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13 - 불씨잡변 불씨자비지변

從心所欲 2022. 1. 27. 10:29

불씨 자비의 변[佛氏慈悲之辨]

 

하늘과 땅이 물(物)을 생(生)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았는데, 사람은 이 천지가 물을 생하는 마음을 얻어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두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인(仁)이다.

불씨(佛氏)는 비록 오랑캐[夷狄]이지만 역시 사람의 종류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어찌 홀로 이러한 마음이 없으리오?

우리 유가의 이른바 측은(惻隱)은 불씨의 이른바 자비(慈悲)이니 모두가 인(仁)의 용(用)이다. 그런데 그 말을 내세움은 비록 같으나 그 시행하는 방법은 서로 크게 다르다.

대개 육친(肉親)은 나와 더불어 기(氣)가 같은 것이요, 사람은 나와 더불어 유(類)가 같은 것이요, 물(物)은 나와 더불어 생(生)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진 마음의 베푸는 바는 육친에서부터 사람에, 물(物)에까지 미쳐서 흐르는 물이 첫째 웅덩이에 가득찬 후에 둘째와 셋째의 웅덩이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 근본이 깊으면 그 미치는 바도 먼 것이다.

온 천하의 물(物)이 모두 나의 인애(仁愛) 속에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친(親)한 이를 친하게 한 후에 백성에게 어질게 하고, 백성에게 어질게 한 후에 만물을 사랑한다.”

고 하나니, 이것이 유자(儒者)의 도는 하나이고 실(實)이며 연속된다는 까닭이다.

 

불씨는 그렇지 않다.

그는 물(物)에 대하여서는 표독한 승냥이ㆍ호랑이 같은 것에나 미세한 모기 같은 것에도 자기 몸을 뜯어 먹혀가면서 아깝게 여기려 하지 않는가 하면, 사람에 대하여서는 월(越)나라 사람이냐 진(秦)나라 사람이냐를 가리지 않고, 배고픈 자에게는 밥을 먹이려 들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옷을 밀어주어 입히려 드니, 이른바 보시(布施)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夫子)와 같은 지친(至親)에 대하여서나 군신(君臣)과 같은 지극히 공경하여야 할 데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끊어 버리려 드니 이는 무슨 뜻인가? 그뿐인가, 사람이 스스로 신중을 기하는 것은 부모처자가 있어서 그것에 배려하기 때문이거늘, 불씨는 인륜을 가합(假合)이라 하여, 아들은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신하는 그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서, 은혜와 의리(義理)가 강쇠되고 각박한지라 자기 지친(至親) 보기를 길 가는 사람같이 보고, 공경해야 할 어른 대하기를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여 그 근본과 원류를 먼저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에 미치는 것이 뿌리 없는 나무나 원류(源流) 없는 물이 쉽게 고갈(枯竭)되는 것과 같아, 끝내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만물을 구제하는 효과가 없다. 그런데 칼을 빼어 뱀[蛇]을 죽이는 데는 조금도 애석함이 없는가 하면, 지옥(地獄)의 설은 참혹하기 그지없으니, 도리어 은혜라고는 적은 사람이 된다. 앞서 이른바 자비(慈悲)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마음의 천리(天理)는 끝내 어둡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혼폐(昏蔽)한 사람일지라도 한번 부모를 보면 효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겨나는 것인데, 어찌 돌이켜 구하지 않고 이에 말하기를,

“전생의 많은 습기(習氣)를 다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착의 뿌리[愛根]가 아직 남아있다.”

라고 하니 미혹에 집착되어 깨닫지 못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불씨의 교(敎)는 의(義)가 없고 이(理)가 없는 까닭으로 명교(名敎, 유교(儒敎)의 별칭)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까닭이다.

 

[필자미상불화(筆者未詳佛畵), 지본채색, 100.3 x 46.1cm, 국립중앙박물관 ㅣ 그림의 부처는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이다. 이포외여래는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에 모시는 일곱 여래[七如來] 중 하나이다. 칠여래는 석가모니부처 이전까지 이 세상에 출현한 일곱 부처를 가리키고, 그 가운데 이포외여래는 부처가 수행으로써 모든 마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불한 것처럼 고혼(孤魂)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부처라 한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