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 심성의 변[佛氏心性之辨]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기(氣)로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이(理)로서 순수(純粹)하고 지극히 착하여 한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대개 마음은 지(知)와 위(爲)가 있으나 성(性)은 지도 위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능히 성(性)을 다할 수 있으나 성은 마음을 검속(檢束)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은 정(情)과 성(性)을 모두 통합한 것이다.”
는 말도 있고 또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신명(神明)의 집[舍]이요, 성(性)은 그 갖추어진 바의 이치[理]이다.”
라는 말도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마음과 성(性)의 분변(分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저 불씨(佛氏)는 마음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하고서 그 설을 구하다가 되지 않으니까, 이윽고 말하기를,
“혼미[迷]하면 마음이요, 깨달으면[悟] 성(性)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마음과 성의 이름이 다른 것은 안(眼)과 목(目)의 명칭이 다른 것과 같다.”
하였다.
《능엄경(楞嚴經)》에 말하기를,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명묘(明妙)는 원성(圓性)이다.”
하니, 이는 명(明)과 원(圓)을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안(按) : 정도전의 주석】 《능엄경》에 “너희들은 본묘(本妙)를 잃어 버렸도다. 원묘(圓妙)는 명심(明心)이요, 보명(寶明)은 묘성(妙性)이니라. 깨달음을 얻은 경지에서는 말이 필요하지 않으니, 마음은 묘로부터 명(明)을 일으키는지라, 그 원융(圓融)하게 비춤이 거울의 광명과 같으므로 ‘원묘는 명심’이라 하고, 성품은 그 자체가 곧 명(明)하며 묘(妙)한지라, 엉기어 고요하고도 맑음이 거울의 본체와 같으므로 ‘보명은 묘성’이라 한다.”고 하였다.
▶안(按) : 자구ㆍ사실ㆍ인물 등 상고해야 할 것을 정도전이 주석한 것. ▶원묘(圓妙) : 삼체(三諦)가 원융(圓融)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 |
보조(普照)는 말하기를,
“마음 밖에 부처[佛]가 없으며 성(性) 밖에 법(法)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또한 불(佛)과 법(法)을 나누어 말한 것이다. 이는 통찰[見]한 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모두가 방불(髣髴)한 가운데 상상(想象)으로 얻은 것이요, 활연(豁然)히 진실되게 본 것이 없어, 그 설에 헛된 말[遊辭]이 많아 일정한 논(論)이 없으니 그 실정을 알 수 있다.
우리 유가(儒家)의 설에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면 성(性)을 안다.”
하였으니, 이것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씨(佛氏)의 설에서는 말하기를,
“마음을 관(觀)하면 성(性)을 보나니 마음이 곧 성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따로 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한 마음을 본다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둘이 있단 말인가?
저들도 스스로 그 설의 궁함을 알았는지라 이에 둔사(遁辭)를 하여 말하기를,
“마음으로 마음을 관(觀)하는 것은 입으로 입을 씹는 것과 같으니, 관하지 않는 것으로써 관해야 하느니라.”
하니,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둔사(遁辭) : 어떠한 일에 대하여 책임 또는 관계를 피하려는 말. |
또 우리 유가의 말에,
“한 가슴[方寸]의 사이가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應)한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성(性)이요, ‘만사에 응한다.’고 하는 것은 정(情)이다. 오직 이 마음이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으므로, 사물(事物)의 오는 것에 응(應)하여 각각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함이 없는 것이니, 사물의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처리함에 있어 모든 사물이 다 나의 명령을 듣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유가(儒家)의 학(學)이 안으로는 마음과 몸으로부터 밖으로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근원으로부터 말류(末流)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관통되어 원두(源頭 : 근원처)의 물이 만 갈래로 흘러도 물 아님이 없음과 같고, 눈금이 있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의 경중을 저울질하면 그 물건의 경중이 저울대의 저울눈과 서로 맞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원래부터 간단(間斷 : 잠깐 끊어짐)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불씨(佛氏)는 말하기를,
“공적(空寂)한 영지(靈知)는 연(緣)을 따라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안】 불씨는 말하기를, “진정(眞淨)한 마음이 연(緣)을 따라 변하는 것은 상(相)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성(性)이니, 마치 한 진금(眞金)이 크고 작은 그릇을 따르는 것은 곧 연(緣)을 따르는 상이고, 진금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은 곧 성(性)인 것과 같다.” 하니, 말하자면 하나의 진정한 마음이 선악을 따라 더럽혀지거나 깨끗해지는 것은 곧 연(緣)을 따르는 상이고, 본래의 진정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은 성(性)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이(理)란 것이 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사물을 대함에 막힌[滯] 것은 끊어 버리고자 하고 트인[達] 것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데, 그 끊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원래 잘못이거니와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또 그의 말에,
“연(緣)을 따라 되는 대로 하고, 성(性)에 맡겨 자연스럽게 한다.”
하니, 이는 그 물(物)의 하는 대로를 따를 뿐이요, 다시 그 물에 대한 시비를 절제(節制)하여 처리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고, 그 마음의 응함은 천강(千江)의 달그림자와 같으니, 달은 참된 것이요, 그림자는 헛된 것이어서, 그 사이에 연속됨이 없는 것이며,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아, 그 가볍고 무겁고,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은 오직 물건에 따를 뿐, 자기가 행동하여 칭량(稱量)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씨(釋氏)는 허무이고 우리 유가는 진실이며,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이며, 석씨는 간단(間斷)이 있고 우리 유가는 연속(連續)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밝게 분변(分辨)해야 할 것이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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