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5 - 심기리편 이유심기

從心所欲 2021. 12. 26. 12:44

이유심기(理諭心氣) : 이가 심(心)과 기(氣)를 타이름.

 

【이 편(篇)은 주로 유가(儒家)의 의리(義理)의 바른 것을 말하여 노ㆍ불(老佛) 이씨(二氏)를 타일러서 그들의 잘못을 알게 한 것이다. 이(理)라는 것은 마음이 품부(稟賦)한 덕(德)이요, 기(氣)는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아, 목목(穆穆)한 그 이(理)여! 천지(天地)보다 앞에 있어, 기(氣)는 나[我 : 이(理)를 말함]로 말미암아 생기고 심(心)도 또한 품수(稟受)하였도다.

【오(於)는 탄미(歎美)하는 말이요, 목(穆)은 지극히 맑음이다. 이 이(理)가 순수(純粹)하게 지극히 선하여 본래 잡된 바가 없으므로 탄미하여 말하기를 오목(於穆)이라 한 것이요, 나[我]라는 것은 이(理)가 자기를 일컬은 것이다.

앞서 심(心)과 기(氣)를 말함에 바로 나[我]ㆍ나[予]라 이르고, 이곳에는 이(理)를 표적(標的)하여 탄미(歎美)한 후에 나[我]라 일컬었으니, 그것은 이(理)가 공정한 도(道)로 그 존귀(尊貴)함이 상대가 없어서, 노ㆍ불(老佛) 이씨(二氏)가 각각 편벽된 소견을 지켜 서로 피아(彼我)를 구별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은 이(理)가 심(心)과 기(氣)의 본원이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 이(理)가 있은 후에 이 기(氣)가 있고, 이 기(氣)가 있은 후에 양기(陽氣)의 경청(輕淸)한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음기(陰氣)의 중탁(重濁)한 것은 아래로 엉겨 땅이 된 것이다.

사시(四時)가 이에 유행(流行)하고 만물이 이에 화생(化生)하니, 사람이 그 사이에 있어 천지의 이(理)를 온전히 얻고 또 천지의 기(氣)를 온전히 얻어, 만물 가운데에서 가장 존귀하므로 천지와 더불어 천ㆍ지ㆍ인(天地人) 삼재(三才)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천지의 이(理)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성품[性]이 되고, 천지의 기(氣)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형체[形]가 되며, 심(心)은 또 이(理)와 기(氣)를 겸하여 얻어 한 몸의 주재(主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理)가 천지보다 앞에 있어 기(氣)가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마음도 또한 품수하여 덕(德)이 된 것이다.】

 

심(心)이 있고 내[我 : 이(理)를 말함]가 없으면 이해에만 달려갈[趨] 것이요, 기(氣)만 있고 내[我]가 없으면 혈육만의 구체(軀體)로 준연(蠢然)하게 금수(禽獸)와 한길로 돌아갈 것이니, 아아, 그 중에서 조금 다를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幾希]!

【준연(蠢然)은 지각(知覺)이 없는 모양이요, 기희(幾希)는 적다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지각(知覺)과 운동(運動)의 준연(蠢然)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같으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순수한 것은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 하였다.

이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바는 그 의리가 있기 때문이니, 사람이고서 의리가 없으면 그 지각(知覺)하는 바가 정욕(情欲)과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그 움직이는바 또한 준연(蠢然)히 한갓 살아 있을 따름이니, 비록 사람이라고 하나 금수(禽獸)에서 얼마나 멀 것인가? 이것이 유자(儒者)가 존심(存心)ㆍ양기(養氣)하는 데 반드시 의리로써 주(主)를 삼는 까닭이다.

