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2

從心所欲 2021. 10. 7. 05:09

최립이 첫 번에 지은 다섯 수의 시 가운데 마지막은 <호자삼인도(皓子三人圖)>의 화제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호자삼인도(皓子三人圖)>, 모시에 수묵, 호림미술관]

 

偉然而皓者兮 호호백발 노인네들 어쩌면 저리도 비범한고.
乍同而乍異 언뜻 보면 똑같다가 다시 보면 다르구나.
吾方諦視其三人兮 내가 지금 세 사람을 뚫어지게 보노라니
俄若與之爲四 어느새 나를 합쳐 사호(四皓)로 변하는 듯.

 

최립이 ‘사호(四皓)’라고 한 것은 진(秦)나라 말기에 폭정(暴政)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던 네 명의 노인, 즉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일컫는 것이다. ‘皓’는 ‘흴 호’자인데 그들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흰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상산사호는 후세에 나이 많고 덕도 높은 은사(隱士)나 산 속에 은거하는 덕망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호자삼인도(皓子三人圖)>에는 화제가 둘이나 적혀있다. 『간이집(簡易集)』에 실린 글에서 최립은 “가장 마지막 화폭(畫幅)의 세 인물을 뒤에 자세히 살펴보니, 노인들이 유희(遊戲)하는 것으로 내가 오인(誤認)한 듯하기에, 다시 그 뒤에다 고쳐서 제(題)하게 되었다.”라고 그 사연을 밝혔다. 그래서 그림 왼편에 두 번째 화제를 적었다.

 

莫是淮南門下八公之三者耶 회남 문하 팔공 중의 세 사람이 혹 아닐까.
向吾認之爲皓 아까 내가 노인으로 인식을 했고 보면
安知不復爲童也耶 또 아이가 아닐는지 어떻게 보장하랴.
今玆之遇焉 지금 이 그림을 다시 한 번 뜯어보니
其方非童非皓之間耶 선동(仙童)도 사호(四皓)도 아닌 중간치로구나.

 

다시 적은 화제의 내용은 전한(前漢)의 유안(劉安)이라는 인물에 관한 전설과 관련이 있다. 유안(劉安)은 한(漢)의 초대 황제 유방(劉邦)의 손자로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으며 거느린 빈객(賓客)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빈객 가운데 8인이 신선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변신술(變身術)에 능해서 14, 5세 정도의 동자(童子)로 곧잘 모습을 바꿨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이 유안을 인도하여 역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화제 말미에 기해상춘(己亥上春)이라고 적은 것은 1599년 음력 정월(正月)을 뜻한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호자삼인도(皓子三人圖)>,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첫 번째로 5점의 그림에 화제를 쓴 뒤 최립은 시간이 지나 다시 나머지 그림에 대한 화제를 썼다. 이에 대해 최립은 이렇게 적었다.

 

저번에 흩어진 그림을 수집해 놓은 화첩(畫帖) 중에서 절반쯤 시를 써서 돌려주었는데, 지금 다시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또 네 수를 짓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고사독서도(高士讀書圖)>,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一香爐一酒壺書一編 향로 하나 술병 하나에 책이 한 권 놓였나니
吾知先生之書非先天則後天 선천 아니면 후천인 책인 줄 내가 안 봐도 알겠노라.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책은 『주역(周易)』을 가리킨다. 송(宋)나라의 소옹(邵雍)이 복희(伏羲)의 선천 팔괘도(先天八卦圖)와 문왕(文王)의 후천 팔괘도(後天八卦圖)를 그린 것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고사독서도(高士讀書圖)>,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이어서 <노중상봉(路中相逢)>의 화제를 썼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노중상봉(路中相逢)>,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語者不形於口而形於指 말하는 자도 입 대신에 손가락으로 말을 하고
聽者不形於耳而形於拱 듣는 자도 귀 대신에 맞잡은 손으로 듣는구나.
胡琴之在袋 비파가 포대(布袋) 속에 들어 있어도
而泠泠者已動 맑고 깨끗한 그 소리 벌써 일렁거리네.

 

길에서 만나 담화하는 두 사람의 품격을 칭찬하는 시이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노중상봉(路中相逢)>,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는 <유장자행(有杖者行)>의 화제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유장자행(有杖者行)>,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孰爲杖於家 누가 집 안에서 지팡이 짚는 사람이고
孰爲杖於鄕 누가 마을에서 지팡이 짚는 사람인고.
抑無杖者居 아니면 지팡이 안 짚는 사람은 집 안에 들어 있고
而有杖者行與 지팡이 짚는 사람들만 길에 나온 것인가.

 

이 그림은 앞의 <호자삼인도(皓子三人圖)>와 인물의 배치, 표정과 동작까지도 거의 똑같고 다만 지팡이에 보따리를 걸머진 시동만 하나 더 등장한 것이 다르다. 최립이 이 그림의 화제를 쓰면서 고심을 했을 법도 하다. 그렇지만 최립은 시동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단서 삼아 화제를 썼다. 옛글에도 종종 ‘시(詩) 짓는 괴로움’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창작은 쉬운 일이 아닌 듯싶다.

 

지금 세상에 지팡이를 짚는 것에 나이의 제약이 있다면 모두가 경악할 것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 생긴 제도에 의하면, 60세가 넘어야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가 있었다 한다. 이것을 장향(杖鄕)이라고 했다. 그리고 70세가 되어서야 나라 어디든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가 있으며 이를 장국(杖國)이라고 했다. 이에 더하여 장조(杖朝)가 있는데, 이는 80세를 가리키는 말로, 그 나이가 되면 임금이 있는 조정(朝廷)에서 지팡이를 짚어도 괜찮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 실제로 이러한 것들이 제도로 실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경(五經)의 하나인『예기(禮記)』 에도 “50세가 되면 집안에서 지팡이를 짚고, 60세가 되면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는다.[五十杖於家 六十杖於鄕]”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70세가 넘은 대신들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제도가 『경국대전』에 법제화한 것도 이러한 관념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립의 화제 내용은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유장자행(有杖者行)>,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최립의 마지막 시는 <욕서미서도(欲書未書圖)>의 화제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욕서미서도(欲書未書圖)>,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書以出紛紛知不知 글을 쓰면 아는 것 모르는 것 다 드러나니
吾樂子欲書未書時 쓰고 싶지만 아직 안 쓴 그때가 나는 즐겁다.

 

솔직함이 담긴 자기 고백 같은 내용이다. 연담(蓮潭) 같은 고상한 호와 함께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썼던 화가 김명국(金明國)은 ‘취하고 싶지만 아직 취하지 않은[欲醉未醉]’ 때에 가장 좋은 그림들을 그려냈다고 한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욕서미서도(欲書未書圖)>,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최립은 이 <욕서미서도(欲書未書圖)>를 쓴 뒤에 마지막으로 앞의 <시주도(詩酒圖)> 오른쪽에다 제발(題跋)을 씀으로써 홍준이 부탁한 일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

이때에 최립은 홍준이 갖고 있는 이경윤의 족자 그림 두 점에도 제찬을 썼는데, 시는 전하나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미술관, 간이집(이상현, 2000,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