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2

從心所欲 2021. 9. 25. 10:41

성묘 전배를 마친 정조는 다시 화성 행궁으로 돌아와 문무과 별시(別試)를 거행하였다.

윤 2월 11일 진시(辰時 : 아침 7 ~ 9시)에 융복을 입은 정조가 화성 행궁의 별당(別堂)인 낙남헌(洛南軒)에 친림하여, 어머니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賦)’를 문과 시제(試題)로 내렸다. 이어서 무과에 응시한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 활을 쏘게 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쯤에 과거의 급제자 명단을 발표하는 의식인 방방의(放榜儀)가 거행되었다. 이 날 별시의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5명,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56명이었다. 급제자에게는 붉은 종이에 쓴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사화(賜花), 사주(賜酒), 관대(冠帶) 등이 하사되었다. 문무과의 장원이라 할 갑과(甲科)에는 각 1인이 선발되었는데, 두 사람에게는 커다란 일산(日傘)인 개(盖)가 내려졌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방방도(放榜圖)>, 24.1 x 16.8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2폭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방방도(放榜圖)>에 그려진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는 실제 급제자 61명보다 적은 42인이고,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에는 166인이나 된다. 화폭의 크기에 따라 가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에서 오른쪽 3줄로 늘어선 짧은 줄은 문과 급제자이고, 왼쪽에 7명씩 늘어선 인원들은 무과 급제자들이다.

 

 

 

 

방방의를 마친 정조는 바로 봉수당(奉壽堂)으로 이동하여 이틀 뒤에 열릴 혜경궁의 회갑잔치 예행연습을 참관하였다.

"모레 회갑연은 처음 있는 성대한 행사인 관계로 거행의 의식 절차에 여령(女伶)의 가장 어려움은 중식(中式)인데, 경기(京妓)는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많이 익혀서 경험이 있을지 모르나, 화성부의 여령은 생소함을 면치 못할 것이 틀림없다. 오늘 과거합격자 발표를 일찍 마쳤으므로 경들과 함께 이 뜰에서 차례대로 예행연습을 시키라."

▶상호도감(上號都監) : 존호를 올리는 일을 주관하는 관청

 

다음날인 윤2월 12일 정조는 오전 5시가 못 되어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거동하였다. 정조는 군복을 갖추어 말을 타고 혜경궁은 가교에 올라 출발하였다. 현륭원에 도착하여 정조와 혜경궁은 가마를 타고 원(園) 위에까지 올라갔는데, 두 사람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비통(悲痛)함을 절제하지 못하여 울음소리가 휘장 밖에 까지 들려 나왔다.

 

[화성시 소재 융릉(隆陵) : 고종 때에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도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바뀌었다. 문화재청 사진]

 

혜경궁이 슬퍼하다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신하들에게 정조는 "출궁할 때는 어머니께서 십분(十分)너그러이 억제하겠다는 하교의 말씀이 계셨다. 여기 도착하니 비창(悲愴)한 감회가 저절로 마음속에서 솟아나 내 자신이 이미 억제할 수가 없었으니 더구나 어머니의 마음이야 어떠하시겠는가?"라고 하였다.

현륭원을 떠날 때 혜경궁의 가마가 홍살문[紅箭門]밖에 이르자, 혜경궁은 가마를 멈추게 한 뒤 원(園) 위를 한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다시 가마를 출발시켰다.

 

[융릉 정자각에서 바라 본 홍살문 방향.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박석으로 만든 길인 참도(參道)로 이어져 있다. 문화유산포탈 사진]

 

현륭원에서 돌아온 정조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성에서 하는 군사훈련을 성조(城操)라 하고, 낮에 하는 훈련을 주조(晝操), 밤에 하는 훈련을 야조(夜操)라 한다. 원래는 두 훈련을 모두 계획하였지만 현륭원에서 돌아온 시간이 늦어져 야간 훈련만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야조(夜操)가 실시된 시간은 오후 7시였고 훈련은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다. 훈련에는 3,700명의 군사가 참가하였는데 모두 장용영(壯勇營) 소속의 군사들이었다.

장용영은 1785년 국왕 호위 전담부대로 설치한 장용위(壯勇衛)를 1793년에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나뉘어 확대 개편한 군영(軍營)이다.

 

정조는 화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西將臺)에서 황금갑옷을 입고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정조임금이 친림해 있는 서장대 주변은 2,700명의 친위 군사들이 겹으로 에워 쌓았고, 성벽을 따라 횃불을 밝혔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24.1 x 16.8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5폭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서장대에서 성조를 사열한 감회를 이렇게 시로 지어 문방위에 붙였다.

 

능원을 호위함이 중대한 일이지만

공사를 다스려 경영함에 허비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도다.

성(城)은 평지를 따라서 뻗었고

대(臺)는 멀리 하늘 높이 솟았도다.

일만 장벽은 교모가 웅장하고

삼군(三軍)은 의기가 호걸스럽도다.

대풍가(大豊歌)를 한 번 연주하니

붉은 해가 갑옷[鱗袍]을 비추도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