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능행도 4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5

화성행차의 일곱째날인 윤2월 15일은 화성행차를 끝내고 한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진시(辰時) 정3각(正三刻)인 오전 8시 45분경에 정조는 융복에 말을 타고, 혜경궁은 가교를 타고 거동을 시작하여 중양문(中陽門)을 나와 신풍루를 자나 장안문 밖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문무과 별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꽃모자를 쓴 무동들을 데리고 줄을 서서 왕의 일행을 맞이했다. 정조의 행차는 1772명의 수행원과 말 786필이 따랐으며 행렬의 길이는 1km가 넘었다고 한다. 정조와 혜경궁은 그 날의 숙박지인 시흥행궁을 향하는 도중 사근행궁(肆覲行宮)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근행궁(肆覲行宮)의 위치는 현재의 의왕시 시청별관 앞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천행궁(果川行宮),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안산행궁(安山..

우리 옛 그림 2021.09.28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3

화성 행차 5일차인 윤2월 13일 오전, 화성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화성행차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정조가 혜경궁의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다. 잔치는 진정(辰正) 3각(오전 8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회갑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혜경궁의 두 딸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를 포함한 내빈(內賓) 열 세 명과 외빈(外賓) 예순 아홉 명이었다. 여기서 내빈은 홍씨 집안의 아내와 딸들을 가리키고 외빈은 8촌 이내 동성친족의 남자를 가리킨다. 회갑잔치는 전통적인 왕실 예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잔치는 혜경궁이 내합에서 봉수당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취위(就位) - 혜경궁에..

우리 옛 그림 2021.09.26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2

성묘 전배를 마친 정조는 다시 화성 행궁으로 돌아와 문무과 별시(別試)를 거행하였다. 윤 2월 11일 진시(辰時 : 아침 7 ~ 9시)에 융복을 입은 정조가 화성 행궁의 별당(別堂)인 낙남헌(洛南軒)에 친림하여, 어머니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賦)’를 문과 시제(試題)로 내렸다. 이어서 무과에 응시한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 활을 쏘게 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쯤에 과거의 급제자 명단을 발표하는 의식인 방방의(放榜儀)가 거행되었다. 이 날 별시의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5명,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56명이었다. 급제자에게는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사화(賜花), 사주(賜酒), 관대(冠帶) 등이 하사되었다. 문무과의 장원이라 할 갑과(甲科)에는 각 1인이 선발되었는데, ..

우리 옛 그림 2021.09.25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1

정조가 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하여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들리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던 일은 익히 잘 알려진 일이다. 정조는 1795년 윤2월 9일 이른 아침에 1800명에 가까운 배종(陪從) 인원과 함께 창덕궁을 떠나 화성으로 출발하였고, 첫날은 시흥행궁에서 묵은 뒤 이튿날 저녁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정조는 화성에 머무르는 동안 향교를 참배하고 별시(別試)를 거행했으며, 현륭원에서 제사하고, 군사훈련을 지휘한 뒤 어머니를 위한 회갑연을 베풀고 15일 화성을 떠나 16일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이 8일간의 행차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의궤의 글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고, 주요 예식의 ..

우리 옛 그림 2021.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