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환유첩(宦遊帖) 3

從心所欲 2021. 9. 12. 09:46

홍기주는 다시 또 8개월 만에 충청도의 온양(溫陽)으로 옮겨갔다. 홍기주가 무능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수령이 이렇게 자주 바뀌어서야 고을이 제대로 다스려질 수도 없고 수령 또한 관리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도 없다. 어쩌면 이런 것이 망해가는 나라의 한 단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환유첩(宦遊帖)」中 <온양지도(溫陽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지금은 아산시로 통합되었지만 조선시대 온양군의 읍치는 온양군 읍내동 일대에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온양온천 때문에 탕정(湯井)·온수(溫水)·온천(溫泉)·온양(溫陽) 등의 고을 이름이 만들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온양온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세조 10년) 3월 초하루에 온양군의 온탕에 거가(車駕)를 머무르셨다. 그러한 지 4일 만에 신천이 홀연 솟아올라 뜰에 가득히 흘러 찼다. 성상께서 크게 기이하게 여기시고 명하여 그곳을 파니, 물이 철철 넘쳐 나오는데 그 차기가 눈과 같고, 그 맑기는 거울 같았으며, 맛은 달고도 짜릿하였고, 성질이 부드럽고도 고왔다. 명하여 수종한 재상들에게 반포해 보이시니 서로 돌아보며 놀라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 서로 이르기를 옛날에 없던 것이 지금 새로 생기어 탕정(湯井)의 물은 따뜻하고 이 우물은 차니, 이는 실로 상서의 발로라고 하며 팔도에서 표문을 올려 하례 칭송하니, 드디어 주필(駐畢) 신정(神井)이란 이름을 내렸다.
▶주필(駐畢) : 임금의 행차 중에 ‘어가(御駕)를 멈추고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

 

[「환유첩(宦遊帖)」中 <거창지도(居昌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지도가 그려진 시기는 1886년 7월이다. 온양지도를 그리고 나서 9개월 후이다.

조선 시대 거창현(居昌縣)은 지금의 거창읍, 고제면, 웅양면, 주상면, 남상면, 남하면, 가조면, 가북면 일대였다.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은 조선 시대 거창현 지역과 안의현(安義縣), 삼가현(三嘉縣) 일부가 합쳐진 것이다.

신라 시기에는 거열군(居烈郡)으로 불렸으며, 8세기 중엽 경덕왕(景德王)이 ‘거창(居昌)’으로 이름을 고쳐 부른 이래 조선 시대까지 대표 지명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전기 거창현의 모습을 싣고 있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의 경상도 거창현조에는 "호수가 505호, 인구가 1,64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47명, 진군(鎭軍)이 39명, 선군(船軍)이 268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창은 조선시대 내내 부침을 거듭하였다.

연산군 1년인 1495년에는 거창현이 연산군의 왕비 신씨(愼氏)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로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마저도 폐비가 되면서 거창군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다 효종9년인 1658년에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거창현에서 일어나면서 강상죄를 범했다 하여 거창현은 폐지되고 일시적으로 안음현과 통합되었다. 2년이 지난 뒤에야 다시 고을이 복구되었고, 영조4년인 1728년에는 거창현의 읍격(邑格)을 높여 거창도호부(居昌都護府)를 설치하였다.정조12년인 1788년에는 거창도호부에서 다시 거창현으로 환원되었다가, 정조 23년인 중종반정으로 폐비되었던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영조 때 복위된 연장선상에서 단경왕후의 관향인 거창현을 다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후 거창은 고종32년인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이 될 때까지 도호부로서의 읍격을 유지했다.

 

 

현(縣)은 고을의 크기에 따라 작은 고을에는 종6품의 현감(縣監)이, 큰 고을에는 종5품의 현령(縣令)이 고을 수령(守令)직을 맡았다. 반면 도호부(都護府)는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大邑)으로 3품 이상의 사(使)가 수령이 되고 그 밑으로도 부사(副使, 4품), 판관(判官, 6품), 사록(司錄, 7품), 장서기(掌書記, 7품), 법조(法曹, 8품), 의사(醫師, 9품), 문사(文師, 9품) 등의 관속이 갖추어지게 된다. 태종 15년인 1415년에 군(郡) 가운데 1,000호 이상의 지역을 도호부로 승격시킨 이래, 도호부의 수는 세종 때 38곳에서 고종 때에는 75곳까지 늘어났다.

 

전후하여 홍기주가 맡았던 고을 수령의 품계를 고려하면, 홍기주는 이때 부사(府使)로 부임한 것이 아니라 6품인 판관(判官)으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환유첩(宦遊帖)」中 <고산지도(高山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고산현은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 백제에서 조선시대까지 있었던 현이다. <고산지도(高山地圖)>는 1886년 10월에 제작되었다.

 

고산현은 백제 때에 설치된 현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했다. 통일신라 때에는 전주의 속현(屬縣)이었고, 고려와 조선에서도 고산현(高山縣)이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였다. 조선에 들어서 태조1년인 1392년부터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에는 “사방 경계[四境]는 동·서·남쪽으로 전주(全州)에 이르는데, 동쪽이 35리, 서쪽이 14리, 남쪽이 7리요,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20리이다. 호수가 2백 60호요, 인구가 2천 28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이 16명이요, 진군이 48명이요, 선군이 44명”이라고 조선 초기의 고산현 상황을 기록했다. 조선 후기에는 민호(民戶)가 4천호를 넘어섰다.

 

[「환유첩(宦遊帖)」中 <순안지도(順安地圖)>, 지본채색, 국립민속박물관]

 

순안(順安)은 지금 평양순안국제공항이 있는 평양시 순안구역 일대의 옛 이름이다. 태조5년인 1396년 평안도 평양부(平壞府) 순화현(順和縣)의 치소(治所)를 평양부 안정참(安定站)으로 옮기면서 이름을 순안(順安)으로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 순화현의 ‘순(順)’자와 안정참의 ‘안(安)’자를 따서 순안현이라 하였다. 참(站)은 ‘역마을’을 가리킨다.

지도는 1887년 5월에 제작되었다.

 

순안은 평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또한 남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산맥으로 둘러싸여 평양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이기도 했다. 지도 오른쪽 구석에 보이는 자모산성(慈母山城)은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지키던 위성들 가운데에 하나였다. 평양의 북부를 방어하는 요지였기 때문에 고려태조 이후 계속 성을 수축했으며 둘레가 약 5km에 달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근 읍민 수만 명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명종 때에는 임꺽정[林巨正]이 이 산성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자모산성 왼쪽의 법흥사(法興寺)는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려들에게 왜군을 반대하여 일어설 것을 호소하여 이곳에서 1,500여 명의 승군을 조직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참조 및 인용 : 한국민속박물관, 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신정일, 2012, 다음생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1  (0) 2021.09.24
환유첩(宦遊帖) 4  (0) 2021.09.13
환유첩(宦遊帖) 2  (0) 2021.09.10
환유첩(宦遊帖) 1  (0) 2021.09.07
관서십경도(關西十景圖) 4  (0) 2021.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