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24 - 불씨잡변 벽이단지변

從心所欲 2022. 3. 23. 11:27

이단을 물리치는 데 관한 변[闢異端之辨]

 

요순(堯舜)이 사흉(四凶 요순 때에 죄를 지은 4명의 악한 즉 공공(共工)ㆍ환도(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을 벤 것은 그들이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은 좋게 꾸미면서 명령을 거스르고 종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었다. 우(禹)도 또한 말하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며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자를 어찌 두려워하랴?”

하였으니, 대개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것은 사람의 본심을 잃게 하며, 명령을 어기고 종족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람의 일을 망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제거하여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흉(四凶) : 중국 요순 때에 죄를 지은 4명의 악한 즉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

 

탕(湯)과 무왕(武王)이 걸(桀)과 주(紂)를 쳐부술 때 탕(湯)은 말하기를,

“나는 상제(上帝)가 두려워 감히 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무왕(武王)은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순종치 않으면 그 죄가 주(紂)와 같다.”

고 하였으니, 하늘의 명령과 하늘의 토벌은 자기가 사양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공자도 말씀하기를,

“이단을 깊이 파고들면 해로울 뿐이다.”

라고 하였으니, 해롭다는 한 글자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하게 한다.

▶탕(湯) : 은(殷)왕조의 시조(始祖).
▶무왕(武王) : 은(殷)왕조를 무너뜨리고 주(周)왕조를 세운 임금.
▶걸(桀) : 하(夏)왕조 최후의 임금으로 폭군.
▶주(紂) : 은(殷)왕조의 최후의 임금으로 폭군.

 

맹자(孟子)가 호변(好辯)으로 양묵(楊墨)을 막은 까닭은 양묵의 도(道)를 막지 않으면 성인(聖人)의 도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맹자는 양묵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의 말에 이르기를,

“능히 양묵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

고 하면서까지, 그는 사람들이 동조해 주기를 바란 것이 지극하였다.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한다[兼愛] 하니, 인(仁)인가 의심되고, 양씨(楊氏)는 자기만을 위한다[爲我] 하니, 의(義)인가 의심되어 그의 해(害)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데까지 이르므로 맹자가 이를 물리치고자 힘썼던 것이다.

▶양묵(楊墨) : 전국시대에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했던 양주(楊朱)와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던 묵적(墨翟).

 

그런데 불씨(佛氏)의 경우는 그 말이 고상하고 미묘하여 성명(性命)ㆍ도덕(道德) 가운데에 출입함으로써 사람을 미혹(迷惑)시킴이 양묵보다 더 심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말이 더욱 이치[理]에 가까워서 진(眞)을 크게 어지럽힌다.”

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다.

내 어둡고 용렬하면서도 힘이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의 임무로 삼은 것은 앞서 열거한 여섯 성인과 한 현인의 마음을 계승하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미혹되어 모두 빠져 버려 사람의 도가 없어지는 데 이를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아아! 난신(亂臣)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잡아 죽일 수 있으니, 반드시 사사(士師)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며, 사특한 말이 횡류(橫流)하여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면 사람마다 물리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러 사람에게 바라는 바이며 아울러 내 스스로 힘쓰는 것이다.

▶사사(士師) : 형벌을 다스리는 관리.

 

지(識)

 

도전(道傳)이 틈을 내어 《불씨잡변(佛氏雜辨)》 15편과 《전대사실(前代事實)》 4편을 지었는데 이미 이루어짐에 객(客)이 읽고 말하기를,

“자네가 불씨(佛氏)의 윤회설을 변정(辨正)하는 데 있어 만물이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인용하여 밝혔는데 그 말이 근사하긴 하나, 불씨의 설에 이르기를,

‘만물 중에 무정물(無情物)은 법계성(法界性)으로부터 왔고, 유정물(有情物)은 여래장(如來藏 진여(眞如)에 섭수(攝受; 마음을 관대히 먹어 받아들임)된다는 것)으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안】 무정물이란 바위돌이나, 풀ㆍ나무와 같은 것이고, 법계란 무변(無邊)이라는 말과 같으며, 유정물이란 본각(本覺)인 중생심(衆生心)과 모든 불성(佛性)이 본래 여래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대개 혈기(血氣)가 있는 물(物)은 다 같이 지각(知覺)이 있고 지각이 있는 물(物)은 다 같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자네는 물(物)의 정(情)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같은 격으로 동일하게 말하니, 헛되이 말만 소비하고 천착(穿鑿)하고 부회(附會)하는 병을 면할 수 없지 않은가?”

하였다.

