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0 - 불씨잡변 불씨심적지변

從心所欲 2022. 1. 17. 15:21

불씨 심적의 변[佛氏心跡之辨]

 

마음이라는 것은 한 몸 가운데의 주(主)가 되는 것이요, 적(跡)이라는 것은 마음이 일에 응하고 물에 접(接)하는 위에 발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적(跡)이 있다.’고 하였으니 가히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사단(四端)이나 오전(五典)이나 만사(萬事)ㆍ만물의 이(理)는 혼연(渾然)히 이 마음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는지라, 그 사물이 옴에 있어 변함이 한결같지 않으나 이 마음의 이(理)는 느낌에 따라 응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어쩌나 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기 마련이니, 이는 그 마음에 인(仁)의 성(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린 아이를 볼 때 밖으로 발하는 것은 바로 측연(惻然)한 것인데 마음과 적(跡)이 과연 둘이겠는가? 수오(羞惡)니 사양(辭讓)이니 시비(是非)니 하는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다.

▶사단(四端) :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4가지 단서(端緖).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수오(羞惡)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辭讓)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是非)하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라 하였다.
▶오전(五典)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차서(長幼次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상(五常).

 

다음으로 내 몸에 접하는 바에 비추어 보자. 아버지를 보면 효도할 것을 생각하고, 아들을 보면 사랑할 것을 생각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으로 하고, 신하를 부림에는 예(禮)로써 하고, 벗을 사귐에는 신(信)으로 하는 것, 이런 것은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일까? 그 마음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性)이 있기 때문에 밖으로 발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이른바 체(體)와 용(用)이 한 근원이요,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학(學)은 그 마음을 취하나 그 적(跡)을 취하지 않고, 표방하여 말하기를,

“문수(文殊) 보살[大聖]이 술집에서 놀았는데, 그 행적은 비록 그르나 그 마음은 옳다.”

고 하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유(類)의 것이 매우 많으니, 이는 마음과 행적이 판이(判異)한 것이 아니냐?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씨의 학에는 경으로 안을 곧게 함[敬以直內]은 있으나, 의로써 밖을 방정케 함[義以方外]은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막히어 고루(固陋)한 자는 고고(枯槁)한 데로 들어가고, 소통(疏通)한 자는 방자(放恣)한 데로 돌아가니, 이것은 불씨의 교(敎)가 좁은 까닭이다.”

하였다.

그러나 의로써 밖을 방정케 함이 없으면 그 안을 곧게 한다는 것도 결국은 옳지 않은 것이다.

왕통(王通)이란 사람은 유학자(儒學者)이면서도 또한 말하기를,

“마음과 적(跡)은 판이한 것이다.”

하였으니, 불씨의 설에 미혹된 무지한 자다. 그러므로 여기에 아울러 언급해 둔다.

 

[아미타극락회도(阿彌陀極樂會圖), 견본채색, 307.5 x 244cm, 국립중앙박물관 ㅣ 극락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