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목민심서 126 – 공문서는 수령이 직접 작성해야 한다.

從心所欲 2022. 4. 29. 09:02

[ 경직도 ( 耕織圖 ) 10 폭 병풍  中  5 폭 ,  각 폭  90.5 x 31.5cm,  국립민속박물관 ]

 

●봉공(奉公) 제4조 문보(文報) 1
공이문첩(公移文牒)은 마땅히 정밀하게 생각하여 손수 써야지 아전들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公移文牒 宜精思自撰 不可委之於吏手)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4조인 문보(文報) 공문서를 말한다.
공이문첩(公移文牒) : 공이(公移)는 공문(公文), 문첩은 문서로 곧 제반 공문서.

 

호태초(胡太初)가 말하였다.

사람 상대는 날마다 번거로워지고 심신은 날로 소모되니, 바야흐로 쉴 틈이 없음이 걱정인데, 다행하게도 이독(吏牘)이 이미 갖추어졌다 하여, 아전을 시켜 머리를 숙이고 붓 가는 대로 쓰게 하면, 결국에는 구차한 길로 돌아갈 따름이다.”

관례에 따라 형식만 갖추는 문첩(文牒)은 아전에게 맡겨도 무방하나, 혹 백성을 위해서 폐단을 설명하고 그 개혁을 도모한다거나, 혹 상사의 영을 거역하더라도 받들어 행하지 않기로 작정한 경우에는, 만약 아전의 손에 맡긴다면, 반드시 사()를 끼고 농간을 부려 그 요긴한 말은 빼고, 너절한 말만 늘어놓아 그 일을 낭패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어찌 쓸 수가 있겠는가. 만약 무인(武人)이나 오활한 선비로서 이문(吏文)에 익숙하지 못하면 마땅히 기실(記室)한 사람만 데리고 가서 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호태초(胡太初) : 송나라 때의 관리.
이독(吏牘) : 관리들 사이에 서로 쓰는 서간(書簡).
기실(記室) : 기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사람.

 

다산필담(茶山筆談)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주자(朱子)의 글을 읽되, 오직 편지에서 성리(性理)의 설만 보고 그 중에서 한 귀절을 따서 대책(對策)에 쓰려 할 뿐이요, 주자 학문의 출처가 공이(公移)의 제편(諸篇)에 있는 줄을 모른다. 무릇 수령이 된 자는 주자의 공이(公移)를 가져다가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외고 읽어 그것을 본뜬다면, 속리(俗吏)는 면하게 될 것이다.”

대책(對策) : 책문(策問)에 답하는 글.
공이(公移)의 제편(諸篇) : 주자대전(朱子大全)100에 수록된 주희가 관직에 있을 때 쓴 공문서.

 

한 위공(韓魏公)은 행정 실무에 부지런히 하여 모든 장부나 문서를 검찰하고 따지는 일을 모두 몸소 하였다. 좌우에 있는 어떤 사람이,

공께서는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으시며 공명이 이와 같으므로, 조정에서 한 고을을 내려 주어 봉양하도록 하였으니, 작은 일은 몸소 다루지 마십시오.”

하니, 그는 말하였다.

내가 번거로운 수고를 꺼리면, 아전과 백성이 그 폐해를 받게 될 것이다. 또 봉록이 하루 1만 전()인데, 일을 보지 않으면 내 어찌 편안할 것인가.”

▶한 위공(韓魏公) :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송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던 관리.

 

명망과 지위가 조금 높은 자는 고을을 얻으면 대체만 지키려 하고 작은 일은 몸소 하지 않고, 오직 음악과 풍류만으로 즐기니, 이것이 옳겠는가?

 

한지(韓祉)가 군수나 감사로 있을 적에 항상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다.”

하고, 매양 문서를 만들 때 초안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막료들이나 향승(鄕丞그리고 군관까지 두루 보여서 그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 썼다.

한지(韓祉) : 조선 숙종과 경종 때의 관리. 본관은 청주(淸州). 청백(淸白)하고 문명(文名)이 있었다
향승(鄕丞)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별감(別監).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