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4 - 불씨잡변 불씨진가지변

從心所欲 2022. 2. 1. 10:06

불씨 진가의 변[佛氏眞假之辨]

 

불씨는 마음과 성(性)을 진상(眞常)이라 하고 천지만물은 가합(假合)된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이르기를,

“일체(一切) 중생(衆生)과 가지가지의 환화(幻化)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왔으니, 그것은 마치 허공에 나타나는 꽃[空華]이나, 물에 비친 달[第二月]과 같다.”

하고, 

【안(按)】 이 글은 《원각경(圓覺經)》에서 나온 말이다. “중생들의 업식(業識)으로서는 자기 몸속에 바로 여래의 원각묘심이 있는 줄을 모른다. 만일 지혜로써 작용에 비춘다면 법계(法界)의 진실성이 없는 것은 허공에 나타나는 꽃과 같고, 중생들의 허망한 모양은 물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묘심(妙心)은 본래의 달이고 물에 비친 달은 달의 그림자인 것이다.”고 되어 있다.

 

또 말하기를,

“공(空)이 대각(大覺) 가운데에서 생겨나는 것은, 바다에 물거품이 하나 일어나는 것과 같아, 유루(有漏)와 미진국(微塵國)이 모두 공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하였다. 

【안(按)】 이 글은 《능엄경》에서 나왔다. “대각해(大覺海) 가운데는 본래 공(空)도 유(有)도 없는 것인데, 미혹(迷惑)의 바람이 고동(鼓動)하면 공의 물거품이 망령되이 발하여 모든 유(有)가 생겨나고 미혹의 바람이 자게 되면 공의 물거품도 없어지기 마련이라. 그러므로 거기에 의지해 생기는 모든 유는 다 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대각이 원융(圓融)해야만 다시 원묘(元妙)로 돌아간다.”고 되어 있다.

▶유루(有漏) : ‘누(漏)’는 번뇌의 또 다른 명칭으로, 유루(有漏)는 삼계의 번뇌(煩惱)를 말한다.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일체(一切)는 모두 다 번뇌를 함유하므로 유루(有漏)라고 한다.
▶미진국(微塵國) : 능엄경에서 말하는 세계미진(世界微塵).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 오직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모든 인과와 세계미진이 마음으로 인해 성체(成體)한다”는 구절이 있다.

 

불씨의 말에 그 폐해가 많으나 그러나 인륜(人倫)을 끊어 버리고도 조금도 기탄(忌憚)함이 없는 것이 이 병의 근원이니, 부득이 고쳐주지 않을 수 없다.

 

대개 천지만물이 있기 전에 필경 태극(太極)이 먼저 있어, 천지 만물의 이치가 그 가운데에 이미 혼연(渾然)하게 갖추어졌으리라. 그러므로

“태극이 양의(兩儀)를 생(生)하고 양의(兩儀)가 사상(四象)을 생(生)한다.”

고 하였으니, 천만 가지 변화가 모두 이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마치 물에 근원이 있어 만 갈래로 흘러나감과 같고, 나무에 뿌리가 있어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는 것과 같아, 이것은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할 수도 없는 것이요, 또한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학자와 더불어 이야기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모든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것부터 이야기하리라.

불씨가 죽은 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다. 하늘이 땅 위를 높이 덮은 것이 이처럼 확실하고, 땅이 하늘 밑에 판판히 뻗은 것이 이같이 뚜렷하며, 사람과 만물이 그 사이에서 태어남이 이같이 찬란하며, 해와 달과 추위와 더위가 가고 옴이 이같이 정연하다.

이리하여 천체는 지극히 크나, 그 주위의 운전(運轉)하는 도수[度]나, 일월성신(日月星辰)의 거꾸로 가고 바로 가고 빨리 가고 느리게 가는 운행[行]은 비록 비바람 불고 어두운 저녁을 당하여도 능히 8척(尺)의 선기(璇璣)와 몇 촌(寸)의 옥형(玉衡)에 벗어날 수 없고, 햇수의 쌓임이 몇 억 년에 이르러도 24절기(節氣)의 고루 나뉨이나, 삭허(朔虛)ㆍ기영(氣盈)하는 그 여분(餘分)의 쌓임이 털끝같이 미세한 데 이르러서도 또한 승(乘)과 제(除)의 두 방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선기옥형(璇璣玉衡) : 선(璇)을 기(璣)로 하고 옥(玉)을 형(衡)으로 하여 천문(天文)을 살피는 용기(用器).
▶삭허(朔虛)ㆍ기영(氣盈) : 고대에 1년의 날 수를 정할 때 한 해의 변하지 않는 날 수를 360으로 잡고 여기에 해와 달이 운행하는 날 수를 계산하여 조정하였다. 이때 일행(日行)에서 날 수가 많은 것을 기영(氣盈)이라 하고, 월행(月行)에서 날 수가 적은 것을 삭허(朔虛)라 하는데, 음력에서 ‘윤(閏)’이란 개념은 이 기영과 삭허를 합한 결과이다.

 

맹자(孟子)의 이른바,

“하늘의 높음이나 성신(星辰)의 멂이라도, 진실로 그 연고를 구한다면 천년 후의 동지(冬至)도 앉아서 알 수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또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인가? 반드시 실(實)한 이치가 있어 그렇게 되도록 주장하는 것이리라.

 

또 가(假)라는 것은 잠시에 불과한 것으로 천만 년 오래 갈 수는 없는 것이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천만 사람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천지의 상구(常久)함이나 만물의 상생(常生)하는 것을 가(假)라고 하고 환(幻)이라고 하니 이는 어떻게 된 말인가?

아니, 불씨는 궁리(窮理)의 학이 없어 그 설을 구하여도 얻지 못함인가? 아니면 그 마음이 좁아 천지의 큼이나 만물의 많음을 그 안에 용납하지 못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지수(持守)의 요약(要約)만을 좋아하고 궁리의 번거로움이나 만변(萬變)에 수응(酬應)하는 수고로움을 싫어함인가?

 

장자(張子, 송나라 때 학자인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밝은 것은 다 속일 수 없다.”

하였거늘, 천지일월을 환망(幻妄)이라 하니, 불씨가 그런 병통을 받은 것이 반드시 유래가 있어서이다. 요컨대 그의 보는 바가 가려져 있으므로 그 말하는 바의 편벽됨이 이와 같은 것이다. 아아!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내 어찌 말 많이 하기를 좋아하겠는가마는, 내가 말을 그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들의 마음이 너무 미혹(迷惑)되고 어두운 것이 불쌍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도(道)가 쇠폐(衰廢)될까 근심스럽기 때문이다.

 

[필자미상불화(筆者未詳佛畵), 지본채색, 102.7 x 48.2cm, 국립중앙박물관 ㅣ 7여래 가운데 하나인 보승여래(寶勝如來)는 평등한 마음을 갖게 하여 인색과 탐욕을 떨쳐 버리게 하는 부처. ]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