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선경국전 1

從心所欲 2022. 4. 8. 12:06

조선의 건국과정에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빠질 수가 없다.

그 정도전의 가계(家系)에 대하여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낸 한영우(韓永愚) 교수는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의 <해제(解題)>에 이렇게 소개하였다. 

 

단양팔경(丹陽八景)의 하나에 삼봉(三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어떤 상(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상 보는 사람은 그에게 10년 후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서, 우연은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전(金戩)이라는 중이 여비(女婢)와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운경의 장모는 여비의 딸인 셈이요,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출생 배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양 지방의 거족(巨族)이던 우현보의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은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여 출세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정도전이 고려의 구가 세신(舊家世臣)들과 정치적 갈등을 가졌을 때, 구신들로부터 가계(家系)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며 미천하다는 험구를 여러 차례 듣고, 또 특히 우현보 일족과는 가장 심각한 구원(仇怨) 관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의 부계(父系)를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현족(顯族)이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봉화 정씨(奉化鄭氏) 세보에 의하더라도 정도전의 가계는 고조(高祖) 정공미(鄭公美)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안동군 봉화현의 향리(鄕吏) 호장(戶長)이었다. 그 다음 증조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조부 정균(鄭均)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벼슬은 모두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에 불과하다. 실직에 오른 것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이다. 정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까지 오르고, 수령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되었다.
▶현족(顯族) : 지위가 높은 가문.
▶산직(散職) : 일정한 직임이 없는 명목상의 관직.

정운경은 이렇듯 봉화 정씨로서는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지만 처신이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보잘것없었다. 정도전과 그의 두 남동생 및 누이동생은 정운경으로부터 약간의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가난했다 하더라도 중소지주적(中小地主的) 경제 기반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도전의 집안은 신분적으로는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정도전과 이성계는 어떻게 만나 조선 왕조를 건국하게 되었을까?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 등과 학문을 쌓은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당시는 중국이 원(元)에서 명(明)으로 교체되는 시기였는데, 공민왕은 안으로 유교를 부흥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재정비하고, 밖으로는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몽고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1374년에 우왕(禑王)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다시 친원반명(親元反明)으로 돌아섰고, 이에 반대하던 정도전은 유배되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고향에 머물렀다가 삼각산(三角山), 김포 등지를 전전하며 유랑하였다. 그렇게 10년간의 유배와 유랑 세월을 보낸 정도전은 1383년에 당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 함경남도 함주(咸州)로 간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막하(幕下)에 들어간 것은 역성혁명(易姓革命)에 필요한 군사력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된다.

한영우(韓永愚) 교수는 <삼봉집 해제>에 정도전과 이성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성계 휘하에는 정도전 이외에 많은 문사(文士)들이 결집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것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와의 관계를 한(漢)나라의 장양(張良)과 고조(高祖)와의 그것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가 장양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양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취중에 왕왕 토설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정도전이 이성계의 힘을 빌려 조선을 건국했다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정도전은 개국전은 물론 개국 후에도 새 왕조의 통치 규범을 확립하기 위하여 태조 7년에 비명으로 죽을 때까지 부단히 노력했다.

정도전은 새 왕조의 수도 위치를 결정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수도의 위치가 결정된 후에는 왕명을 받들어 궁전과 궁문, 도성문의 이름을 짓고, 도성 내외의 49방(坊)의 이름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감사요약(監司要約)》,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등을 저술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조직의 규범을 마련하였고, 이 저술들은 뒤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초가 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에 있어 이성계가 군사적인 기여를 했다면 사상적으로는 정도전의 기여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정도전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하고, 이어서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서 육전(六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한 글이다. 중국 고대 주나라의 관료제도에 대한 책인 《주례(周禮)》와 명나라의 형법전(刑法典)인 《대명률(大明律)》을 참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새 왕조에 기대하는 정도전만의 정치철학이 담겨있다. 태조 3년인 1394년 5월 30일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태조 이성계에게 바쳤는데 그 때에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는 전[撰進朝鮮經國典箋]’이라는 글도 함께 올렸다.

 

분의좌명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奮義佐明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 판삼사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판상서사사 수문전태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판의흥삼군부사 세자이사 봉화백(判三司事同判都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太學士知經筵藝文春秋館事判義興三軍府事世子貳師奉化伯) 신 정도전은 말씀드립니다.

