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환유첩(宦遊帖) 4

從心所欲 2021. 9. 13. 06:38

[「환유첩(宦遊帖)」中 <안의지도(安義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안의현(安義縣) 경상남도 함양 지역의 옛 행정구역이다. 원래의 이름은 안음(安陰)이었으나, 영조43년인 1767년에 안음현에서 안의현으로 바뀌었다. 1767년 이웃 산음현(山陰縣)에서 일곱 살 난 아이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여 지명을 산청현(山淸縣)으로 고쳤는데, 이때에 즈음하여 안음현도 ‘음(陰)’자를 ‘의(義)’자로 바꾼 것이다.

 

읍치(邑治)는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 일대에 해당된다. 함양군의 안의면, 서상면, 서하면과 거창군의 마리면, 북상면, 위천면이 관할 지역이었다. 소백산맥의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여러 갈래의 산줄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전라도와 경계에 있는 군현이다.

 

안의현도 조선시대에 한 차례 곡절을 겪었다. 1728년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때, 경상도에서는 안음현의 정희량(鄭希亮)이 주동이 되어 거병하였다. 그래서 난이 진압된 후 조선 조정은 역도의 고을이라는 이유로 안음현을 폐지하고, 이 지역을 거창현과 함양군(咸陽郡)에 나누어 분속시켜 버린 것이다. 안음현은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736년(영조 12)에 복구되었다.

관아재 조영석(趙榮祏)이 1738년부터 1743년까지, 연암 박지원은 1792년부터 1796년 봄까지 안의현감을 지냈다.

 

<안의지도(安義地圖)>는 1888년 7월에 그려졌다.

 

[「환유첩(宦遊帖)」中 <신천지도(信川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신천(信川)은 조선시대 황해도에 있던 고을이다.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라는 이름이었고, 조선이 창건된 이후 1395년에 풍해도 신주로 되었다가, 세종 때인 1413년에 황해도 신천현(信川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고을이름에 ‘산(山)’이나 ‘천(川)’자를 붙이던 규례에 따라 신천현이 되었다. 1469년에는 신천군으로 승격되었다. 이곳 출신으로 명나라의 환관이 된 정동(鄭同)의 청에 의하여 군(群)으로 승격되었다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인구는 총 1,886호 5,425인이었다. 조선 후기인 1759년(영조 35)에는 총 1만 1965호에 인구가 3만 6898인으로 증가하였다.

 

<신천지도(信川地圖)>는 1890년 12월에 그려졌는데, 홍기주는 이때 군수(郡守)로 승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군수는 종4품직으로, 군수에 제수되면 반드시 왕을 알현하고 임지로 떠나도록 되어 있기에 오랜만에 궁궐에 들어가게 된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지도 왼쪽 상단에 보이는 구월산(九月山)은 심한 풍화작용으로 도처에 기암절벽이 형성되고 그 사이에 작은 내가 흘러 풍치가 아름다운 명산(名山)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다.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단군이 수도를 평양에 정하였다가 이곳 구월산으로 옮기고 수 천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도 전한다. 산에는 단군에 관한 성적(聖蹟)이 곳곳에 있는데 단군이 있었다는 장당경(藏唐京),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을 모시는 삼성사(三聖祠), 단군이 올라가 나라의 지리를 살폈다는 단군대(檀君臺), 활쏘는 데 사용한 사궁석(射弓石) 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환유첩(宦遊帖)」中 <천안지도(天安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천안군(天安郡)의 읍치는 충청남도 천안시 오룡동 일대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천안은 원래 고대부터 있던 고을이 아니라 후삼국시대인 93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군사적 목적으로 신설한 고을이다. 읍치 동북쪽 12리의 왕자산(王字山)에 왕건이 다섯 마리의 용이 구술을 다투는 풍수의 명당 형국이어서 왕자성(王字城)을 쌓아 군사를 조련하였다고 한다. ‘천안(天安)’이라는 지명도 고려 태조가 ‘하늘 아래의 으뜸가는 요충지(要衝地)’라고 명명한 데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안의 읍치 지역은 세 하천이 만나 서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평지에다, 북쪽의 산줄기 역시 아주 낮은 야산이나 언덕에 불과하여 조선시대의 풍수적 관점에서는 좋은 입지가 아니라 한다.

 

천안삼거리는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이었다. 북쪽으로는 평택과 수원을 거쳐 한양에 이르는 길이고 남쪽으로는 청주를 거쳐 문경새재를 넘어 안동과 영주, 대구, 경주로 연결되었고 서쪽으로는 논산을 거쳐 전라도의 전주, 광주, 목포방향으로 가는 길이 나뉘어 있었다.

 

지금의 천안지역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했던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 지역이었다. 천안군은 고려의 천안부(天安府)에서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는 영산군(寧山郡)이 되었다가 1416년에 다시 천안군으로 개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천안의 호구는 506호에 2,385명이었다.

 

<천안지도(天安地圖)>는 1892년 4월에 제작되었다.

 

 

 

참조 및 인용 : 한국민속박물관, 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신정일, 2012, 다음생각), 한국지명유래집(2010, 국토지리정보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2  (0) 2021.09.25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1  (0) 2021.09.24
환유첩(宦遊帖) 3  (0) 2021.09.12
환유첩(宦遊帖) 2  (0) 2021.09.10
환유첩(宦遊帖) 1  (0) 2021.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