이에 대답하여,

“아아! 이것이 바로 맹자의 말처럼, 근본(根本)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기(氣)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본시 하나일 뿐인데, 동(動)과 정(靜)이 있어서 음(陰)과 양(陽)이 나누어지고, 변(變)과 합(合)이 있어 오행(五行)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동하고 정하고 변하고 합하는 사이에, 그 유행하는 것은 통(通)과 색(塞)과 편(偏)과 정(正)의 다름이 있으니, 그 통함과 정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그 편과 색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며, 또 편과 색 가운데서도 그 조금 통한 것을 얻은 것은 금수(禽獸)가 되고, 전연 통이 없는 것은 초목이 되나니, 이것이 바로 물(物)이 정(情)이 있고 없는 것으로 나누어진 까닭이다.

▶주자(周子) : 북송의 관리이자 철학가, 문학가였던 주돈이(周敦頤). 호는 염계(濂溪).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동(動)하되 동함이 없고, 정(靜)하되 정함이 없는 것은 신(神)이니 그 기(氣)가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신(神)이라 하는 것이요, 동하면 정함이 없고, 정하면 동함이 없는 것은 물(物)이니 형(形)과 기(氣)에 국한되어 서로 통할 수 없으므로 물(物)이라 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개 동하여 정함이 없는 것은 유정물이란 이름이요, 정하여 동함이 없는 것은 무정물이라 이름이니, 이 또한 물의 정(情)이 있고 없음이 다 이 기(氣)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이니, 어찌 둘이라고 할 수 있으랴?

또 사람의 한 몸에도 혼백(魂魄)이나 오장(五臟)이나 귀ㆍ눈ㆍ입ㆍ코ㆍ손ㆍ발 등속과 같은 것은 지각(知覺)과 운동이 있고, 모발ㆍ손톱ㆍ가[齒] 등속은 지각도 운동도 없으니, 그러면 한 몸 가운데에도 또한 정(情)이 있는 부모로부터 온 것과, 정이 없는 부모로부터 온 것이 있으니, 부모가 둘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객(客)이 다시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로 변론한 설이 성명(性命) 도덕(道德)의 묘(妙)와 음양(陰陽) 조화(造化)의 미(微)한 데에 출입하여, 진실로 처음 배우는 선비들도 알지 못할 바가 있는데, 하물며 어리석고 용렬한 아래백성들이랴? 자네 말이 비록 정묘(精妙)하나, 한갓 호변(好辯)한다는 비방(誹謗)이나 얻을 뿐, 저쪽이나 이쪽의 학문에 함께 손(損)도 익(益)도 없을까 봐 나는 염려하며 또 불씨(佛氏)의 설이 비록 황당무계(荒唐無稽)하나, 세속의 이목에 익숙하여 빈말로는 타파(打破)할 수 없을까 봐 염려된다. 하물며 그들의 이른바 방광(放光)의 상서(祥瑞)나 사리(舍利)로써 여러 몸으로 화생한다는 이적(異跡)이 이따금 있음에랴. 이것이 세속에서 감탄하고 이상히 여겨 믿고 복종하는 까닭이다. 자네는 아직도 공박(攻駁)할 말이 있느냐?”

하였다.

다시 대답하여,

“이른바 윤회(輪廻) 등의 변론은 내 이미 다 논(論)하였다. 비록 그 폐(蔽)가 깊어서 갑자기 깨닫게 할 수는 없겠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한두 사람의 선비라도 내 말로 인하여 돌이켜 구한다면 거의 얻음이 있을 것이니, 이에 다시 덧붙여 말하지 않는다.

방광(放光)이나 사리(舍利)의 일에 대해서 어찌 그 말이 없겠는가마는, 그보다도 이 마음이라는 것은 가장 정(精)하고도 가장 영(靈)한 것인데, 저 불씨(佛氏)의 무리들은 생각의 선ㆍ악ㆍ사ㆍ정(善惡邪正)을 논하지 않은 채, 한 겹을 깎아 버리고 또 한 겹을 깎아 버려 한결같이 수렴(收斂)하니, 대개 마음이란 본래 광명하거니와 정일하기로도 또 이 같은지라, 가운데에 쌓아 밖으로 발하는 것 역시 이세(理勢)의 당연한 것이다. 부처의 방광(放光)하는 것이 어찌 족히 괴이(怪異)하랴?

▶방광(放光) : 빛살을 내쏨.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

 

또 하늘이 이 마음을 내어 주심에 그 지극히 신령하고 지극히 밝음으로써 한 몸 가운데의 주인이 되어 여러 이치의 묘(妙)로써 만물을 주재(主宰)케 한 것이요, 아무런 쓸 곳 없이 한갓 만물의 영장만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마치 하늘이 불을 만든 것은 본시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 어떤 사람이 불을 재 속에 파묻어, 추운 사람은 따뜻함을 얻지 못하고, 배고픈 사람은 밥을 지을 수 없다면, 비록 불의 열기가 있다 하더라도 재 속에서 발한 것이니, 마침내 무슨 이익이 있으랴? 부처의 방광을 내가 취하지 않는 까닭이 이것이다. 또 불이란 물건은 쓸수록 새로운 것이어서 항상 보존해야 꺼지지 않거늘, 만일 재 속에 파묻어 두기만 하고 때때로 꺼내 보지 않는다면, 처음에 비록 잘 피던 불이라도 마침내 재가 되어 꺼지고야 말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이, 항상 애쓰고 조심하고 염려하는 생각을 간직함으로써 마음의 작용이 죽지 않고 의리(義理)가 생길 수 있는 것인데, 만일 한결같이 수렴(收斂)하여 속에만 둔다면 비록 생동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마르고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 이른바 광명한 것이 혼매(昏昧)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리니, 이 또한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형상을 나타내는 데에도 역시 방광(放光)이 있다는 것은, 대개 썩은 풀이나 나무에도 야광(夜光)의 비침이 있거늘 하필 이것만을 의심할건가?

