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奉公) 제3조 예제(禮際) 12
전관(前官)이 흠이 있으면 덮어주어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전관이 죄가 있으면 도와서 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前官有疵 掩之勿彰 前官有罪 補之勿成)
▶봉공(奉公) : 『목민심서(牧民心書)』 제3편인 봉공(奉公)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등, 공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6조로 나누어 논하였다. 봉공(奉公)의 제3조인 예제(禮際)는 ‘예의 있게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전관이 공금〔公貨〕에 손을 댔거나 창곡(倉穀)을 축내고 혹 허위 문서를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것을 들추어내지 말고 모름지기 기한을 정하여 배상하도록 하되, 기한이 지나도 배상하지 못하거든 상사와 의논하도록 한다.
혹 전관이 세력 있는 집안이나 호족에 속해서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일을 어그러지게 처리하면서 뒷일은 걱정하지 않는 자일 경우, 내가 그를 대응하는 데에는 강경하고 엄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굴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이 때문에 죄를 입어서 평생토록 불우하게 되더라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기공(沂公) 왕증(王曾)이 진요자(陳堯咨)와 교대하여 대명부(大名府)를 다스리게 되었다. 정사를 보게 되어서는 전임자의 것을 고치는 바가 없고, 정치하는 데 불편한 점이 있으면 자세하게 그때그때 대처하고 그의 잘못을 다 덮어주었다. 왕증이 옮겨가게 되어 진요자가 후임으로 다시 와서 감탄하기를,
“왕공(王公)은 재상이 될 만하다. 나의 도량은 그를 따를 수가 없다.”
하였다. 대개 진요자는 왕증이 옛날의 혐의를 가지고 반드시 그의 잘못을 들추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증(王曾), 진요자(陳堯咨) : 송나라 때의 관리들. |
부요유(傅堯兪)가 서주(徐州)를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전임 수령이 군량을 축내었는데, 부요유가 대신 보상하다가 다 채우지 못하고서 파직되어 떠났으나, 그는 끝내 변명하지 않았다.
소강절(邵康節)이 칭찬하기를,
“흠지(欽之)는 맑으면서도 빛나지 않고, 곧으면서도 격(激)하지 않으며, 용감하면서도 온순하니, 그러므로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부요유(傅堯兪) : 송나라 때의 관리. 인품이 중후하고 말이 적었다고 한다. ▶소강절(邵康節) : 안락(安樂)선생으로 알려진 송나라의 소옹(邵雍). 자는 요부(堯夫), 강절은 그의 시호이다. |
육방(陸垹)이 악주(岳州) 수령이 되었을 때였다. 전에 큰 나무가 강물에 떠서 그 고을 경내로 들어왔는데 전임 수령은 그것이 황실에 쓰일 나무인 줄을 모르고 기방(起坊)에 보내주었다. 독목사자(督木使者)가 잘못 육방을 논죄(論罪)하였으나 육방은 그 사실을 변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변명하라고 종용하니 육방이,
“내가 위에 알리면 전임 수령이 죄를 받을 것이니, 차라리 내가 죄를 지고 돌아가는 것이 좋다.”
하였다.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사실이 밝혀졌다.
▶육방(陸垹) : 명나라 때의 관리. ▶기방(起坊) : 건축의 일을 맡은 곳. ▶독목사자(督木使者) : 나무에 대한 일을 감독하는 사자. |
호문공(胡文恭)이 호주(湖州)를 맡아 다스릴 때였다. 전임 수령이던 등공(滕公)이 학교를 크게 일으켜, 수천 만 금을 소비하고 일을 끝내지 못한 채 등공은 파직되어 떠났다. 여러 무리들이 등공이 공금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지 않다고 비방하면서 통판(通判) 이하가 장부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호문공은
“그대들이 등후(滕侯)를 도운지 얼마나 되는가. 등후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왜 일찍 충고하지 않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다가 그가 떠남을 기다려 이제서야 그를 비방하니 어찌 옛사람이 비방을 함께 나누는 뜻이랴!”
하니, 모두가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호문공(胡文恭) : 중국 후한 때 사람인 호광(胡廣). 문공(文恭)은 시호. |
임일악(林ᅳ鶚)이 진강 지부(鎭江知府)로 있을 적에 치우친 것을 바로잡고 폐단을 고치는데, 무릇 전임자의 정사에 해이된 것을 차례로 다스리되, 한마디도 전임자의 잘못을 드러내 말한 적이 없고 오직,
“반드시 이렇게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할 뿐이었다.
▶임일악(林ᅳ鶚) : 명나라 때의 관리였던 임악(林鶚). 일악은 그의 자(字). |
대개, 신관(新官)과 전관과의 관계는 결코 그를 곤경에 빠뜨려서 지위를 뺏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처(前妻)는 후처를 미워하고 구장(舊將)은 신장(新將)을 미워하는 것은 또한 사람의 상정(常情)인 것이다. 평소의 친구끼리 한 번 벼슬자리를 서로 교대하다가 드디어 원수가 되는 예가 많다. 신관의 명예가 갑자기 빛나면 싫어하고, 전 사람의 잘못이 갑자기 퍼지면 싫어하는 것이니, 이런 것들이 모두 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상국(相國) 정지화(鄭知和) - 호는 남곡(南谷)이다. - 가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있을 적에 전 부윤(府尹)이 장죄(贓罪)를 지어 옥에 들어갔다. 정지화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을 맡아서 몸소 어지러운 장부를 열람하다가, 한 가지 일이라도 그를 도와줄 만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면서,
“교대하는 전관과 후관의 의리는 본래 형제와 같은 것이니, 이것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야 하겠다.”
하고는 감사에게 극력 변명하여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정지화(鄭知和) : 조선 인조 때부터 숙종 때까지의 문신(1631 ~ 1688). 호는 남곡(南谷) 또는 곡구(谷口), 본관은 동래(東萊). ▶장죄(贓罪) : 관리가 뇌물을 받은 죄. |
이태연(李泰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전임자가 모리배들에게 속아서 군향곡(軍餉穀) 수만 석을 포흠(逋欠)하여, 대신(臺臣)이 그에 대해 말하였는데, 공이 방법을 강구하여 보충하였지만, 또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태연(李泰淵) : 조선 인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의 관리(1615 ~ 1669) ▶군향곡(軍餉穀) : 유사시에 군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비축해둔 양곡 ▶포흠(逋欠) :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써버림. |
번역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이정섭 역, 1986), 다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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