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정도전 25 - 불씨잡변 서(序)와 발(跋)

從心所欲 2022. 3. 30. 10:16

정도전(鄭道傳)은 『불씨잡변』의 저술을 마친 뒤, 권근(權近)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 뒤인 1398년 9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면서 『불씨잡변』은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근 60년이 지나서 정도전의 유고(遺稿)가 족손(族孫) 한혁(韓奕)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한혁이 같은 해 급제자인 양양 부사(襄陽府使) 윤기견(尹起畎)에게 이를 보였고, 내용에 감탄한 윤기견이 이를 간행하였다.

 

서(序) [권근(權近)]

내 일찍이 불씨(佛氏)의 설이 세상을 매우 미혹(迷惑)시키는 것을 근심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하늘노릇을 하고 사람이 사람노릇을 하는 데에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설이 서로 같지 않다. 역상(曆象)이 있은 뒤로부터 한ㆍ서(寒暑)의 왕래와 일월(日月)의 영휴(盈虧)에는 모두 그 일정한 수(數)가 있어 천만 년을 써도 어긋남이 없는 것은, 하늘이 하늘노릇을 하는 데 정하여진 것이니 불씨의 그 수다하고 고상한 말[須彌說]들이 다 거짓이다.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만물을 화생(化生)시키는데, 이른바 음양오행이라는 것은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으니, 그 온전한 것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친 것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된다. 그러므로 오행의 이치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상(五常)의 성(性)이 되고 그 기(氣)는 오장(五臟)이 되니, 이것이 우리 유가의 설이다.
▶수다하고 고상한 말[須彌說] :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산이 수미산(須彌山)이다. 그곳은 많은 보물이 있고 가장 높다는 뜻에서, 수다하고 고상한 말을 ‘수미설’이라 한다.

의원(醫員)이 오행으로써 장맥(臟脈)의 허(虛)와 실(實)을 진찰하여 그 병을 알고, 점치는 사람도 오행으로써 그 운기(運氣)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미루어 그 명(命)을 알고, 또 천만 년을 써도 다 증험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사람이 사람노릇을 하는 데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불씨의 사대설(四大說)은 허망(虛妄)한 것이다. 그 시(始)를 따져 추구(推究)하여 사람의 태어난 까닭을 알지 못한다면 그 종(終)에 가서 사람의 죽는 까닭을 어찌 알리요? 그러므로 윤회설(輪廻說) 또한 족히 믿을 수 없는 것이니, 내 이러한 이론을 가진 지 오래다.”
하였다.

이제 삼봉(三峯) 선생의 《불씨잡변(佛氏雜辨)》 20편을 보니 그 윤회설(輪廻說)과 오행(五行)에 대한 의ㆍ복(醫卜)의 변론이 가장 명백하게 갖추어졌으며, 그 나머지 변론도 극히 자세하며 절실하고 명백하여 다시 남은 것이 없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이치를 밝히고, 개연(慨然)히 배운 바를 행하되, 이단을 물리칠 뜻이 있어 강론(講論)할 때마다 순순(諄諄)히 힘껏 변론함으로써 학자(學者)들도 다 흐뭇하게 청종(聽從)하였다.
일찍이 심기리(心氣理) 3편을 저술하여 우리의 도(道)가 바르고 이단(異端)의 도가 치우침을 밝히었으니, 그 명교(名敎 유교(儒敎)를 말함)에 공(功)이 크다. 성조(聖朝)를 만나 더욱 교화(敎化)를 경륜(經綸)하여, 일대(一代)의 다스림을 일으켰으니 배운 바의 도를 비록 다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역시 어느 정도 행했다 하겠는데, 선생의 마음으로는 오히려 모자라는 듯하여 반드시 그 임금을 요순(堯舜)같이, 그 백성을 요순 때의 백성과 같이 하고자 하였으며, 이단에 이르러서는 더욱 모두 물리쳐서 다 없애지 못함을 자기의 근심으로 삼았다.
▶명교(名敎) : 유교(儒敎).