 

저 석ㆍ노(釋老)의 학은 적멸(寂滅)과 청정(淸淨)을 숭상하여 비록 이륜(彛倫)의 중대한 것과 예악(禮樂)의 아름다운 것도 반드시 제거하여 멸절(滅絶)하고자 한다. 그 흉중에 욕심이 없는 자는 이해에 달려가는 자와 다른 듯하나 천리(天理)의 공정(公正)함을 주장하여 인욕(人欲)의 사(私)를 제재할 줄을 알지 못하므로, 그 일상 언행이 매양 이해(利害)에 빠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또 사람의 욕구하는 바가 삶보다 더한 것이 없고,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이제 그들의 학설을 보건대, 석씨(釋氏)는 반드시 사생(死生)에서 벗어나려 하니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노씨는 반드시 장생(長生)을 구하고자 하니 이는 삶을 탐하는 것인즉, 이해(利害)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그 가운데에 의리(義理)의 주장함이 없으니, 효연(枵然)히 얻음이 없고 명연(冥然)히 알지 못할 뿐이니 이는 구각(軀殼)에 존재된 것이 혈육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네 구절은 비록 범연(泛然)히 중인(衆人)을 가리켜 말한 것이나, 노ㆍ불 이가(二家)의 실지 병통에 절실하게 맞는 것이니, 독자는 상세히 살펴야 한다.】

▶구각(軀殼) : 정신(精神)에 대하여 육체를 이르는 말.

 

저 어린아이가 포복(匍匐)하여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측은한 정이 생기나니,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정념(情念)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방금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면 놀랍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다.” 하였다.

이는 측은한 정이 내 마음의 고유(固有)한 데 근본하여 불가(佛家)의 생각을 없애고 정(情)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밝힌 것이다.

 

대저, 사람이 천지의 호생(好生)하는 마음을 얻어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른바 인(仁)이다. 이 이치(理致)가 실지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감을 보면 그 측은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서 막지 못하나니, 이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이며, 사해(四海)의 안을 모두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정념(情念)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천리(天理)가 나타나는 자연을 따를 뿐이니, 어찌 불가의 정념(情念)이 일어나는 것을 두렵게 여겨 억지로 제어하여 적멸(寂滅)에 돌아갈 따름인 것과 같으랴!】

 

죽을 자리에 죽는 것은 의(義)가 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여 인(仁)을 해침이 없고,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룸이 있다.” 하였다.

이는 의(義)가 중하고 생명이 경한 것을 말하여 노자의 기(氣)만 양(養)하고 생(生)을 탐하는 실수를 밝힌 것이다. 대개 군자가 실지의 이치를 보아 얻으면 마땅히 죽을 자리를 당하여는 그 몸이 차마 하루라도 삶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나니, 사생(死生)이 더 중한가, 의리(義理)가 더 중한가? 그러므로 유자(儒者)는 임금이나 어버이의 난(難)을 구(救)할 때를 당하여는 신체와 생명을 버리고 달려가는 자가 있으니, 노씨(老氏)의 한갓 수련에만 종사하며 삶을 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성인(聖人)이 지나가신 천재(千載)에 학(學)이 거짓되고 말이 방잡(厖雜)한지라, 기(氣)로써 도(道)를 삼고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도다.

【방(厖)의 뜻은 난(亂)과 같다.

이들 이단(異端)의 학설이 성행하게 된 까닭은 성인(聖人)의 세상이 이미 멀어져 도학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씨(老氏)는 기(氣)가 이(理)에 근본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기(氣)로써 도(道)를 삼고 있으며, 석씨(釋氏)는 이(理)가 심(心)에 갖추어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노ㆍ불 이가(二家)에서는 스스로 무상고묘(無上高妙)하다고 말하면서도, 형이상(形而上)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마침내 형이하(形而下)만을 가리켜 말하여 천근(淺近)하고 오활(迂闊)하며 편벽된 가운데에 빠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의롭지 못하고 장수(長壽)하면 거북이나 뱀 따위일 것이요, 눈 감고 앉아만 있으면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해(形骸)일 뿐이다.

【갑연(瞌然)은 앉아 조는[坐眼] 모양이다. 앞의 두 구절은 노씨(老氏)를 책망한 것이요, 뒤의 두 구절은 석씨(釋氏)를 책망한 것이다. 곧 앞 장(章)에 심(心)만이 있고 내[我]가 없으며, 기(氣)만 있고 내[我]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 장은 범연히 여러 사람을 말한 것이요, 이 장(章)은 오로지 이씨(二氏)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내[我]가 너[爾]의 심(心)에 주재하고 있으면 형철(瑩澈)하고 허명(虛明)할 것이요, 내[我]가 너[爾]의 기(氣)를 기르면 호연(浩然)의 기가 생길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나는 나의 호연(浩然)한 기(氣)를 잘 기른다.”

