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환유첩(宦遊帖) 2

從心所欲 2021. 9. 10. 13:17

홍기주는 다음 해인 1883년에 함경도에서 전라남도 곡성(谷城)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환유첩(宦遊帖)」中 <곡성지도(谷城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곡성은 북쪽은 전라북도 남원과 순창에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구례, 서쪽은 담양, 남으로는 순천, 화순과 접해 있다. 지도에도 보이듯 고을을 둘러싼 많은 산들로 골짜기[谷]로 성(城)을 이룬 산지다. 고을의 동북부와 남쪽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이다.

 

고을 동쪽을 흐르는 강은 섬진강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역마다 섬진강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남원에서는 '순자강(鶉子江)', 곡성에서는 '압록강(鴨綠江)', 구례에서는 '잔수강(潺水江)', 그리고 광양에서는 '섬진강(蟾津江)' 혹은 섬강(蟾江)으로 각기 다르게 불렀다고 한다. 지도에서도 위의 남원에서 곡성으로 들어오는 물에는 ‘순자강(鶉子江)’으로, 아래쪽 구례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에는 '압록강(鴨綠江)'으로 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홍기주는 곡성에 부임한지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또 전라북도 전주(全州)로 옮겨갔다.

 

[「환유첩(宦遊帖)」中 <전주지도(全州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전주의 또 다른 이름은 완산(完山)으로 두 지명이 오랫동안 같이 사용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 이곳에 완산 유수부(留守府)가 설치되었고, 태종 3년인 1403년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었다.

 

19세기 전주의 읍치(邑治)는 지금의 전주시 경원동, 중동, 풍남동 일대에 있었다. 전주에는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라남북도 총 56개 군현을 통괄하던 전라감영이 있었다. 전주감영은 조선시대 서울,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관청이었다.

전주가 천 년이 넘는 도시로서의 역사를 감안할 때 전주성이 축성(築城)된 시기는 고려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1734년 전주성이 너무 오래 되어 퇴락한 것을 전라감사 조현명이 확장 개축하였으나 영조 43년인 1767년에 전주에 큰 불이 나서 민가 천여 호를 태우고 문루까지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 해에 전라감사 홍낙인(洪樂仁)이 남문과 서문을 복구하고 각각 풍남문(豊南門)과 패서문(沛西門)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전주 내성(內城)과 전주부(全州府)에 속한 31개 면(面)에 등록된 민호(民戶)의 수는 21,000호 가량이었다.

 

홍기주는 다음 해인 1884년, 전라북도 무주(茂朱)로 발령이 났다.

 

[「환유첩(宦遊帖)」中 <무주지도(茂朱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무주(茂朱)는 ‘전라북도의 지붕’이라 불릴 만큼 소백산맥 줄기에 둘러싸인 고원지대다. 예전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기도 했다. 관아 아래에 바위로 빙 둘러쌓아 놓은 것 같은 적상산성(赤裳山城)이 보인다.

 

적상산(赤裳山)은 4면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으로, 산의 붉은색 바위가 마치 산이 붉은 치마를 입은 것 같다고 하여 적상(赤裳)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천험의 요새로 알려진 곳으로 석축(石築) 산성이 있었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축조를 건의하였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산성의 둘레는 5km(1만6920척) 정도이고, 성내에는 비옥한 토지와 함께 못이 4개소, 우물이 2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광해군이 이곳에 적상산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북방에 위치하여 후금(後金)의 위협과 관리의 문제가 있었던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의 실록(實錄)을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기 시작하였다.

 

[「환유첩(宦遊帖)」中 <평강지도(平康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평강(平康)은 강원도 철원과 김화(金化) 사이에 있던 현(縣)으로 지금은 북한지역이다. 홍기주는 1885년 3월에 이곳에 부임하였다. 매번 부임지에서 1년을 못 채우고 옮겨 다녀야 했으니, 홍기주의 벼슬살이도 꽤나 고달팠을 것 같다.

<평강지도(平康地圖)>는 교통로에 중점을 두고 길과 거리를 매우 상세하게 밝혀 놓았다.

 

지도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창랑정(滄浪亭)과 정연(亭淵)은 금강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많은 문인들이 찾았던 곳이라 한다. 주상절리 절벽으로 유명한 남한 지역 한탄강의 최상류에 위치하여 병풍 같은 암벽이 강변의 푸른 숲이 어우러진 명소였다. 창랑정(滄浪亭)은 광해군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던 월담(月潭) 황근중(黃謹中)이 인조가 일으킨 정변으로 관찰사를 그만두게 되자 고향에 내려와 한탄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지은 정자이다. 정연(亭淵)은 정자가 있는 연못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창랑정 아래는 물이 맑고 배를 띄울 만큼 수심도 깊었다 한다.

겸재 정선도 금강산을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려 그림을 남겼다.

 

[정선 「관동명승첩」 中 <정자연>, 지본담채, 32.3 x 57.8cm, 간송미술관]

 

 

참조 및 인용 : 한국민속박물관, 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신정일, 2012, 다음생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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