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조의 현륭원 행차 - 화성능행도 5

從心所欲 2021. 9. 28. 10:23

화성행차의 일곱째날인 윤2월 15일은 화성행차를 끝내고 한성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진시(辰時) 정3각(正三刻)인 오전 8시 45분경에 정조는 융복에 말을 타고, 혜경궁은 가교를 타고 거동을 시작하여 중양문(中陽門)을 나와 신풍루를 자나 장안문 밖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문무과 별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꽃모자를 쓴 무동들을 데리고 줄을 서서 왕의 일행을 맞이했다.

 

정조의 행차는 1772명의 수행원과 말 786필이 따랐으며 행렬의 길이는 1km가 넘었다고 한다.

정조와 혜경궁은 그 날의 숙박지인 시흥행궁을 향하는 도중 사근행궁(肆覲行宮)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근행궁(肆覲行宮)의 위치는 현재의 의왕시 시청별관 앞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천행궁(果川行宮), 시흥행궁(始興行宮), 안양행궁(安養行宮), 안산행궁(安山行宮), 화성행궁(華城行宮)과 함께 모두 정조가 현륭원 행차의 편의를 위해 한성에서 수원에 이르는 길목에 세운 6개의 행궁 중 하나다. 사근행궁은 본채인 정당(正堂)과 별채인 별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채 좌우에 창고가 하나씩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었다. 시흥행궁은 114칸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7폭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휴식 중인 혜경궁의 가마. 주위를 천으로 둘러 막았다.]

 

 

 

다음날인 16일 아침,

묘시 정삼각(오전 6시 45분)에 정조는 군복을 갖추어 말에 오르고, 혜경궁은 가교를 타고 시흥행궁을 떠났다. 도중에 정조가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자 미리 기다리게 한 시흥 경내(境內)의 부로(父老)들 앞에서 말을 세우고 그들에게 물었다.

 

"보통 때 어가가 지나가는 데에도 반드시 시혜(施惠)의 방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물며 오늘 혜경궁을 모시어 시흥 행궁에 두 번이나 묵게 되고 회란이 만안(萬安)하니, 나의 행복스러운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무엇을 아끼겠는가? 반드시 그 백성들의 요역을 감면하고 그들의 폐막을 없애어 혜경궁의 은혜를 널리 알리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할 것이니, 너희들이 만일 할 말이 있으면 각자 숨기지 말고 말하라."

 

그러자 백성들은, "성명(聖明)의 세상을 다행히 만나 한 벌의 옷이나 한 끼의 밥이라도 군은(君恩)이 아님이 없으니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할 만한 질고(疾苦)는 별로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러한 말들은 곧 너희들에게 겉치레 인사이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니 매양 은택을 내리지 못함을 걱정한다. 더구나 구중심수(九重深邃)에서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 길 없으니 지척의 어가 앞에서 생각들을 말하게 하여 아뢰지 못하던 어려움을 아뢰게 하여 여러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자 함인데, 너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 어찌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고 있는가?" 하였다.

다시 행우승지가 정조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 의견을 수렴한 결과 나라에서 집집마다 부과하는 부역(賦役)인 호역(戶役)에 대한 의견이 나왔고 정조는 이에 대한 개선을 지시하였다. 아울러 매년 자신이 정월에 행행(行幸)할 때마다 백성들이 눈을 쓸고 길을 닦는 것은 폐가 되니 다음부터는 원행(園幸)일자를 봄, 가을의 농한기로 정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정조의 행렬은 지금의 대방동인 번대방(番大坊), 상도동 고개인 만안현(萬安峴)을 지나 노량행궁(鷺梁行宮)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하고 배다리를 건넜다.

정조는 1789년에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길 때, 뚝섬에 배다리를 놓고 건넌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조는 1790년에 직접 배다리[舟橋] 설치의 기본원칙을 <주교지남(舟橋指南)>이란 글로 써서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정조는 그 서문에 이렇게 밝혔다.

 

"배다리 제도는 시경(詩經)에 실려 있으면서 사책(史冊)에도 나타나 있어서 그것이 시작된 지는 오래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외지고 막혀서 오늘날까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그것을 실행할 뜻을 가지고 묘당(廟堂)에 자문(諮問)하고, 부로(父老)들에게까지 물어본 것이 부지런하고도 정성스럽지 않은가? 임금의 명(命)을 백성에게 전하고 시행하는 지위에 있는 자들이 일찍이 분.수.명(分.數.明) 석 자(字)를 마음속에 두고 착수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는 것이, 다만 대강 계획하고 건성으로 하는 것에서 나왔다.“

▶분.수.명(分.數.明) : 나누고 셈하고 명확하게 하는 것.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주교도(舟橋圖)>, 24.1 x 33.6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이어 지형과 강폭, 배의 선택과 수효, 배의 높이, 횡판 설치, 횡판 위에 잔디 깔기, 난간설치, 배의 닻 내리는 방법, 선창의 설치, 기구의 보관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언급했다.

그 결과 1795년의 배다리는 2월 13일에 시작하여 11일간의 작업 끝에 노량진에 완성되었고, 철거되기까지 20일 이상 설치되었었다. 주교 설치에는 다리를 연결하는 교배선(橋排船) 36척을 비롯하여 배다리 좌우의 난간선 240척 등 총 400여 척이 동원되었다. 배다리에 동원된 배들은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동미(大同米)를 운임을 받고 운송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배다리는 행차가 끝난 다음날인 윤2월 17일에 철거 하였다.

정조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명일(明日)부터 주교(舟橋)를 철거하여 내려 보내고 뱃사람들이 혹시라도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한 뒤 말을 탄 채 혜경궁의 어가를 모시고 배다리를 건넜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中 제6폭 <주교도(舟橋圖)>, 견본채색, 151.5 x 66.4cm, 국립중앙박물관]

 

정조는 다리를 건넌 후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가 돈화문(敦化門)을 통해 대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5일 뒤인 윤2월 21일에는 정조가 춘당대에서 행차에 수행한 장사(壯士)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음식을 베풀었다.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 병풍 ,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원형백과(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