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3

從心所欲 2021. 9. 26. 08:00

화성 행차 5일차인 윤2월 13일 오전,

화성 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화성행차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열렸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정조가 혜경궁의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은 것이다.

 

잔치는 진정(辰正) 3각(오전 8시 45분경)에 시작되었다. 회갑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은 혜경궁의 두 딸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를 포함한 내빈(內賓) 열 세 명과 외빈(外賓) 예순 아홉 명이었다. 여기서 내빈은 홍씨 집안의 아내와 딸들을 가리키고 외빈은 8촌 이내 동성친족의 남자를 가리킨다. 회갑잔치는 전통적인 왕실 예법에 따라 진행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24.1 x 33.6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3폭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잔치는 혜경궁이 내합에서 봉수당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는 취위(就位) - 혜경궁에게 음식상을 올리는 진찬(進饌) - 정조가 혜경궁에게 잔을 올리는 진작(進爵) - 정조가 혜경궁의 덕을 칭송하고 축수를 기원하여 바치는 치사(致詞) 낭독 - 혜경궁이 정조가 올린 잔을 드는 거작(擧爵) - 정조와 배종백관들이 세 번에 나누어 “천세(千歲)“, “천세“, “천천세“를 부르는 산호(山呼) - 혜경궁에게 다시 새로운 음식상과 꽃, 탕(湯)을 올리고 백관들에게도 술과 음식을 베풀고 꽃을 뿌리는 두 번째 진찬(進饌) - 정조부터 시작해서 외명부, 외빈, 척신 등이 차례로 혜경궁에게 술잔을 올리는 제1작부터 제7작(爵) - 음식상을 치우는 후례(後禮) - 연회가 끝났음을 고하면 혜경궁이 자리에서 내려와 내합으로 들어가는 예필(禮畢)의 순서로 치러졌다. 물론 각 순서마다 정해진 연주와 여악(女樂)이 곁들여졌다.

 

 

 

 

 

진찬이 시작되고 부르는 창을 선창악장(先唱樂章)이라 한다. 60세의 계섬과 47세의 덕애가 창을 담당했는데 그 가사는 이렇다.

 

즐거운 잔치가 태평시대에 열렸으니 태평함을 나타내는 상(象)이 있도다.
그 상(象)이 어떠한고?
노인성(老人星)이 중천(中天)에 빛나도다.
기쁨이 나에게 머물르니 길이 즐거운 봄이요,
성수를 빌러 온 여인은 화봉인(華封人)이로다.
길고 긴 봄날 장락궁(長樂宮)에 술잔치 열고
화봉인은 어머니께 삼수(三壽)를 송축하도다.
아들을 돕고 손자에게 끼친 공이 얼마나 높으신지
넘치는 복록 밝게 빛나도다.
함지와 운문(雲門)을 연주하고,
옥장(玉漿)과 경액(瓊液)을 해마다 준비하도다.

 

다음 날인 음력 윤2월 14일은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오전 5 ~ 7시 사이인 묘시(卯時)에 정조는 화성행궁의 유여택(維與宅)에 행차하여 이렇게 하교하였다.

 

"사민(四民), 기민(饑民)이 그 수가 4,819인이라 하는데 사미(賜米)할 때 네 곳에 나누어 보낼 승지는 이미 임명하였다. 가승지 이유경은 사창(社倉)으로 가고 조진관(趙鎭寬)은 산창(山倉)으로 가며 홍인호(洪仁浩)는 해창(海倉)으로 가서 먼저 어제 하교한 내용을 가지고 일일이 효유해서 혜경궁의 은혜에 의해 쌀을 주고, 죽을 먹이는 것임을 알게 할 것이며, 사미, 궤죽(饋粥)을 모두 친림(親臨)한 가운데 하여 혹시라도 빠뜨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성 내외의 사민 및 진민(賑民)은 내가 마땅히 친림하여 나누어 줄 것이다."

▶유여택(維與宅) : 화성행궁의 한 건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정조가 행차할 때는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로 쓰였다. 1795년 행차 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사민(四民) :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獨子)
▶진민(賑民) : 가난하여 구휼이 필요한 백성.▶사미(賜米) :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것.

 

묘시(卯時) 초 3각(오전 5시 45분경)에, 정조는 융복을 갖추어 말을 타고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2층 누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동부승지 이조원(李肇源)에게 "너는 내려가서 쌀은 배급하고 죽을 똑같이 나누어 먹여 사미와 궤죽이 모두 혜경궁의 은혜에서 나왔다는 뜻을 뭇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라" 라고 하교하고 또, "선전관(宣傳官)은 죽 한 그릇을 가져오라. 내 마땅히 죽맛이 어떠한가를 보겠다." 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24.1 x 16.8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이날 신풍루를 포함한 네 곳에서 거행된 사미와 궤죽 행사에서 사민(四民)의 어른에게는 쌀 6말, 어린 아이에게는 4말씩을 나누어 주었고, 진민(賑民)에게는 쌀과 소금을 약간씩 나누어 주었다. 또한 모두에게 죽을 나누어 먹였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