삼가 도승지 상경(尙敬)이 신을 위해서 구계(具啓)한 것을 받았사온데, 그는 신에게 《조선경국전》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어서, 교서를 받들고 지어 올리는 것이옵니다. 이에 부명(符命)을 잡고 도참(圖讖)을 받아 비로소 홍휴(鴻休)의 운수를 열었으니, 강기(綱紀)를 세우고 베풀어서 자손에 대한 계책을 해야 하므로, 주(周) 육관(六官)의 이름을 모방하여 조선 일대의 법전[朝鮮一代之典]을 세우는 것입니다.
▶구계(具啓) : 사실(事實)을 자세(仔細)히 임금에게 알림.
▶홍휴(鴻休) : 개국(開國).
▶부명(符命)을 잡고 도참(圖讖)을 받아 : 부명은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주는 표이고, 도참은 미래기(未來記)에 해당함. 이는 곧 임금의 자리에 오를 운명을 받았음을 뜻함.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 ‘고조(高祖)가 부명을 받고 도참을 받아 하늘의 뜻을 따라 나쁜 이를 베었다[高祖膺籙受圖順天行誅].’에서 나온 말이다.
▶주 육관(周六官) : 중국 주(周)나라 때의 육관(六官). 《周禮》에 의하면 천지와 춘하추동을 상징하여 천관(天官)ㆍ지관(地官)ㆍ춘관(春官)ㆍ하관(夏官)ㆍ추관(秋官)ㆍ동관(冬官)이 있었는데, 천관은 총재(冢宰)로 온 정사를, 지관은 사도(司徒)로 교화와 농상(農商)을, 춘관은 종백(宗伯)으로 제사ㆍ전례(典禮)를, 하관은 군정(軍政)을, 추관은 사구(司寇)로 옥송(獄訟)ㆍ형벌을, 동관은 사공(司空)으로 수토(水土)를 각각 관장하였다.

생각하옵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덕을 체 받으시어 왕위를 인(仁)으로써 얻으셨습니다.
국호(國號)를 정하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고, 세자[儲副]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셨습니다. 세계(世系)로써 쌓이고 쌓인 경사(慶事)를 나타내셨고, 교서(敎書)로써 관대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다스리는 방법은 상신(相臣)에게 책임지우시고, 세금[貞賦]은 실지로 공용(公用)에 쓰여졌습니다.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시어 귀신과 사람을 화하게 하셨으며, 무사(武事)를 강론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형벌로써 간사한 이를 꾸짖고 난폭한 짓을 막으며, 공(工)으로써는 한도와 분량을 알맞게 하셨으니, 이에서 창업(創業)하여 자손에게 이어 줌이 어려움을 보여, 충분한 준비로써 수성(守成)함을 오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서책[汗簡]에 실어 명산(名山)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용졸한 자질로서 외람되게 전하의 지우(知遇)를 얻어, 저작(著作)의 자그마한 재주를 가지고 생성(生成)의 지극하신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마는 그 성덕(盛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워서 대강(大綱)ㆍ소기(小紀)만을 모두 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경국전》을 삼가 써서 전(箋)과 함께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옵서는 한가한 시간이 있으시면 관람해 주옵소서. 비록 성상의 밝은[緝熙] 학문에는 도움이 못되더라도 시정(施政)에 있어서는 조금은 취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격절하고 송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箋) : 임금에게 올리는 한문 문체의 하나. 경전이나 고서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해설하여 원작자의 뜻을 밝히거나 자기의 의견을 써 넣은 글. 중국에서는 천자에게 올리는 서장을 표(表)라 칭하고 황후나 태자에게 올리는 글을 전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중국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표라 하고, 우리나라 임금에게 올리는 글은 전이라 하였다.

 

《태조실록》에는 《조선경국전》을 받아본 태조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다.

“임금이 이를 관람하고 감탄하여 칭찬하면서 구마(廐馬)와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ㆍ백은(白銀)을 내려 주었다.”

▶구마(廐馬) : 어용(御用)을 위하여 기르는 말. 임금이 공적(功績)이 있는 신하에게 하사(下賜)하는 물품으로도 쓰였다.

