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1

從心所欲 2021. 10. 6. 05:28

낙파(駱坡)이경윤(李慶胤, 1545 ~ 1611)은 종실화가이다. 성종의 8남(男)인 익양군(益陽君) 이회(李褱)의 종증손(從曾孫)으로, 종친계(宗親階)에 의하여 정3품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지만 따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이경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들은 당대부터 뛰어나다는 평을 받으면서 화명(畵名)을 얻었다. 당대 절파화풍(浙派畵風)의 대가로 꼽히던 김시(金禔)와의 교유를 통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경윤의 그림이 단아하면서 깨끗하고 욕심 없는 담박함이 드러나는 높은 화격(畵格)의 작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면서, 이경윤이 죽은 뒤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찾게 만들었다. 아울러 동시대와 그 뒤를 세대의 문사들이 그의 그림에 시와 글을 남겼다.

 

전하는 이경윤의 작품들에는 낙관이 없기 때문에 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어왔다.

그런 가운데 호림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산수인물화첩》만은 이경윤의 진품이라는 주장에 별 다른 이의가 제기되지 않고 있다. 이 화첩에는 산수인물화 9점이 들어있는데 산수화 2점과 소경인물화(小景人物畵) 7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의 화첩이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으로 소개하고 있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첩에는 산수화 2점은 없이 소경인물화 7점만 들어있다.

 

이 화첩은 이경윤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경윤과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홍준(洪遵)이 이경윤의 그림을 모아 당시의 유명한 문장가였던 최립(崔岦)에게 제찬을 의뢰한 데서 비롯되었다. 종종 홍준 대신에 홍사문(洪斯文)이 이름처럼 인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사문(斯文)은 유학자(儒學者)를 뜻하는 호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홍준이 제찬을 부탁했다는 최립(崔岦, 1539 ~ 1612)은 ‘그림에 김시(金禔), 글씨에 한호(韓濩), 문장에 최립’이라고 하여 그 시대의 삼절(三絶)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한호는 흔히 한석봉으로 알려진 서예가로 석봉(石峯)은 그의 호이다. 최립은 한석봉의 외가 쪽 인척이기도 했다.

 

최립의 시문집인 『간이집(簡易集)』 제8권 서도록(西都錄)에는 ‘홍사문(洪斯文) 준(遵)이 지닌 학림수(鶴林守)의 낱폭 그림에 제(題)하다’라는 제목 아래 시 5수(五首)가 실려 있다.

그 첫 번째 시가 화첩에 <시주도(詩酒圖>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의 화제(話題)이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시주도(詩酒圖)>, 모시에 수묵, 23.3 x 22.5cm, 호림미술관]

 

空中兮爲軒窓 공중에다 누각을 만들 수는 있더라도
詩酒兮安能使之雙 시와 술을 쌍으로 그려 낼 수야 있겠는가.
可見者兮隨以一缸 술 단지 들고 따라가는 모습은 볼 수 있겠지만
不可見者兮滿腔 가슴 가득 시심(詩心)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림 왼쪽이 화제로 쓴 시이고 끝의 ‘간이(簡易)’는 최립의 호이다. 그림 오른쪽에 쓰인 글은 화첩의 제발에 해당하는 글로, 나중에 쓴 글이다. 내용을 보면 화첩이 제작된 경위를 유추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명화(名畫)는 대부분 재능이 뛰어난 종실(宗室)에게서 나왔는데,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석양정(石陽正)의 매죽(梅竹)이나 학림수(鶴林守) 형제의 수석(水石) 같은 것도 매우 우수한 작품에 속한다. 홍사문(洪斯文)이 북쪽에서 올 적에 학림수의 흩어진 그림들을 유락(流落)한 가운데에서도 많이 수집해 가지고 나에게 와서 보여 주며 화제(畫題)를 부탁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인물을 묘사한 것이 그중에서도 특히 핍진(逼眞)하였으니, 요컨대 모두가 범속(凡俗)한 풍골(風骨)들이 아니었다. 나는 학림공(鶴林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쩌면 이 그림 속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인물을 그려 넣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핍진(逼眞) : 실물과 다름없을 정도(程度)로 몹시 비슷함, 사정(事情)이나 표현(表現)이 진실(眞實)하여 거짓이 없음.

