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7 - 불씨잡변 불씨인과지변

從心所欲 2022. 1. 2. 11:55

불씨 인과의 변[佛氏因果之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불씨의 윤회설에 대한 변증(辨證)은 지극하다마는, 자네의 말에, ‘사람과 만물이 모두 음양오행의 기(氣)를 얻어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不肖)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장수(長壽)하는 사람, 요절(夭絶)하는 사람 등이 같지 않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어떤 것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실컷 부림을 받고 드디어는 죽음을 감수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물이나 낚시나 주살[弋]의 해(害)를 면치 못하기도 하고,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한 것들이 저희끼리 서로 잡아먹기도 하니, 하늘이 만물을 냄에 있어 하나 하나 부여해 준 것이 어찌 이렇게도 치우쳐 고르지 못하단 말인가? 이렇게 보면 석씨(釋氏)의 이른바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한 것에 모두 보응(報應)이 있다.’는 것이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또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거나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인(因)이라 하고, 다른 날에 보응을 받는 것을 과(果)라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근거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면, 나는 이에 대답하기를,

 

“사람과 만물의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앞에서 자세히 논(論)하였으니, 이를 이해한다면 윤회설은 저절로 변명(辨明)될 것이요, 윤회설이 변명되면 인과설(因果說)은 변명하지 않아도 자명(自明)해진다. 그러나 이미 질문이 나왔으니 내 어찌 근본적으로 다시 말하지 않으랴?

‘저 이른바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것은 엇바뀌어 운행되며,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參差不齊]. 그러므로 그 기(氣)의 통(通)함과 막힘[塞], 치우침[偏]과 바름[正], 맑음[淸]과 흐림[濁], 두꺼움[厚]과 얇음[薄],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과 만물이 생겨날 때에 마침 그때를 만나 바름과 통함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힘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 사람과 물의 귀하고 천함이 여기에서 나눠지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기(氣)의 맑은 것을 얻은 사람은 지혜롭고 어질며, 흐린 것을 얻은 사람은 어리석고 불초하며, 두꺼운 것을 얻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엷은 것을 얻은 사람은 가난하고, 높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귀하게 되고, 낮은 것을 얻은 사람은 천하게 되고, 긴 것을 얻은 사람은 장수(長壽)하게 되고, 짧은 것을 얻은 사람은 요절(夭折)하게 되는 법이니, 이것이 대략이다.

물(物)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기린ㆍ용ㆍ봉(鳳)의 신령함이나, 호랑(虎狼)ㆍ독사의 독(毒)함이나, 춘(椿)ㆍ계(桂)ㆍ지(芝)ㆍ난(蘭)의 상서로움이나, 오훼(烏喙 : 맛이 쓴 독약의 일종)ㆍ씀바귀의 씀과 같은 것은 모두 치우치고 막힌 가운데에서도 선악(善惡)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어떤 의식[意]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건(乾)의 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정(定)한다.’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말한 ‘천도(天道)가 무심(無心)히 만물을 두루[普] 덮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의 의술(醫術)이나 점술(占術)은 조그마한 술수[數]이지만, 점치는 사람은 사람의 복(福)이나 화(禍)를 정하는 데 반드시 오행(五行)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근본으로 추구한다.

‘이 사람은 목명(木命)이니 봄을 맞아서는 왕성하지만 가을을 맞으면 쇠퇴하며 그 용모는 푸르고 길며 그 마음씨는 자비롭고 어질다.’ 하고 ‘이 사람은 금명(金命)이므로 가을에는 길(吉)하나 여름에는 흉(凶)하며 그 용모는 희고 네모나며, 그 마음씨는 강(剛)하고 밝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때로는 수명(水命)을 때로는 화명(火命)을 말하여 해당시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용모의 추(醜)함이나, 마음의 어리석고 사나움이 모두 오행의 품부(禀賦)가 치우침에 근거[本]한다고 한다.

또 의사가 사람의 병을 진찰할 때에도 반드시 오행이 서로 감응(感應)함에 근본을 추구(推究)한다. ‘아무개의 병은 한증[寒]이니 신수(腎水)의 증세’라 하고 ‘아무개의 병은 온증[溫]이니 심화(心火)의 증세’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유(類)의 것이다. 따라서 약(藥)을 쓸 때에도 그 약 성질의 온(溫)ㆍ양(凉)ㆍ한(寒)ㆍ열(熱)과 그 맛의 산(酸)ㆍ함(醎)ㆍ감(甘)ㆍ고(苦)를 음양오행에 나누어 붙여서 조제(調劑)하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우리 유가(儒家)의 설에 ‘사람과 만물은 음양오행의 기를 얻어서 태어났다.’는 것이 명백히 증험되는 것이니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과연 불씨(佛氏)의 설과 같다면 사람의 화복과 질병이 음양오행과는 관계없이 모두 인과(因果)의 보응(報應)에서 나오는 것이 되는데, 어찌하여 우리 유가의 음양오행을 버리고 불씨(佛氏)의 인과보응설을 가지고서 사람의 화복을 정하고 사람의 질병을 진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불씨의 설이 황당하고 오류(誤謬)에 가득 차 족히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거늘, 그대는 아직도 그 설에 미혹되려는가?”

할 것이다.

 

이제 지극히 절실하고도 보기 쉬운 예를 들어 비유해 보자.

술이라 하는 것은 국(麴 : 누룩)과 얼(蘖 : 엿기름을 넣어 만든 죽)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甕]의 덜 구워지고 잘 구워짐과, 날씨의 차고 더움과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면 그 맛이 매우 좋게 된다. 그러나 만일 얼(蘖)이 많으면 맛이 달고, 국(麴)이 많으면 맛이 쓰고, 물이 많으면 맛이 싱겁다. 물과 국(麴)과 얼(蘖)이 모두 적당하게 들어갔다 할지라도 항아리의 덜 구워짐ㆍ잘 구워짐에나, 또는 날씨의 차고 더움이나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에 서로 어긋나 합해지지 않으면 술맛이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용도도 상(上)ㆍ하(下)로 다르게 되며, 지게미[糟粕] 같은 것은 더러운 땅에 버려져 발길에 채이고 밟히게도 된다. 그런즉, 술의 그 맛있게 되고 맛없게 되는 것과, 상품도 되고 하품도 되는 것과, 쓰이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 이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럴 뿐이니 술을 만드는 데에도 역시 인과의 보응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는가?

 

이 비유는 비록 비근(鄙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명백하여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음양오행의 기는 서로 밀고 엇바뀌어 운행되어서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도 만 번 변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그 이치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성인(聖人)은 가르침을 베풀어, 배우는 사람에게 기질(氣質)을 변화하여 성현(聖賢)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쇠망[衰]을 바꾸어 치안(治安)으로 나아가게도 하나니, 이는 성인이 음양의 기(氣)를 들이켜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공(功)에 참여하여 돕는 까닭이다. 어찌 불씨(佛氏)의 인과설이 그 가운데에 용납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미상 불화(筆者未詳佛畵)> 中 거해지옥(鉅觧地獄), 견본채색. 156.1 x 113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