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6 - 불씨잡변 불씨윤회지변

從心所欲 2021. 12. 29. 11:54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정도전이 성리학의 이기론적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한 글들이다. 모두 19편의 글로, 불교의 세속적 신앙과 관련된 인과설, 윤회설 등을 비판한 15편의 ‘잡변(雜辨)’과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국가에 화를 미친 사례를 논한 4편의 ‘전대사실(前代事實)’로 구성되어 있다.

 

불씨 윤회의 변[佛氏輪廻之辨]

사람과 만물이 생생(生生)하여 무궁한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造化)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함에 음(陰)과 양(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변(變)하고 합(合)함에 오행(五行)이 갖추어졌다. 이에 무극(無極)ㆍ태극(太極)의 진(眞)과 음양오행의 정(精)이 미묘(微妙)하게 합하여 엉겨서[凝] 사람과 만물이 생생(生生)한다. 이렇게 하여 이미 생겨난 것은 가면서 과거[過]가 되고 아직 나지 않은 것은 와서 계속[續]하나니, 이 과(過)와 속(續) 사이에는 한 순간의 정지도 용납되지 아니한다.

▶생생(生生) : 계속하여 낳고 낳는다는 뜻.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이기(二氣 : 음양)가 교감(交感)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니 만물이 생생함에 변화가 무궁하다[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라고 하였다.
▶진(眞) : 참된 것. 여기서는 이(理)를 뜻한다.
▶정(精) : 정기. 여기서는 기(氣)를 뜻한다.


부처의 말에,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으므로 태어남에 따라 다시 형체를 받는다.”
하였으니, 이에 윤회설이 생겼다.

《주역(周易)》(계사상(繫辭上))에,

“시(始)에 원(原)하여 종(終)에 반(反)한다[原始反終]. 그러므로 그 생사(生死)의 설을 알 수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정기(精氣)는 물(物)이 되고 유혼(游魂)은 변(變)이 된다.”

하였다. 선유(先儒)는 이 글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천지의 조화가 비록 생생하여 다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임[聚]이 있으면 반드시 흩어짐[散]이 있으며, 태어남[生]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死]이 있다. 능히 그 시(始)에 원(原)하여 그 모여서 태어남을 안다면 그 후에 반드시 흩어져 죽는 것을 알 것이며,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기화(氣化)하는 날에 얻어진 것이요, 원래부터 정신이 태허(太虛)한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죽음이란 것은 기(氣)와 더불어 함께 흩어져 다시 형상이 아득하고 광막한[漠] 속에 남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기는 물(物)이 되고 유혼은 변(變)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천지 음양의 기가 교합(交合)하여 바로 사람과 만물을 이루었다가,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르러서는, 바로 변이 되는 것이다. 정기가 물이 된다는 것은 정과 기가 합하여 물이 되는 것이니, 정은 백(魄)이요, 기는 혼(魂)인 것이며, 유혼(游魂)은 변이 된다는 것은, 변이란 바로 혼과 백이 서로 떨어져 유산(游散)하여 변하는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변이란 변화의 그 변이 아니라 이 변은 단단한 것이 썩음이요, 있던 것이 없어져 다시는 물(物)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홍로(烘爐)와 같아, 비록 생물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녹아 없어진다. 어찌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며, 이미 간 것이 다시 올 수 있으랴?

▶원시반종(原始反終) : 시원(始原)을 추구(推究)하여 뒤에 구한다는 뜻.
▶유혼(游魂) : 넋이 형체(形體)로부터 떨어져 나가 떠도는 것.
▶홍로(烘爐) : 도가니. 큰 화로.