하였다.

이는 성인(聖人)의 학(學)이 안팎으로 사귀어 기르는 공(功)을 말한 것이다.

의리(義理)로써 심(心)을 간직하여 함양(涵養)하면 물욕(物欲)에 가려짐이 없어 전체(全體 )가 허명(虛明)하고 대용(大用)이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요, 의(義)를 모아 기(氣)를 길러[養氣] 확충하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剛)한 기(氣)가 호연(浩然)히 스스로 생겨 천지에 가득 찰 것이다. 본말(本末)이 겸비(兼備)되고 내외(內外)가 서로 양(養)하는 것이니, 이는 유자(儒者)의 학이 바른 것이 되어 노ㆍ불(老佛)이 편벽된 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전체(全體) : 심지체(心之體)
▶대용(大用) : 심지용(心之用)

 

선성(先聖)의 가르침에 ‘도(道)에는 두 갈래로 높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심(心)이여 기(氣)여, 공경하여 이 말을 받을지어다.

【호씨(胡氏)가, 《예기(禮記)》의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도(道)에는 두 가지 길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도술(道術)이 하나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윗글에서 논한 바가 모두 성현의 유훈(遺訓)에 근본한 것이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며, 그 도(道)의 존귀(尊貴)함이 더불어 둘이 될 것이 없어 심(心)과 기(氣)의 비(比)할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심(心)과 기(氣)를 특별히 불러 경계하였으니 그 권권(拳拳)히 열어 보인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다.】

 

 

서(序)

【심(心)ㆍ기(氣)ㆍ이(理) 3편(三篇)은 삼봉(三峯) 선생이 지은 것이다. 선생은 항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천지(天地)의 이(理)를 받아 성(性)이 되었고, 그 형체[形]를 이룬 바는 기(氣)이고, 이(理)와 기(氣)를 합하여 능히 신명(神明)한 것은 심(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이(理)를 주(主)로 하여 심(心)과 기(氣)를 다스리니, 그 하나를 근본으로 하여 그 둘을 기르는 것이요, 노씨(老氏)는 기(氣)를 주로 하여 양생(養生)으로써 도(道)를 삼고, 석씨(釋氏)는 심(心)을 주로 하여 부동(不動)으로써 종(宗)을 삼아, 각기 그 하나를 지키고 그 둘을 버린 것이다.

 

노씨는 무위(無爲)를 원하여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제거한다. 이는 그 몸의 수고로움 때문에 그 기(氣)를 해칠까 두려워함이니, 기(氣)가 잘 길러진다면 정신이 안정되어 비록 하는 일이 있어도 나의 삶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석씨(釋氏)는 무념(無念)을 원하여 생각의 선악(善惡)을 막론하고 모두 버린다. 이는 그 정신의 수고로움 때문에 그 마음이 움직일까 두려워함이니, 마음이 잘 안정되면 본체가 항상 공적(空寂)하여 비록 일의 변화에 응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모두 하지 않는 바가 있다가 마침내는 모두 하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대개 그 하지 않는 바가 있을 때에는 이치[理]에 당연한 바도 또한 끊어 버리고, 그 하지 않는 바가 없을 때에는 비록 이치[理]에 마땅히 해서는 안 될 바도 또한 한다.

따라서 이가(二家)의 학설은 고고(枯槁)하고 적멸(寂滅)한 데 빠지지 않으면 반드시 방사(放肆)하고 종자한 데에 흘러들어, 그 인의(仁義)를 해치고 윤리를 멸절(滅絶)하여 성문(聖門) 대중(大中)의 가르침에 죄를 얻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중(大中) : 지극히 중정(中正)한 도(道).

