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조선시대 비옷

從心所欲 2021. 10. 2. 06:27

겸재정선미술관이 지난 2019년 11월, 미술관에서 새롭게 소장하게 된 <10폭 백납병풍>을 공개한 일이 있었다. ‘백납(百納)’은 ‘백가지를 꿰맨다’는 뜻으로, 온갖 종류의 그림들을 모아 만든 병풍이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공개한 병풍에는 조선과 중국 화가들의 그림 42점이 망라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정선의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였다.

 

[<10폭 백납병풍>의 해체 전 모습. 겸재정선미술관]

 

사문탈사(寺門脫蓑)는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의 뜻이다.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는 율곡 이이의 고사(故事)를 그린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고사의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선의 「경교명승첩」하첩(下帖)의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와 거기에 함께 장첩 되어 있는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의 편지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편지는 이병연이 1741년 겨울에 양천 현령으로 있던 정선에게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이렇게 전한다.

 

궁하고 병든 몸이라 문안을 못 드립니다. 다시 화제를 써서 보내드리는데 사문탈사(寺門脫蓑)는 형이 익숙한 바입니다. 소를 타고 가신 율곡 고사(古事)의 본시(本試)에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해 저물고 눈이 산을 덮는데 들길은 큰 나무 숲속으로 나뉘어 간다. 또 사립문 찾아가 늦게 두드리고 읍하여 뵈니......” 
갖춰 쓰지 못하고 보내드리니 살펴보십시오.

 

편지에 의하면 정선과 이병연은 사문탈사(寺門脫蓑)에 대하여 서로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별 다른 설명 없이 ‘율곡이 소를 타고 간 고사’라고만 했는데, 율곡이 소를 타고 눈 덮인 산사를 찾았다는 사실 말고는 달리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후대로 하여금 궁금증만 남겨 놓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사문탈사(寺門脫蓑)>. 견본담채 21.2 x 33.1cm, 간송미술관]

 

그림은 도롱이를 입고 소를 탄 인물이 막 절에 도착하여 스님들의 영접을 받는 모습이다. 이병연의 편지에 따르면 도롱이를 입은 인물은 율곡 이이다. 절을 둘러 싼 큰 나무들의 마른 가지에 흰 색이 칠해진 것을 보면 눈이 온 날이다. 그런데 절의 외관이 특이하여 전혀 우리나라의 절 같아 보이질 않는다. 혹자는 이 절을 두고 화성 용주사니 서울의 봉은사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다 실없는 소리로 들린다. 젊었을 때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 스님이 되려고 금강산 만폭동의 마하연(摩訶衍) 암자에 들어갔던 입산행각으로 평생 비난을 받았던 이율곡이 그 후에 따로 절을 찾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문탈사(寺門脫蓑)의 고사는 아마도 금강산에 들어갔던 때의 일화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림 속의 절은 실제의 절이 아니라 정선의 상상이거나 예전에 보았던 중국 그림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겸재정선미술관의 <10폭 백납병풍> 속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는 앞서 간송미술관 소장본의 <사문탈사도>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정선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 견본담채 26.0 x 32.5cm, 겸재정선미술관]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사찰 문 앞을 좁게 조명한데 반하여 겸재정선미술관이 새로 공개한 <사문탈사도>는 부감법으로 사찰 전체와 그 주변 풍경을 모두 담았다. 스님들의 동작과 인물 배치도 조금 다르다.

두 그림에서는 모두 스님 들이 소 위의 인물이 입고 온 도롱이를 벗겨 받는 모습이다. 도롱이는 문헌에 사(蓑)나 사의(蓑衣), 발석(襏襫) 등으로 표현되었다. 짚이나 띠 같은 풀로, 안을 엮고 겉은 줄거리로 드리워 끝이 너털너털하게 만든 형태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별 다른 비옷이 따로 없이 양반이나 상민이나 모두 이 도롱이를 입었다. 물론 양반의 것은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하사(夏詞)에도 도롱이가 등장한다.

 

연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장만 마라
닫 드러라 닫 드러라
청약닙(靑蒻笠)은 써 잇노라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백구난 내 좃난가 제 좃난가

 

청약립(靑蒻笠)은 푸른 갈대로 만든 삿갓이고 녹사의(綠蓑衣)는 푸른색 도롱이다.

 

조선에 비옷이 등장한 것은 1700년을 전후한 때로 짐작된다. 눈비를 막기 위하여 옷 위에 껴입는 기름을 먹인 옷으로 유삼(油衫)이라고 했다. 종이로 만든 것을 지유삼(紙油衫), 목면으로 만든 것은 목유삼(木油衫)이라 했다. 유의(油衣)라고도 불리는 이 비옷을 이덕무는 치마[裙]같이 하여 머리에 써서 손으로 잡는 것이라고 했다.

작년부터 경복궁 수문장들이 이러한 전통 비옷을 착용하고 근무하는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유삼과 쓰개를 착용한 경복궁 수문장, 네이트뉴스사진]

 

 

이들이 유삼과 함께 머리에 쓴 쓰개는 지삿갓과 갈모이다. 지삿갓은 한지를 발라 만든 삿갓이고, 갈모는 갓 위에 덮어 쓰는 우모(雨帽)로 고깔처럼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동그랗게 퍼지도록 생겼는데 접으면 홀쭉해진다.

아래 김홍도 그림 속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이 유삼으로 몸을 감싼 모습이다.

 

[김홍도 <기려행려> , 수묵담채, 22.0cm × 25.8cm 간송미술관]

 

유삼과 지삿갓을 쓴 모습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확인이 된다.

 

[심사정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견본담채, 115 x 50.5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파교설후(灞橋雪後)>, 지본수묵, 52.2 x 35.9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경교명승첩」中 <설평기려(雪坪騎驢)>, 견본채색, 23 x 29.2cm, 간송미술관]

 

후대의 정선이 <사문탈사도(寺門脫蓑圖)>에 유삼(油衫) 대신 도롱이를 그린 것은 이율곡 시대의 실정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 및 인용 : 겸재정선미술관, 월간민화(2020.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