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4

從心所欲 2021. 9. 27. 09:06

[『화성성역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행궁전도(行宮全圖)>, 24.3 x 33.3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 행차의 여섯째 날인 윤2월 14일에는 사미와 궤죽에 이어 양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신풍루에서 사미와 궤죽 행사를 지켜보던 정조는 행좌승지 이만수에게 "오늘 양로연을 베풀려고 하는 것은 노인을 존경하기 위함이니, 여러 노인들로 하여금 밖에서 오래 지체하여 기다리게 할 수 없다. 내가 곧 낙남헌에 갈 것이니 경은 이곳에 남아 있다가 사민 중에 와서 기다리는 자에게 일일이 죽을 먹이고 혹시 나중에 와서 제시간에 오지 못한 자가 있더라도 일체 차가운 죽을 먹이지 말고 직접 챙겨서 혹시라도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오전 8시 15분경에 삼엄(三嚴)을 알리는 북이 울리고 정조가 융복(戎服)을 갖추어 입고 양로연이 열리는 낙남헌에 나와 자리에 올랐다.

▶삼엄(三嚴) : 엄(嚴)은 임금의 거둥이나 군사 행동 때에 태세를 갖추도록 계고(戒告)하는 령(令)으로서, 북을 쳐서 알렸다. 첫 번째 북소리가 울리는 초엄(初嚴)에서는 준비를 시작하고, 두 번째 북소리가 울리는 이엄(二嚴)에서는 태세를 갖추고, 세 번째 북소리가 울리는 삼엄에서는 일을 개시하였다.

 

양로연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화성에 사는 노인 384명이었다. 여기에 화성까지 정조를 배종(陪從)한 신하가운데 영의정 홍낙성을 포함하여 70세가 넘은 관료 15명도 함께 참석했다. 2품 이상은 장막의 기둥안쪽에 들어가고, 3품 이하는 계단 위 월대에 자리했으며, 초대된 사대부와 서민 노인들은 모두 자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와 계단 아래에 열을 지어 앉았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24.1 x 16.8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4폭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노란 비단 손수건인 황주건(黃紬巾)을 나누어 주어 노인들의 지팡이에 붙들어 매게 하고 또한 각각 비단 한 단(段)씩을 하사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의 제안에 따라 영의정과 우의정, 영돈녕(領敦寧)의 세 대신이 정조에게 잔을 올리자 정조는 "내가 평소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나 오늘의 취함은 오로지 기쁨을 표하기 위한 것이니 경들도 또한 흠뻑 취해야 할 것이다."라며 흥을 돋웠다. 아울러 "화성부에 거주하는 노인이 장부에 오르지 않아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을 파악하여 유수(留守)로 하여금 모두 초청케 하고, 장외(仗外)에 관광(觀光)하는 가운데서도 만약 노인이 있으면 멀고 가깝고,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모두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이라."고 하교하였다.

 

 

 

 

양로연에 참석했던 정조는 낙남헌에서 나와 말을 타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갔다. 이는 자신이 설계한 화성의 성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서였는데 성곽 건물 중에서 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이 방화수류정이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정자’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화성의 동북쪽 군사지휘소이기도 하다.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쪽 구릉 정상에 위치해 있다.

 

[『화성성역의궤』속의 동북각루 내외도, 수원문화재단]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속의 동북각루 내외도, 수원문화재단]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수원문화재단 사진]

 

[방화수류정 하부 성벽 내부, 수원문화재단 사진]

 

그날 오후 신시(申時)에 정조는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였다. 득중정은 화성행궁 내의 활터에 세운 정자이다. 정조13년인 1789년에 세워졌고 그 이듬해에 정조가 이곳에 행차하여 활 4발을 쏘았는데 4발이 모두 적중하자 이를 기념하여 정조가 직접 득중정(得中亭)이라는 편액(扁額) 글씨를 써서 내린 곳이다.

활쏘기에는 영의정을 비롯하여 수어사, 경기 감사, 장용영의 내사와 외사가 참석하였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는 횃불을 켜놓고 활을 쏘았다.

 

활쏘기가 끝난 후에는 같은 장소에서 매화시방(埋化試放)이 있었다. 시방(試放)은 총이나 대포를 시험 사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화시방(埋化試放)은 화약 성능시험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가 이 행사에 혜경궁을 모신 것을 보면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에 보이는 것처럼 불꽃놀이 형태로 이루어진 것 같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24.1 x 16.8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6폭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제목은 왕이 활을 쏘는 어사도(御射圖)로 되어 있지만 임금의 모습이나 행동을 그림 속에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에 밤에 거행된 매화시방(埋化試放) 장면으로 대신하였다. 병풍차 상단에 혜경궁의 가마를 그려 넣어 혜경궁이 행사에 참석했음을 나타냈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