 

석양정(石陽正)은 세종의 현손으로 묵죽(墨竹)을 잘 그렸던 이정(李霆, 1554 ∼1626)이다. 학림수(鶴林守)는 이경윤이 정3품 학림정에 진봉(進封)되기 전의 정4품 품계이고, 형제라 한 것은 이경윤과 동생인 죽림수(竹林守) 이영윤(李英胤)을 가리킨다. 이영윤도 영모와 화조에 뛰어났던으로 전해진다.

‘홍사문(洪斯文)이 북쪽에서 올 적에’라는 것은 홍준이 함경도 도사(都事)와 평안남도 함종 현령(咸從縣令)을 지내고 돌아올 때를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홍준은 돌아와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사간원의 종3품직인 사간(司諫)에 올랐다.

 

아래는 국립박물관소장 화첩의 <시주도(詩酒圖)>이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시주도(詩酒圖)>,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은 거의 같으나 포치(布置)에 차이가 있다. 화폭에 비해 인물의 크기가 작아지고 화제와 발문을 쓰기 위한 공간을 미리 염두에 둔 듯 여백이 많아졌다. 덕분에 글과 그림이 한데 잘 어우러져 훨씬 정리되고 안정된 느낌이다. 반면 이런 점 때문에 이 그림은 적어도 최립이 직접 화제를 썼던 그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립의 두 번째 시는 <주계단안도(舟繫斷岸圖)>의 화제이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주계단안도(舟繫斷岸圖)>,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舟繫斷岸 강가 벼랑에 매어 놓은 거룻배와
廬對煙林 안개 낀 수풀과 마주 대한 초막이라.
其人不見 그 사람은 지금 비록 볼 수 없어도
其樂可尋 그 즐거움은 알 수 있도다.

 

이 그림은 첩 속에 들어있는 2점의 산수화 가운데 하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첩에는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연림고주(烟林孤舟)로도 불린다.

별지에 붙인 화제로 보아 최립이 화제를 쓰다 실수를 해서 다른 종이에 써서 붙인 듯하다. 앞의 <시주도(詩酒圖)>에서도 ‘兮’자를 빼고 썼다가 나중에 끼워 넣은 것이 보인다. 이런 점들이 오히려 호림미술관 소장첩이 최립이 직접 화제를 쓴 진본(眞本)임을 뒷받침하는 단서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는 <일적횡취도(一笛橫吹圖)>의 화제이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일적횡취도(一笛橫吹圖)>,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峩峩而洋洋而 뾰족하게 솟은 산과 넘실대는 저 강물을
何必絃之 어찌 꼭 거문고로 타야 하랴.
一笛橫吹 그저 젓대 하나 가로 대고 부는데도
峩峩而洋洋而 뾰족뾰족 넘실넘실 흥이 넘치는 것을.

 

이 시는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인 종자기(鍾子期)의 일화를 생각하며 쓴 시로 보인다.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善哉 峩峩兮若泰山]”라고 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구나,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전이경윤필 산수인물화첩(傳李慶胤筆山水人物畵帖)》 中 <일적횡취도(一笛橫吹圖)>, 지본수묵, 34.9 x 29.7cm, 국립중앙박물관]

 

네 번째 시는 <산장수활(山長水濶)>의 화제이다.

 

[이경윤 《산수인물화첩》 中 <산장수활(山長水濶)>, 지본수묵, 호림미술관]

 

山長水闊兮 유장한 산세에 멀리 뻗은 강물 줄기
揚舲者兮爲誰 그 누가 여기에다 돛단배를 띄웠나.
雖曰無詩兮 누군가는 시가 없다 이야기를 했다지만
吾必謂之有詩 나는야 시가 있다 단정코 말하리라.

 

<산장수활(山長水濶)>은 첩에 있는 나머지 산수화다.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화첩에는 빠져있다.

시 속에 시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구절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방옹(陸放翁)이 ‘이처럼 멋진 강산에서 시구 하나도 못 짓다니[江山如此一句無].’라고 어옹(漁翁)을 조롱하였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지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 및 인용 :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미술관, 간이집(이상현, 2000, 한국고전번역원), 국역 국조인물고(1999, 세종대왕기념사업회)