 

[《조선경국전》 초간본 첫 장, 1457년 이전, 종이에 목판인쇄, 보물 1924호, 수원화성박물관 ㅣ 1책 79장.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초간본이다.]

 

지금 전하는 《조선경국전》 초간본의 시작은 ‘서(序)’로 시작되는데 이는 정도전이 쓴 것이 아니고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정총(鄭摠)이라는 신하가 나중에 쓴 것이다.

 

육전(六典)이 생긴 지가 오래 되었다. 《주례(周禮)》를 상고해 보니 첫째 치전(治典)은 나라에 법을 세우고, 관부(官府)를 다스리고 온 백성을 통솔하는 것이요, 둘째 교전(敎典)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관부를 가르치고 온 백성을 길들이는 것이요, 셋째 예전(禮典)은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백관을 통솔하고 온 백성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요, 넷째 정전(政典)은 나라를 평정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고 온 백성을 균등하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 형전(刑典)은 나라의 책임을 묻고 백관의 본보기로 삼고 온 백성을 규찰하는 것이요, 여섯째 사전(事典)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그 임무를 백관에게 맡기고 온 백성을 살린다고 하였으니, 치(治)는 이(吏)요, 교(敎)는 예(禮)요, 정(政)은 병(兵)이요, 사(事)는 공(工)이다.

예전부터 지금까지의 천하와 국가의 치란성쇠를 환하게 상고할 수 있으니, 그 중에 다스리고 흥한 것은 이 육전을 밝혔기 때문이요, 그 중에 어지럽고 망한 것은 이 육전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에 정치와 교화가 차차 해이하고 기강이 무너져 육전이란 것이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졌으니, 뜻있는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다시 다스리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우리 전하가 하늘의 뜻에 순종하고 백성의 뜻에 따라 잔악하고 포학한 것을 제거하여 나쁜 폐단은 다 개혁하고 교화를 일신하게 하였다. 때때로 그 성적을 조사하여 잘못한 사람은 내쫓고 잘한 사람은 올려 준 것은 치전(治典)에 밝은 것이요, 부역을 덜어주고 세금을 내려서 백성을 잘 살게 한 것은 교전(敎典)에 밝은 것이다. 수레와 옷이 제도가 있어 웃사람과 아랫사람의 분별이 있어 예전(禮典)이 밝게 되었다고 할 수 있고, 군대를 잘 다스려 외적을 막았으니 정전(政典)이 밝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형벌이 실정에 맞아 백성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으니 형전(刑典)이 밝지 않다 할 수 없고, 온갖 공업을 잘 다스려 모든 업적이 잘 되어 나가니 사전(事典)이 밝지 않다 할 수 없다.

판삼사사 봉화백(奉化伯) 신(臣) 정도전(鄭道傳)이 이 책을 만들어서 《경국전(經國典)》이라 이름하고, 전하께 바치니 전하가 기뻐하여 유사에게 명령하여 금궤(金樻)에 넣어두라 하고, 드디어 신 정총(鄭摠)에게 명령하여 그 책 끝에 서문을 지어 붙이라고 하였다. 신 정총은 삼가 생각해 보건대, 한 시대의 일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한 시대가 만들어 놓은 제도가 있는 법이다. 진실로 밝은 임금과 어진 정승이 서로 만난 것이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전하는 참되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고 재상에게 위임했으며, 삼사공(三司公)은 천의(天意)와 인도(人道)를 연구한 학문과 경제(經濟)의 재주를 가지고 왕업을 도와 이룩하였으며, 그 좋은 문장으로 이 대전(大典)을 만들었으니, 다만 전하가 밤중에 한가로이 보시는 데만 도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손만대에 귀감이 될 것이니, 아, 지극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약 그저 문장으로만 본다면 책과 사람이 따로 되어 책은 책이요, 사람은 사람이니, 다스리는 도(道)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자사(子思)가 《중용》을 지을 적에 구경(九經)을 논하기를, “그 행하는 것은 한 가지니 한 가지는 무엇을 말한 것인가? 정성이다.” 하였으니, 신 또한 이 이 책에서 이런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 바이다.

 

정총(鄭摠) 역시 조선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했던 인물이다.

 

 

참고 및 인용 :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