸식의 변[佛氏乞食之辨]

 

사람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큰 일이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는가 하면, 그렇다고 해서 하루도 구차하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먹지 않으면 목숨을 해칠 것이요, 구차스럽게 먹으면 의리를 해칠 것이다. 그러므로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에 식(食)과 화(貨)를 앞에 두었고, 백성에게 오교(五敎)를 중하게 하되, 식을 처음에 두었으며, 자공(子貢)이 정사[政]에 관하여 물으니 공자(孔子)도 대답하기를,

“먹을 것부터 족(足)하게 하라.”

하였다.

▶홍범(洪範) : 홍(洪)은 크다, 범(範)은 법(法)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큰 규범(規範)’.
▶팔정(八政) :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여덟 가지 정사(政事). 즉 식ㆍ화(食貸 : 민생(民生)문제)ㆍ사(祀 : 제사)ㆍ사공(司空 : 농지개간)ㆍ사도(司徒 : 교육)ㆍ사구(司寇 : 치안)ㆍ빈(賓 : 외교)ㆍ사(師 : 국방).[八政 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寇 七曰賓 八曰師]
▶오교(五敎) : 오상(五常), 즉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ㆍ붕우의 가르침.

 

이는 옛 성인들도 백성이 살아가는 데는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음을 잘 알았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두 이에 급급히 하여 농사를 장려하는가 하면 공물(貢物)과 세금 내는 제도를 두어 군사와 국가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고, 제사와 손님 접대에 공급하게 하고, 홀아비나 과부나 자식 없는 노인이나 고아를 먹여 살리게 함으로써 곤핍(困乏)과 기아(飢餓)의 탄식을 없게 하였으니 이것을 볼 때 성인이 백성을 염려하심이 원대하였던 것이다.

위로 천자와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먹고, 아래로 농부ㆍ공장(工匠)ㆍ상인들은 힘써 일함으로써 먹고, 그 중간인 선비는 집 안에서 효도하고 집 밖에서 공경하여 선왕의 도를 지켜 후학(後學)을 가르침으로써 먹었으니 이는 옛 성인들이 하루도 구차스럽게 먹고 살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직분(職分)이 있어 하늘의 양육을 받았으니 백성의 범죄를 방지함이 지극하였기 때문이다. 이 반열(班列)에 속하지 않은 자는 간사한 백성이라 하여 왕법으로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어느 때 세존(世尊)이 식사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鉢]를 가지고는 사위성(舍衛城)

에 들어가 그 성(城) 가운데에서 걸식(乞食)을 하였다.”

【안(按) : 정도전의 주】 사위는 파사국(波斯國 : 페르시아)의 이름이다.

하니, 대저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사람은 남녀가 같은 방에서 사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며, 인륜(人倫)의 밖으로 나가서 농사일을 버리고, 생생(生生)의 근본을 끊어 버리고는, 그런 도(道)로써 천하를 바꾸려고 하고 있으나, 참으로 그의 도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니, 과연 빌어먹을 사람인들 있겠는가? 또 천하의 음식이 없어질 것인데 빌어먹을 음식인들 있겠는가?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서역(西域) 왕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의 위(位)를 옳지 않다고 하여 받지 않았으니, 백성을 다스릴 자는 아니며, 남자가 밭가는 것이나 여자가 베 짜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여 버렸으니, 힘써 일한 것이 뭐가 있는가? 부자(父子)도 없고, 군신(君臣)도 부부(夫婦)도 없으니, 또한 선왕(先王)의 도를 지키는 자도 아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에 쌀 한 톨을 먹을지라도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니, 진실로 그 도(道)와 같이 하려면 지렁이[蚯蚓]처럼 아예 먹지 않은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니, 어찌 빌어서 먹는단 말인가? 더구나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빌어먹는 것은 옳단 말인가?

불씨의 그 의(義)도 없고 이(理)도 없는 말들이 책만 펴면 이내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 논하여 변박하는 바이다.

 

불씨가 그 최초에는 걸식(乞食)하면서 먹고 살 뿐이어서, 군자(君子)는 이것을 의(義)로써 책망하여 조금도 용납함이 없었는데도, 오늘날에는 저들이 화려한 전당(殿堂)과 큰 집에 사치스러운 옷과 좋은 음식으로 편안히 앉아서 향락하기를 왕자(王子) 받듦 같이 하고, 넓은 전원(田園)과 많은 노복을 두어 문서가 구름처럼 많아 공문서를 능가하고, 분주하게 공급하기는 공무(公務)보다도 엄하게 하니, 그의 도(道)에 이른바 번뇌를 끊고 세간에서 떠나 청정(淸淨)하고 욕심 없이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가만히 앉아서 옷과 음식을 소비할 뿐만 아니라, 좋은 불사(佛事)라고 거짓 칭탁(稱托)하여 갖가지 공양에 음식이 낭자(狼藉)하고 비단을 찢어 불전(佛殿)을 장엄하게 꾸미니, 대개 평민 열 집의 재산을 하루아침에 온통 소비한다.

아아! 의리를 저버려 이미 인륜의 해충(害虫)이 되었고, 하늘이 내어주신 물건을 함부로 쓰고 아까운 줄을 모르니 이는 실로 천지에 큰 좀벌레로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위로는 예(禮)로써 그 거짓을 막을 만한 이가 없고, 아래로는 학으로써 그 가림[蔽]을 열어 줄 만한 이가 없으니, 혼자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일(精一)하여 스스로를 믿고 남보다 뛰어난 재주 있는 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 사이에 바로 서서 그와 더불어 옳고 그름을 비교하고 득실을 따질 수 있으랴?”

하였으니,

아아! 선생의 깊이 탄식한 것이 어찌 우연이리요, 어찌 우연이리요.

 

[신흥사 아미타 후불탱화(新興寺阿彌陀後佛幀畵), 견본채색, 월정사 성보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