 

이제 또한 내 몸에 징험(徵驗)하여 본다면, 숨 한 번 내쉬고 들이쉬는 사이에 기가 한 번 들어갔다 나오나니, 이것을 일식(一息)이라 한다. 여기서 숨을 내쉴 때 한 번 나와 버린 기가 숨을 들이쉴 때 다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사람의 기식(氣息)에서도 또한 생생(生生)하여 무궁함과, 가는 것은 지나가고[過] 오는 것은 계속[續]되는 이치를 볼 수가 있다. 또 밖으로 물(物)에 징험(徵驗)하여 본다면, 모든 초목이 뿌리로부터 줄기와, 가지와, 잎에, 그리고 꽃과 열매에 이르기까지 한 기운이 관통하여, 봄ㆍ여름철에는 그 기운이 불어나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고, 가을ㆍ겨울철에는 그 기운이 오그라들어 잎과 꽃이 쇠하여 떨어졌다가, 이듬해 봄ㆍ여름에는 또다시 무성하게 되는 것이나, 그러나 이미 떨어져 버린 잎이 본원(本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또 우물 속의 물을 보라. 아침마다 길어낸 물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불로 끓여 없애고, 옷을 세탁하는 사람이 햇볕에 말려 없애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러나 우물의 샘 줄기에서는 계속하여 물이 솟아 다함이 없으니, 이때 이미 길어간 물이 그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백곡(百穀)의 자라남도 마찬가지다. 봄에 10섬의 종자를 심었다가 가을에 1백 섬을 거두어들여 드디어는 1천 섬, 1만 섬에 이르나니 그 이익이 여러 배나 된다. 이것은 백곡도 또한 생생(生生)함이다.

이제 불씨(佛氏)의 윤회설을 살펴보자.

“혈기(血氣)가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일정한 수(數)가 있어, 오고 오고 가고 가도 다시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하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물(物)을 창조하는 것이 도리어 저 농부가 이익을 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혈기의 등속이 인류로 태어나지 않으면 조수(鳥獸)ㆍ어별(魚鼈)ㆍ곤충(昆虫)이 될 것이니, 그 수에 일정함이 있어 이것이 늘어나면 저것은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은 반드시 늘어나며, 일시에 다 함께 늘어날 수도 없고, 일시에 다 함께 줄어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살펴보건대, 왕성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류도 늘어나고 조수ㆍ어별ㆍ곤충도 함께 늘어나는가 하면, 쇠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류도 줄어들고 조수ㆍ어별ㆍ곤충도 또한 줄어든다. 이것은 사람과 만물이 모두 천지의 기(氣)로써 생기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기가 성하면 일시에 늘어나고 기가 쇠하면 일시에 줄어듦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불씨의 윤회설이 너무나도 세상을 현혹하는 것에 분개하여, 깊게는 천지의 조화에 근본하고, 밝게는 사람과 만물의 생성(生成)에 징험하여 이와 같은 설을 얻었으니,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은 함께 통찰하여 주기 바란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자네는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하여 《주역(周易)》에 있는 ‘유혼(游魂)은 변(變)이 된다.’는 말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혼(魂)과 백(魄)은 서로 떨어져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내려간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니, 그것은 불씨(佛氏)가 말한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나는 대답하기를,

“옛날에 사시(四時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불은 모두 나무에서 취(取)하였으니 이것은 원래 나무 가운데에 불이 있으므로 나무를 뜨겁게 하면 불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백(魄) 가운데에 혼이 있어 백을 따뜻이 하면 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나온다.’는 말이 있고 또 ‘형(形)이 이미 생기면 신(神)이 지(知)를 발(發)한다.’는 말도 있다. 여기서 형(形)은 백(魄)이요, 신(神)은 혼(魂)이다. 불이 나무를 인연하여 존재하는 것은 혼과 백이 합하여 사는 것과 같다. 불이 다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이는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의 연기는 곧 사람의 혼기이며 불의 재는 곧 사람의 체백이다. 또 화기(火氣)가 꺼져 버리게 되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 사람이 죽은 후에 혼기와 체백이 또다시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는 이치는 또한 명백하지 않은가?”

할 것이다.

 

[<필자미상 불화(筆者未詳佛畵)> 中 좌침지옥((剉砧地獄), 견본채색. 156.1 x 113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