대저 사람에게 사리(舍利)가 있다는 것은 이무기[虵虺]나 조개[蜯蛤]에 구슬[珠]이 있는 것과 같은지라, 개중에는 이른바 선지식(善知識)이라는 사람도 사리(舍利)가 없는 이가 있으니, 이것은 바로 이무기나 조개에도 구슬이 없는 것과 같은 유(類)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사람이 조개에 있는 구슬을 뚫지도 않고 찌지도 않고 그대로 오래두었다가 꺼내보면 여러 개가 더 생긴다.’고 하니, 이것은 생의(生意)가 있는 곳에 자연히 불어나는 이치이다. 사리가 여러 몸으로 나눠지는 것도 이와 같을 뿐이다. 만일에 ‘부처에게 지극한 영(靈)이 있어,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리가 나누어진다.’고 한다면 석씨의 무리들이 그 스승의 모발(毛髮)이나 이[齒] 뼈[骨] 따위를 간직할 자가 많이 있을 텐데 어찌 정성껏 그런 물건을 나눠 가질 것을 빌어 청하지 않고 하필이면 사리에서만 몸이 나눠짐을 말했는가? 이것이 곧 물성(物性)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리라는 것은 매우 견고한 것이어서 비록 쇠방망이로 쳐도 깨뜨릴 수 없으니 그것이 신령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러나 영양각(羚羊角)을 얻어 한 번만 쳐부수면 가루가 될 것이니 어찌 사리가 쇠에는 신령스러우면서 영양각에는 신령스럽지 못해서 그렇겠는가? 이것은 진실로 물성(物性)이 그렇게 된 것이니 괴이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비비거나 쇠와 돌을 쳐서 불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화정(火精)의 구슬을 햇빛에 향하고서 애주(艾炷)에 비치면 훈연(熏然)히 연기가 나면서 활활 불이 피어나니, 이것은 참으로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조금씩 피지만 마침내는 활활 피어올라 곤륜산(崑崙山)을 불사르고 옥석(玉石)도 태울 수 있으니 뭐가 그리 신기로운가? 이것도 그 물성(物性)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신령스러운 물건이 까마득한 속에 붙어 있다가 사람의 정성에 감동되어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애주(艾炷) : 쑥으로 만든 심지.

 

또 불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크다. 음식을 익히면 굳은 것도 부드러워지고 온돌에 불을 피우면 찬 것이 따뜻해지고, 약물(藥物)을 끓이면 생것이 익으니 배고픈 것을 배부르게 하고 병든 것을 고칠 수 있으며, 쇠를 녹여 쟁기[耒]를 만들고 도끼[斧]를 만들며, 가마솥[釜鼎]을 만들어 백성들이 쓰는 데 이롭게 하고, 칼과 창과 검극(劒戟)을 만들어 군대가 쓰는 데 위엄있게 하니, 불의 생김의 신묘(神妙)하기가 저 같으며, 불의 용도의 유익(有益)함이 이 같은데, 그대는 모두 중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저 사리라는 것은 추워도 옷이 될 수 없고, 배고파도 먹을 수 없으며, 싸우는 사람이 병기로 삼을 수도 없으며, 병든 사람이 탕약(湯藥)으로 삼을 수도 없으니, 부처의 신령(神靈)함이 있어 한 번 빌어 수천 개를 만들게 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유익됨이 없이 인사(人事)만 폐할 뿐이니, 모두 불이나 물에 던져버려 영원히 근본을 끊어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다시 공경하게 받들어 귀의(歸依)하랴?

아아! 세상 사람들이 떳떳한 것을 싫어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며, 실리(實利)는 버리고 헛된 법을 숭상하기가 이 같으니 한탄스럽지 아니한가?”

하니 객(客)이 문득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유자(儒者)의 말이 바르고 불씨(佛氏)의 말이 그릇됨을 알겠으니, 그대의 말씀은 양웅(楊雄)도 못따르겠다.”

하였다.

이에 책 끝에 이 문답까지 적어서 하나의 논설을 갖춰 두는 바이다.

 

[필자미상불화, 지본채색, 67.6 x 44.5cm,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