 

우리 유도(儒道)는 그렇지 않으니, 하늘이 명(命)한 성품(性稟)이 혼연(渾然)한 일리(一理)로써 만 가지 선(善)이 모두 갖추어졌는지라 군자(君子)가 이에 항상 경외(敬畏)하고 반드시 성찰(省察)을 더하여 마음에 싹트는 것이 이(理)에 본원(本源)한 것이면 확충(擴充)하고, 욕심에서 생겼으면 막고 끊어 버리며, 기(氣)에서 움직이는 것이 의리에 합하여 곧으면 용맹스럽게 나아가 하고, 곧지 않으면 겁내어 물러간다.

그 심(心)을 길러 의리(義理)를 보존하고, 그 기(氣)를 길러 도의(道義)에 합하므로 무릇 생각하는 바가 의리에 당연하지 않음이 없고, 무릇 동작하는 바가 자연 비벽(非僻)의 간여가 없어 그 마음의 영(靈)이 사물의 이(理)를 주관하고, 그 기(氣)의 큰 것이 천지 사이에 가득하나 모두 의리(義理)가 주인이 되어 마음과 기(氣)가 매양 명령을 듣는다.”

하였다.

이는 ‘유자(儒者)의 도(道)가 인륜(人倫)과 일용(日用)의 평상(平常)한 데 갖추어져 있어 천하 만세(萬世)에 행하여도 폐단이 없는 것이다.’ 하여 선생이 항상 학자들에게 말하던 것이다.

비록 사람에게 의리(義理)가 있어 진실로 매우 큰 것이 되나, 심(心)은 내 몸의 주인[主]이요, 기(氣)도 또한 내 몸이 얻어서 태어난 것으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노씨(老氏)와 석씨(釋氏)가 명심(明心)ㆍ양기(養氣)의 설을 표절하여 어리석은 세속을 속이고 유혹하므로 사람들이 즐겨 듣고 신종(信從)하는 자가 많아, 이따금 도(道)를 아는 자가 비록 역설하여 물리치기는 하나 다만 우리 도(道)에 맞지 않음을 배척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오히려 누가 옳고 그른 것인가를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직 선생은 먼저 이씨(二氏)의 취지를 밝히고 우리 도(道)의 바른 것으로써 절충하였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소연(昭然)하게 깨닫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단(異端)의 무리 또한 좇아 화(化)하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선생이 명교(名敎)에 크게 공(功)이 있는 것이다.

 

이에 또 그 뜻을 기술하여 3편(篇)을 지어 학자들에게 보였으니, 그 심(心)과 기(氣)를 말한 것이 모두 이씨(二氏)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취지를 밝히고 그 온오(蘊奧)한 데에 이르기까지 적실하게 말하였으며, 또 그 말이 혼후하여 배척한 자취가 보이지 않으므로, 비록 그의 무리들이 이것을 볼지라도 또한 모두 정밀하고 적절하다 하여 즐겨 복종하였던 것이다.

급기야 이(理)로써 형용하여 말한 후에 우리 도(道)와 이단(異端)의 바르고 편벽됨이 변설(辨說)할 것도 없이 자연 밝혀졌으니, 저들이 비록 말하려 하나 무엇을 가지고 말할 것인가? 이는 선생이 이씨(二氏)를 물리침에 있어 범연하게 논설을 늘어놓는 자와 비교가 되지 않으며, 또 언성(言聲)을 높이고 안색을 변하여 극구(極口) 저훼(詆毀)하는 자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한갓 그 배척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르기를,

“삼교(三敎)가 일치하므로 선생이 이를 지어 그 도(道)의 동일함을 밝힌 것이다.”

하는데, 이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히 주석(註釋)을 하였으며, 또 그 단서를 이끌어 선생에게 들은 바를 써서 밝히는 바이다.

 

홍무(洪武) 갑술(甲戌) 여름,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서(序)한다.】

▶삼교(三敎) : 유교(儒敎)ㆍ불교(佛敎)ㆍ도교(道敎).
▶홍무(洪武) : 명(明)태조의 연호(年號).
▶갑술(甲戌) : 태조3년인 1394년.

 

[<필자미상 불화(筆者未詳佛畵)> 中 독사지옥((毒蛇地獄), 견본채색. 156.1 x 113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