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1 - 불씨잡변 불씨매어도기지변

從心所欲 2022. 1. 19. 11:17

불씨가 도와 기에 어두운 데 관한 변[佛氏昧於道器之辨]

 

도(道)란 것은 이(理)이니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器)란 것은 물(物)이니 형이하(形而下)의 것이다.

대개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와서 물(物)마다 있지 않음이 없고, 어느 때나 그에 해당되지 않음이 없다. 즉 심신(心身)에는 심신의 도가 있어서 가까이는 부자ㆍ군신ㆍ부부ㆍ장유ㆍ붕우에서부터 멀리는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도가 있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도 그 물(物)을 떠나서는 독립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접촉함에 또한 마땅히 그 각각의 도를 다하여 혹시라도 그르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유가의 학이 내 마음과 몸으로부터 사람과 물건에 이르기까지 그 성(性)을 다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대개 도(道)란 비록 기(器)에 섞이지 않으나 또한 기에서 떠나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저 불씨(佛氏)는 도에 있어서는 비록 얻은 바가 없으나, 그 마음을 쓰고 힘을 쌓은 지 오랜 까닭에 방불(髣髴)하게 본 곳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管]으로 하늘을 본 것과 같은 것이라, 한결같이 한갓 위로만 올라갈 뿐이요, 사통팔달(四通八達)할 수가 없어서 그 본 바가 반드시 한쪽의 치우친 데로 빠진다.

▶방불(髣髴) : 방불(彷彿). 비슷비슷하다.

 

도(道)가 기(器)와 섞이지 않음을 보고는, 도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여, 이에 말하기를,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곧 여래(如來)를 볼 것이다.”

【안(按) : 정도전 주석】 이 한 단(段)은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왔으니 “눈앞에는 법이 없으니, 눈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그러하다. 오직 이와 같은 것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고 하여, 반드시 모든 존재[有]를 파탈(擺脫)하려고 하다가 공적(空寂)에 떨어지는가 하면, 그 도가 기(器)에서 떠나지 않음을 보고는 기(器)를 가지고 도(道)라 하여, 이것을 말하기를,

“선(善)과 악(惡)이 모두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의식[識]이다. 그러므로 일체에 수순(隨順)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이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미쳐 날뛰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온갖 짓을 못할 것이 없기도 하다.”고 한다.

▶수순(隨順) : 남의 뜻에 순종(順從)함.
【안(按) : 정도전 주석】 “선한 마음이 생기면 일체에 수순하되 하는 일이 다 자연 그대로에 맞고, 악한 마음이 생기면 미쳐 날뛰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 못할 짓이 없으니, 이러한 마음의 지닌 것이 곧 의식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선이나 악이나 마음이 아니면 의식이 없고, 의식이 없으면 마음도 없나니, 마음과 의식이 상대되어 선과 악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자(程子)가 이른바 막히어 고루(固陋)한 자는 고고(枯槁)한 데로 들어가고 소통(疏通)한 자는 방자한 데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지만, 이는 도리어 형이하(形而下)인 기(器)에 떨어지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니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지장보살(地藏菩薩), 견본채색, 224.2 x 179.4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