무인년(1398년, 태조7) 여름에 병으로 며칠 동안 휴가를 얻었을 때에 이 글을 저술하여 나에게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해가 인륜(人倫)을 헐어 버린지라 앞으로는 반드시 금수(禽獸)를 몰아와서 인류를 멸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니, 명교(名敎)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선 그들을 적으로 삼아 힘써 공격하여야 할 것이오. 일찍이 ‘내 뜻을 얻어 행하게 되면 반드시 말끔히 물리쳐 버리겠다.’고 했었는데 이제 성상(聖上)께서 알아주심을 힘입어, 말을 하면 듣고 계획하면 따르시니 뜻을 얻었다고 하겠는데 아직도 저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끝내 물리치지 못할 것만 같소. 그러므로 내가 분을 참지 못해 이 글을 지어 무궁한 후인(後人)들에게 사람마다 다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 때문에 비유를 취한 것이 비속하고 자질구레한 것이 많으며, 저들을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하기 위해 글을 쓰는 데 분격함이 많았소. 그러나 이것을 보면 유교와 불교의 분변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당장에는 행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후세에 전할 수 있으니 내 죽어도 편안하오.”
하였다.

내가 받아서 읽어보니 모두가 적절한 말씀이어서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양묵(楊墨)이 길을 막음에 맹자(孟子)가 말로서 물리쳤는데,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니 그 폐해가 양묵보다 심하였으므로, 선유(先儒)들이 이따금 그 그릇됨을 변박하였으나 책을 지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당나라의 한퇴지(韓退之 퇴지(退之)는 한유(韓愈)의 자(字)) 같은 재주로도 장적(張籍)ㆍ황보식(皇甫湜)의 무리들이 따라다니며 저서하기를 청했으나, 역시 감히 저서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그 아랫사람들이랴? 이제 선생께서 이미 힘써 변론하여 당세(當世)를 교화하였고, 또 글을 써서 후세에 전하였으니, 도(道)를 근심하는 생각이 이미 깊고도 넓다. 사람들이 불교에 미혹되는 것이 사생설(死生說)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선생이 스스로 불교를 물리침으로써 죽어도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들의 그 미혹됨을 버리게 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에게 보이는 뜻이 또한 깊고도 간절하도다.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삼성(三聖)의 계통을 잇는다.’고 하였는데, 선생은 또한 맹자를 계승한 분이로다.
장자(張子)의 이른바 ‘독립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정일(精一)하여 스스로 믿어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라고 한 것이 참으로 선생을 두고 이름이다. 내 참으로 공경하고 감복하여 배우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말한 것을 글로 써서 질정(質正)한다.
▶장자(張子) : 중국 북송 때의 철학자인 장재(張載).

홍무(洪武 : 명(明)태조의 연호) 31년(1398년, 태조7) 5월 보름에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서(序)한다.

 

발(跋) [윤기견(尹起畎)]

삼봉(三峯) 선생이 지은 《경국전(經國典)》과 《심기리(心氣理)》 및 시문(詩文) 등은 모두 세상에 행하고 있으나, 다만 이 《불씨잡변(佛氏雜辨)》 한 책은 선생이 선성(先聖)을 본받고 후세사람을 가르친 것으로서 평생의 정력(精力)을 쏟은 것인데, 인몰(湮沒)되어 전하여지지 않으므로 식자(識者)들이 한탄하였다.

무오년(1438년, 세종20)에 내가 생원(生員)으로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동년진사(同年進士) 한혁(韓奕)이 선생의 족손(族孫)이었다. 집에 간직한 정리되지 않은 많은 책 가운데에서 이 글을 얻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므로, 그것을 보니 그 문사(文辭)가 호일(豪逸)하고 변론이 세미(細微)한 데까지 두루 미쳤으며, 성정(性情)을 발휘(發揮)하고 허탄(虛誕)한 것을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성문(聖門)의 울타리이며 육경(六經)의 날개이다.
내 애독하여 보배로 삼아 간직한 지 오래였더니, 이제 양양(襄陽) 군수가 되어 마침 일이 없으므로 공사(公事)를 마친 여가에 잘못된 글자 30여 자를 교정하고는 공인(工人)을 시켜 간행(刊行)하여 널리 전하노니, 다행히 우리의 도(道)에 뜻이 있는 자는 이 글로 인하여 사특(邪慝)한 것을 물리치고, 이단에 미혹된 자는 이 글로 인하여 그 의심을 푼다면 선생이 이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한 뜻이 거의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의 도(道) 또한 힘입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글이 다행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어찌 우리 도(道)의 커다란 다행이 아니겠느냐?

경태(景泰 : 명경종(明景宗)의 연호) 7년(1456년, 세조2) 5월 중순(中旬)에 금라(金羅) 윤기견(尹起畎)이 공경하여 발문(跋文)을 짓는다.
【안】 금라(金羅)는 함안군(咸安郡)의 별명(別名)이다.

 

[함경남도 고원군 양천사 대웅전 불화, 일제강점기 때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1977, 조준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